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9일 방송된 '붉은 첩자 : Made in 1969'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김성령, 황재열, 이주안이 출연했습니다. (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구치소 무연고자 무덤에 잠든 사람
여기는 깊은 산속.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곳에는 비석이 여러 개 세워져 있어. 여기는 바로 '재소자 공동묘지'야.
"이쪽으로 유골을 수습해서 합동 분묘를 만든 상태입니다. 대부분 서울구치소 쪽에서 온 분들입니다. 276구가 여기 묻혀 계십니다.
-홍기석, 묘지관리소 직원
서울구치소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공동묘지인데, 한 무덤에는 무려 276구의 유골이 묻혀있대. 연고가 없어서 합장된 이들의 무덤이거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저 무덤 안에 있어.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나타났다 하면 기자들이 바글바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 졌어. 이 사람을 보기 위해 무려 10만 명이 모인 적도 있었어. 심지어 이 사람의 이야기가 '고발'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그해 대종상에서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차지했어. 그런데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한 유명한 사람이, 구치소에서 연고도 없이 사망해 공동묘지에 묻혀있다는 거야.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지금부터 이 사람의 사라진 이름을 찾으러, 59년 전 과거로 시간을 돌려볼게. 이 이야기 끝엔 처음 공개되는 특별한 사연이 담겨 있어.
▲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일어난 일
때는 1967년 3월 22일 오전 8시. 서울 태평로에 있는 신문회관 앞이야. 버스 한대가 서더니 30명 정도 되는 기자들이 올라타. 그리고 입구에서 누군가 기자들 얼굴과 이름을 확인하고 출입증을 검문해. 그날 버스를 탔던 분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어.
"판문점 본회의가 있을 때 그걸 취재하는 기자를 '판문점 출입 기자'라고 하는데, 한 신문사에 한 사람씩 지정돼 있었어요. 맥아더 사령부에서 출입 기자 심사를 진행해서 신원 조회를 합니다. 당시 미8군 출입증이 있었어요. 그걸로 판문점을 출입합니다. 제가 신문기자 하면서 10여년 가까이 나갔습니다. 저 나름대로 터줏대감 역할을 하다시피 했죠."
-신경식, 당시 판문점 출입 기자
남과 북이 직접 마주치는 유일한 공간 판문점. 공식 명칭은 '군사정전위원회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이야. 그곳에서 열릴 회의를 취재하러 가는 길이야. 1967년 당시 판문점을 옮겨 왔어.
지금은 남북 모두 큰 건물들이 생겼지만 당시에는 북한 측에는 판문각이, 남한측에는 자유의집이 단촐하게 있고. 그 사이에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들이 있었어. 그리고 그 사이에 군사분계선이 존재했어. 절대 넘을 수 없는 남과 북의 경계선이야. 그런데 놀랍게도, 1967년 당시 이 판문점 안에서는 남북 관계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대. 59년 전 판문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이미지와 완전 다른 곳이었어.
"이 사진은 남한 기자들하고 북한 기자들이 같이 의자에 앉아서 잡담하고 있는 거예요. 모자 쓰고 있는 게 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나 외에는 다 북한 기자들이에요. 그때는 음식도 나눠 먹고 또 담배도 나눠 피우고, 자주 얘기도 나누고 그랬죠. 남북 기자들 간에는 우애가 돈독했었어요."
-신경식, 당시 판문점 출입 기자
신 기자가 버스를 타고 취재차 판문점에 갔던 3월 22일. 오전 10시에 판문점에 도착해 가장 먼저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로 향해. 아직 회의 시작 전이라 창문 너머로 두리번두리번 확인하고 있는데, 누가 옆에 쓱 나타나 어깨를 툭 치더래. 검은 안경에 바바리 코트를 입은 남자였어.
"그때 북한 기자들도 똑 같은 사람들이 계속 나왔어요. 그분이 나보다 한 스무살 위니까 제가 '오셨어요?' 말했습니다."
