▲ 서울 시내 한 주유소 모습
미국·이란 전쟁의 여파로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한 가운데 정부가 2천 원대를 넘보는 기름값을 잡기 위해 이번 주 석유 최고가격제를 전격 시행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제 시세에 일정 마진을 더해 정유사의 공급가 상한선을 정하는 방식이 유력하게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부는 이와 함께 유류세 추가 인하, 소비자 직접 지원 방안도 함께 추진하며 유가 급등에 따른 민생 부담을 최소화하고 물가 상승을 최대한 억제한다는 방침입니다.
오늘(10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전날 오후 4시 기준 서울 주유소 휘발유 평균가는 ℓ당 1천949원을 넘어섰습니다.
경유 가격은 1천971원으로 휘발유와의 격차를 더욱 벌렸습니다.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이 발생하기 전날인 지난달 27일과 비교하면 휘발유는 11%, 경유는 그보다 훨씬 높은 18%가 넘는 급격한 상승률을 기록했습니다.
현재 국내 정유사들은 아시아시장의 벤치마크인 싱가포르 현물 시장 가격(MOPS)에 환율 등을 반영해 공급가를 산정합니다.
최근 미국·이란 전쟁 등 중동 정세 불안으로 싱가포르 현물 시장 가격이 급등하면서 국내 정유사가 주유소에 공급하는 가격도 함께 상승했습니다.
여기에 주유소들이 재고 확보나 수익 보전을 위해 판매가격을 선제적으로 올리면서 유가 상승폭이 확대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하면서 국내 유가가 급등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이재명 대통령은 전날 청와대에서 중동 상황과 관련해 비상경제점검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최근 과도하게 인상된 석유 제품에 대해 최고가격 제도를 신속하게 도입하고 과감하게 시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산업통상부는 현재 관련 고시 제정 절차에 착수했습니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번 주 내 시행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라며 "구체적인 내용은 준비를 마치는 대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전했습니다.
석유 최고가격 지정제가 시행되면 1997년 유가 자유화 조치 이후 정부가 시장 가격에 직접 개입하는 30년 만의 첫 사례가 됩니다.
정부는 아직 석유 최고가격제의 구체적인 시행 방식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정유사 공급가에 상한선을 설정하는 방식이 유력하게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정부 관계자는 "최근 몇주간의 싱가포르 현물 시장 가격 평균에 일정 마진을 더해서 정유사가 팔 수 있는 최고가를 정하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밝혔습니다.
국제 가격 변동이라는 객관적 지표를 반영하되 정유사가 과도하게 이윤을 챙기지 못하도록 규제함으로써 정유업계의 폭리를 차단하고 국내 공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격 인상 시도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주유소 판매가가 아닌 정유사 공급가를 겨냥한 데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전국 주유소는 직영, 자영, 알뜰주유소 등 운영 형태가 다양하고 지역별 임대료나 물류비 차이가 커 일괄적인 가격 통제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격 형성의 시작점인 정유사 공급가에 상한을 두어 유통망인 주유소의 원가 부담을 낮추고 소비자가격을 안정시키는 방식이 가장 실효성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정부는 아울러 최고가격제를 2주 단위로 조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기본적으로는 2주 주기로 설계하려고 한다"며 "첫 번째 최고가격은 지금 시중에서 소비자가 맞닥뜨리는 가격보다는 낮아질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김 실장은 "2주 간격으로 최고가격을 조정하면서 유류세 인하 등을 통해 가격 출렁임을 막는 완충 조치 등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부는 가격 통제 시 우려되는 '공급 부족' 사태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도 가동합니다.
정부는 '매점매석 고시'를 통해 정유사가 생산량의 일정 비율 이상을 반드시 국내 시장에 판매하도록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가격 상한제를 피해 물량을 쌓아두거나 수출로 돌리는 행위를 원천 차단해 수급 안정을 꾀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정부는 가격 변화가 예상될 때 기업이 미리 물건을 쌓아두거나 출하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매점매석 고시를 활용해왔습니다.
앞서 정부는 지난해 10월 유류세 인하 조치 일부 환원을 발표하면서 석유정제업자 등에 한 달간 유류 반출량을 제한하는 조처를 했습니다.
정당한 사유 없이 판매를 기피하거나 특정 업체에 과다 반출하는 행위도 금지됐습니다.
정부는 최고가격제 시행으로 인해 정유사가 입게 될 손실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보전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석유 최고가격 지정제의 법적 근거가 된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 제23조에는 가격을 통제받은 사업자의 손실을 국가가 보전해 줄 수 있다는 규정이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정유업계 손실 보전을 위해 필요한 재정 소요까지 이미 시뮬레이션 작업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유류세 추가 인하와 소비자 직접 지원 방안도 함께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유가 상승이 장기화할 경우 세제 조정과 직접 지원을 병행하는 방식의 종합 대책이 마련될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는 2021년 11월부터 유류세 한시적 인하 조치를 시행해 왔습니다.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가격 변동 폭이 커지자 정부는 같은 해 최대 37%까지 인하율을 확대했습니다.
이후 국제유가가 비교적 안정세로 접어들며 인하율을 단계적으로 환원하는 추세입니다.
지난해 11월부터는 휘발유는 7%, 경유와 액화석유가스(LPG) 부탄은 10%의 인하율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 기한은 오는 4월 말까지입니다.
정부는 국내 석유 비축 물량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진단했습니다.
김용범 실장은 국제에너지기구(IEA)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비축유는 208일분이지만 국내 석유화학 산업 비중을 고려할 때 실질 가용 물량은 약 4개월분으로 줄어든다고 분석했습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아랍에미리트(UAE)에서 확보한 600만 배럴 외에도 전략적 협력 관계에 있는 국가들을 통해 추가 물량 확보에 나섰습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석유 최고가격 지정제 시행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석유 최고가격제는 정유사가 팔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를 만들어 국내 물량을 해외로 돌리는 등 공급망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며 "손실 보전에 투입되는 세금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나 형평성 논란도 예상되는 만큼, 가격을 억지로 막기보다는 유류세 인하나 에너지 절약 유도 등 보다 현명하고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제언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