-신경식, 당시 판문점 출입 기자
북한 측 기자였어. 늘 진지한 표정에 깊이가 있어 보이는 사람이었어. 드디어 오전 11시 정각. 회의가 시작됐어. 회의장 내부에는 군사정전위원회 관계자만 들어갈 수 있어서 기자들은 밖에 있어야 했어. 창문에 귀를 쫑긋 세우고 듣고 있는 거야. 그런데 오늘 회의, 북한 측과 유엔 측의 신경전이 장난 아니야. 정전협정 위반을 주제로 끝없는 토론 중이라 결론이 안나. 그날따라 영 기삿거리도 없이 시간만 흘러. 결국 오후 4시가 지날 무렵, 남측 기자들은 철수하기로 했어. 신 기자도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어. 그렇게 신문사에 도착한 그때, 부장님이 뛰어 내려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너 뭐하는 거야! 현장에 있어야지! 지금 북한 기자 하나가 판문점에서 탈출했어! 지금 헬기 타고 용산 미군기지로 오는 중이라니까 너 빨리 가봐!"
부랴부랴 신 기자가 미군기지 헬리콥터장에 도착한 그 순간, 헬리콥터가 천천히 착륙하고 누군가 내리는데, 얼굴을 본 신 기자가 깜짝 놀라.
"낮에 판문점에서 같이 얘기했던 사람이 내리니까. 내가 붙잡고 반갑다고 얘기를 했더니, 내 손을 꽉 잡더라고. 캄캄한 밤에 혼자서 헬리콥터에 실려 왔을 때 얼마나 불안했겠어요. 다음날 신문에 사진이 크게 실렸죠."
-신경식, 당시 판문점 출입 기자
오늘 아침에 인사를 주고받은 그 북한 기자야. 북한에서 넘어와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은 그 사람은, 조선중앙통신사의 부사장, 43세 언론인 이수근 씨였어. 조선중앙통신사는 북한의 유일한 국영 통신 언론사로, 북한 뉴스를 독점하는 곳이야. 거기의 부사장이니, 북한 정책에 영향력 있는 최고위급 인물이야. 그런데 그런 인물이 탈북했다? 이건 특종이야.
근데 아무리 판문점에서 기자들의 왕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북한군 초소와 차단기, 철조망과 삼엄한 경비들을 뚫고, 어떻게 이수근은 안전지대인 유엔전진기지까지 도착했을까. '꼬꼬무'는 몇 달간 취재 끝에 미국으로 날아가서 59년 전 당시의 이야기를 들었어.
▲ 이수근의 판문점 탈출기
"테리는 군사경찰(MP) 하사였습니다. 유엔군에서 운전병으로 일했습니다. 저는 그의 동생입니다. 1967년 3월 22일 그날 모든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수근 씨가 차에 뛰어들어서 북에서 남한으로 가고 싶어 했을 때, 그들은 운전병 테리에게 최대한 빨리 출발하라고 말했고 테리는 전속력으로 도망쳤어요. 두 명의 북한군이 총을 쏘고 있었습니다."
-신디 맥아넬리, 故 테리 맥아넬리 하사 여동생
다시 시간을 돌려 3월 22일 오후 4시 30분. 한국 기자들이 판문점에서 철수한 뒤야. 회의장 내부에서는 여전히 열띤 회의가 한창이야. 북한 측 대표가 언성을 높이던 그때, 유엔군 병사 한 명이 회의장으로 들어와. 그리고 유엔 대표 앞에 은밀하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어. 그 쪽지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
"북한 기자 1명이 자유를 찾겠다고 요청 해 왔음."
이 쪽지 속 북한 기자가 바로 이수근 씨야. 유엔 군에게 탈출을 도와달라 요청한 거지. 회의가 끝나기 전에 수근 씨가 찍힌 당시 사진이 있어.
쪽지를 받은 유엔 측 대표는 조용히 답장을 썼어. "그 북한 기자를 남한으로 데려가라"라고. 대표의 지시를 받은 유엔군은 즉시 비밀 작전을 시작해.
"본회의장 앞으로 차량 대기. 시동 걸고 뒷문은 열어둔다. 그리고 북한 기자가 올라타면 우리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곧 고급 세단 3대가 회의장 앞으로 접근해. 그런데 갑자기 북한 측에서 경비를 강화해.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걸까? 만약에 발각돼 총격전이 벌어지면,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상황이야. 오후 5시 20분, 양측의 마지막 발언이 끝나고, 유엔측 대표는 아무일도 없다는 듯 회의장을 나와. 그리고 3대의 차 중 맨 앞 차에 올라타. 그렇게 첫번째 차량이 출발하고, 두번째 차량 뒷좌석에 또 다른 유엔측 사람이 올라 타려는데, 열려있는 뒷문으로 수근 씨가 황급히 뛰어들어. 그 순간, 북한 군사경찰인 경무원 두 명이 총을 뽑으며 달려와. 일촉즉발의 상황이야. 바로 그때 보조석에 탔던 유엔군 중령이 운전병에게 외쳐.
"Move! Move! Move! Rush!!!!(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달려!!!)"
운전병 테리는 즉시 출발했어. 그 순간, 북한 경무원들이 권총을 쏘기 시작해. 테리는 힘껏 엑셀을 밟았어. 그렇게 회의장에서 300m쯤 도망쳤을까. 이번엔 북한군 초소가 보여. 막 연락을 받은 북한 초소병이 차단기를 내리고 있어. 현재 차량 속도는 시속 120km 정도야. 이대로 가면 무조건 차단기와 충돌해. 이대로 붙잡히면, 뒷자리에 탄 수근 씨의 목숨은 보장 못 해. 테리는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졌어. 보조석에 있는 중령은 "계속 달려!"라고 소리쳤어. 테리는 그대로 차단기를 향해 돌진했어. 차량 앞 유리가 다 깨지고, 보조석에 있던 중령은 파편에 피를 흘렸어. 몸을 숙여 피했던 테리는 눈을 다쳤어. 다행인 건, 얼마 안가 유엔군 기지가 보여. 그렇게 이수근 씨가 탄 차가 무사히 안전지대에 도착했어.
"아버지가 신문을 봤는데, 1면에 테리의 사진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그걸 집어 들고는 '이거 내 아들인데?'라고 말하고 주변을 둘러봤어요. 신문 1면에 나올 만한 일을 했을지 몰랐거든요."
-신디 맥아넬리, 운전병 테리 여동생
용감한 운전병 테리는 인헌무공훈장을 수여받고 하사로 진급했어. 회의장에서 유엔군 전진기지까지 거리는 약 1km 정도였는데, 이동시간은 약 30초가 걸렸대. 최대 시속 120km 달려야 가능한 일이래. 단 2, 3초만 늦어도 차단기에 걸려서 무사하지 못했을 거래.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달린 거야. 그날 북한군이 쏜 총알의 개수만 40여발이었다고 해. 총알을 피한 사상 초유의 질주였어.
그럼 왜, 수근 씨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을 탈출한 걸까.
"운전병 테리는 이수근에 대한 정보는 알지 못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수근 씨가 북에서 에서 남쪽으로 와서 더 나은 삶을 원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어요."
-신디 맥아넬리, 운전병 테리 여동생
테리 하사는 가족들에게 수근 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대. "더 나은 삶을 원했다"라고.
"나는 나 자신의 결심으로 자유를 찾았다. 나는 지식인들을 야만적으로 취급하며 사람들의 오금을 못 펴게 들볶는 북조선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나는 이제부터 자유 세계에서 나의 여생을 보람 있게 보내겠다."
-이수근이 탈출 다음날 작성한 글 中
자유를 찾아온 이수근. 한국전쟁 휴전 선언 후 14년이 안 된 시점에, 김일성의 수행기자 출신인 거물급 언론인이 북한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며 남으로 온 거야. 목숨을 걸고 넘어 온 수근 씨를, 시민들은 '자유의 용사'라며 대환영했어. 그를 보려고 10만 인파가 모이기도 했어.
이렇게 환대를 받으며 남쪽 사람들 앞에 선 이수근 씨는 첫번째 기자회견에서 북에 있는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해달라 눈물로 호소했어.
"저는 지난 3월 22일 북한을 탈출, 자유세계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나 북한 땅에 아내와 철부지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내 가족이 아버지의 품에 돌아올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이수근, 기자회견에서
그럼 수근 씨가 북에 가족을 남겨 두면서까지 목숨 걸고 남으로 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1946년 조선노동당에 입당하였으며 이날부터 20년간 나는 하루 한 날 같이 조선노동당과 김일성을 위해 나의 모든 정력, 나의 모든 성의를 바쳐 그야말로 눈물겹도록 충성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나 잔인무도한 공산주의자들은 단 한 줄의 김일성 찬양 기사를 싣지 않았다는 죄로 사상적인 면에서 의심받기 시작했으며, 끝내는 조만간에 숙청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수근, 환영대회 연설 中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수근 씨는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 되기까지 20년 넘게 불철주야 김일성 찬양기사를 썼대. 그런데 갑자기 충성심을 의심 받으면서 숙청될 상황까지 몰리니까, 탈출을 결심한 거야. 수근 씨의 구체적인 탈북 동기를 알게 된 시민들은 "북으로부터 이수근의 처자식을 데리고 오자!"라며 전국적인 서명운동을 벌였어. 영화인 협회, 대한어머니회 같은 단체뿐만 아니라 종교계, 대학생들도 적극 참여했어. 그렇게 두 달 만에 130만 명이나 서명했어. 서울시 인구가 400만 명 정도 됐던 1967년에 어마어마한 인원이야. 그럼 수근 씨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을까?
▲ 자유의 탈을 쓴 붉은 첩자
수근 씨가 탈북에 성공하고 1년 후인 1968년. 신문사마다 하루 수 십차례 씩 수근 씨의 생사를 확인하는 괴전화가 걸려와. 게다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묘한 소문이 돌아. "이수근이 죽었다", "이수근이 북한으로 교신을 보낸다"며 간첩이라는 소문이 도는 거야.
"남한에 와서 처음에는 대우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의심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참 소문이 났습니다. '이수근이 위장 간첩이다' 라고. 시민들은 모두 이럴 수가 있느냐고 놀랐습니다."
-신경식, 당시 판문점 출입 기자
수근 씨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던 그때, 그가 정말로 감쪽같이 사라졌어. 집은 텅 비어있고, 아무도 수근 씨의 행방을 몰라. 1967년 3월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에 나타났던 이수근. 1969년 2월 1일, 사라졌던 그가 이번엔 공군기를 타고 나타났어.
"여권을 위조해서 북으로 뺑소니치려던 반역자는 잡히고 말았습니다. 자유의 땅 조국대한을 그리워하는 북한 동포의 한 사람인 줄 알고 설마 하던 국민의 눈을 속인 이수근은 간첩이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中
이수근은 위장 귀순한 이중간첩이었어. 여권까지 위조해서 다시 북으로 돌아가려 한 거야. 당시 언론 보도에 의하면 탈북 전에 김일성에게 이런 지령을 받았다고 해.
"조국을 위하며 부하된 사명을 다하라. 첫째, 판문점에서 극적인 탈출 방법으로 침투하라. 둘째, 귀순 동기를 '김일성을 소홀히 다뤄 숙청 대상이 되어 탈출하였다'고 진술하라. 셋째, 한국 정부에 협조, 신임을 획득, 신분을 쟁취하라."
판문점 탈출도 자작극이고, 가족과 살고 싶다며 눈물로 호소한 것도 모두 거짓이라는 거야. 시민들은 이수근을 '자유의 용사'라 칭송하며 서명운동에 동참했잖아. 배신감을 넘어 이런 이야기까지 나와.
"악마의 탈을 쓴 민족 반역자인 줄 모르고 그를 환영했던 선량한 국민 모두가 격분했습니다."
"그놈이 그럴 수가 있어요? 글쎄. 그 멀쩡한 놈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저 광화문 대로에다 내놓고 총살시켜도 마땅합니다."
이수근을 극형에 처하라고 격분한 시민들. 이렇게 분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어. 바로 직전 해인 1968년, 북한에 대한 분노가 극에 치닫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했거든.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려는가 하면, 그해 10월엔 120명의 무장공비가 동해로 침투해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어린이 등 민간인을 포함한 20명이 사망했어. 이처럼 북에 대한 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 유명한 이수근이 이중간첩이라니. 각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수근 씨의 초상화를 태우는 화형식이 열렸어.
근데 판문점 탈출할 때, 진짜 총을 쏘고, 차단기를 들이 받고. 정말 죽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자작극을 벌였을까? 이수근의 진짜 정체는 뭘까? 정말 죽음을 각오하고 북한을 탈출한 자유의 용사일까, 아니면 온 국민을 기만한 자유의 탈을 쓴 붉은 첩자일까.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볼게.
▲ 이수근은 간첩이다?
이수근 씨가 변장하고 찍은 위조 여권 사진이야. 가짜 머리에 가짜 수염, 안경도 바꿨어. 그렇게 1969년 1월 27일 오후 5시, 이수근은 북으로 복귀하기 위해 그를 돕는 누군가와 비행기에 올라탔다고 해. 그를 돕는 사람, 누굴까? 아까 공군기에서 체포된 이수근이 걸어 내려올 때, 그의 뒤에서 같이 붙잡혀 온 사람이야. 바로 이수근 씨가 북한에 두고 온 아내의 조카, 31세의 배경옥 씨야.
당시 배 씨는 베트남에서 일하다 한국에 잠깐 들어왔어. 그때 이모부인 이 씨의 요청으로 위조 여권을 만들어 준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김포공항에서 홍콩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라타. 이때 대한민국의 정보기관, 중앙정보부가 이중간첩 이수근을 추적하기 시작했어. 당시 중앙정보부를 책임지던 사람은,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야.
당시 김형욱 중정부장에게는 '남산의 멧돼지'라는 별명이 있었어. 중앙정보부가 남산에 있는데, 김형욱은 후진이 없고 직진만 한다는 의미야. 이수근이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떠난 그때, 김 부장은 저녁을 먹고 있었어. 그러다 "이수근이 행방불명 됐습니다"라는 부하 요원의 전화를 받았어. 이미 그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던 중정에서 비밀리에 이 씨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놓친 거야. 이건 '남산 멧돼지' 김형욱 부장에겐 허용이 안 되는 일이야. 중앙정보부 전 조직원이 이수근을 찾는데 투입돼. 해외에 있던 요원들에게까지 명령이 내려져.
한편 홍콩행 비행기를 탔던 이수근, 배경옥 씨는, 홍콩 경찰에 붙잡힌 상태였어. 1월 29일, 체포된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 있어.
격렬하게 저항한 탓에 안경이 날아가고, 이수근의 팔이 탈골될 정도였대. 그렇게 홍콩 경찰서에 연행된 이수근 씨는 "난 간첩이 아니다. 정치적 망명객이다"라고 호소했어. 이 말이 홍콩 경찰에게 통했고, 두 사람은 풀려났어. 이후 두 사람은 홍콩에서 베트남행 비행기에 탑승했어. 김형욱 부장은 이수근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어. 그리고 다급하게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베트남에 근무하고 있던 이대용 공사에게 연락했어. 그리고 이수근이 베트남을 떠나기 전에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냐고 물었어.
김 부장에게 전화가 온 시점에, 이수근이 탄 비행기는 출발하기 직전이었어. 그때 이대용 공사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당시 베트남 대통령 응우옌반티에우에게 비행기 이륙을 막아달라 한 거야.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륙하려는 순간, 관제탑에서 정지 명령이 내려왔어. 그리고 이대용 공사는 승객들 사이에서 가발과 콧수염으로 변장한 이 씨를 찾았어. 그렇게 4일간 이어진 추격전이 끝나고, 이수근과 배경옥 씨는 검거됐어.
이수근이 탈북한 지 2년째 되던 1969년 3월 22일. 이수근 씨와 처조카 배경옥 씨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돼. 두 사람에 대한 첫 공판에는, 배신자의 얼굴을 보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700명이 넘었대. 도피 중에는 체포되자 강하게 저항했던 이수근 씨. 그런데 법정에서는 달랐어.
"거국적으로 저를 환영해 준 남한에서 본인의 여생을 보내고 편안하게 지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후회합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마디 말하고 싶은 것은 사회에 나가서 국가에 협조할 수 있는 가능한 길을 열어주시기만 한다면, 보다 본격적으로 보다 열성적으로 반공 전선에서 또 국가를 위해서 일하려 하는 각오는 돼 있습니다."
-이수근의 법정 진술 中
이수근은 당시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고 말했어. 하지만 1969년 5월 10일.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두 달도 지나지 않은 그해 7월 3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돼. 사형 선고 후 54일 만에 이뤄진 거야. 이수근 씨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 준 처조카 배경옥 씨. 그는 1심에서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그해 10월 항소심에서 감형돼서 무기징역을 최종 선고 받았어. 이렇게 이수근의 정체는 진짜 간첩으로 결론 났어.
여기까지가 당시 알려진 결말이야. 그런데, 간첩으로 사형까지 당한 이수근이, 만약에 간첩이 아니었다면? 지금부터는 같은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볼 거야.
▲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다?
이수근의 사형 집행 후 17년이 지난 1986년. 여의도의 한 사무실이야. 이대용 공사가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어. 이대용 공사는, 김형욱 중정부장의 연락을 받고 베트남에서 수근 씨가 탄 비행기를 멈춰 세운 그 사람이야. 당시 이대용 공사와 대화를 나눈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야.
"1971년부터 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55년째 하고 있습니다. 이수근이라고 하면 우리 세대에서는 영화배우 이름처럼 유명한 사람입니다. 이수근이 탈출했을 때, 북한 최고위직이 탈출을 했다 해서, 반공 선전에 많이 등장했던 사람인데. 우연한 기회에 취재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취재 중 가장 중요했던 분은 이대용 공사였고, 이분은 아주 유명한 군인입니다. 6.25 났을 때 춘천에서 북한군을 3일 동안 막아냈습니다. 군인으로서 정말 존경할 만한 분이고, 항상 반공 노선을 유지하면서 싸웠던 사람입니다. 이분을 제가 인터뷰하러 갔습니다."
-조갑제 신문기자
당시 이대용 공사를 취재한 조 기자는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기사를 써.
<조갑제의 심층 취재>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이수근이 간첩이 아님을 최초 보도한 기사야. 조 기자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1986년 1월로 기억합니다. 이대용 공사가 저에게 이렇게 질문을 하나 던졌어요. '조 기자는 이수근이 간첩이라고 생각합니까?'. '이수근이 간첩으로 몰려서 이중간첩으로 사형 집행됐는데 간첩 아닙니까?'라고 말했더니, '간첩이 아니에요'. 그래서 제가 취재에 들어가게 되었죠. 그다음 이대용 공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뒤에 만났던 중요한 분이 바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밑에서 국장을 한 사람입니다. 귀순한 이수근을 맡아서 거의 1년 동안 곁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이니까 이수근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어요. 이 분이 말하는 이수근은 '진짜로 귀순한 게 맞다'. 간첩이 아니었다는 말이 더 신뢰가 갔다는 이야기죠."
-조갑제 신문기자
과거 중앙정보부 소속이었던 2명의 내부 증언자가 나타난 거야.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하나. 이수근 씨가 이중간첩이 아니라면, 변장하고 위조 여권까지 만들어 목숨 걸고 탈출한 진짜 이유가 뭘까.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걸 알려면, 탈북 직후의 수근 씨 삶을 살펴봐야 해.
1967년 3월, 자유의 용사로 불리던 수근 씨. 북쪽에서 언론인이었던 그에게, 남쪽에서 새로운 직업이 생겨. 바로 '반공 강연' 1타 강사야.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강연에 수근 씨만한 인물이 없어. 그러니 수많은 반공 강연과 행사에서 맹활약 중이야. 그런데 반공 강연 때마다 그가 하는 고민이 있어. 강연에서 김일성을 욕하고 북한 체제를 강하게 비판해야 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아. 북한에 남겨진 가족의 안위 때문이야. 하지만 반대로, 반공 강연을 주최하는 남측 입장에선, 북한을 비난하는 수위가 크면 클수록 행사 열기가 더 뜨거워져.
수근 씨가 대중 앞에 나서는 반공 행사에는,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도 참석했다고 해. 북한에 대한 수근 씨의 태도가 불확실할 수록 정부기관 내에서는 의심하는 시선이 생겨났어. 그리고 중앙정보부 감찰실에서 수근 씨를 감시하기 시작해.
"이수근의 집 맞은편 2층 건물에 전세를 얻어 수사관을 상주하게 하였다. 전화국 직원으로 가장한 수사관이 이수근의 집 안으로 들어가 전화기 속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놓았다. 이수근의 승용차 안에는 특수 소형 마이크를 설치했다."
-당시 중정 요원의 글 中
중정은 이수근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도청하고 미행했어. 게다가 중정 감찰실 요원은 수근 씨를 수시로 불러서 북측과 내통하는 거 아니냐며 때리고 총을 쏘며 위협까지 했어. 그렇게 감시와 폭행에 시달리던 수근 씨는 북도 남도 아닌, 제3국으로 탈출을 결심했어. 사실, 홍콩과 베트남을 경유하며 간 수근 씨와 경옥 씨의 최종 목적지는, 북한이 아닌 중립국이었어. 두 사람은 중립국에 가서, 북한에 있던 가족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수근 씨는 베트남에서 체포된 직후에, 이대용 공사에게 이런 말을 했대.
"북쪽이 싫어 내려왔는데, 남쪽에도 자유가 없더군요."
처음에 수근 씨가 남한에 온 이유는 '자유'를 찾아서야. 하지만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자유는 남북, 어디에도 없었어. 전문가와 조 기자는 수근 씨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중립국으로 떠날 결심을 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
"이수근 씨는 북한에서 자신의 지위와 가족들을 다 포기하고 내려온 거잖아요. 평생을 충성해 온 북한 체제에서 (신념이) 무너져서 남한으로 온 건 정말 트라우마였을 거고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두번째 세상인 남한에서도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황은 트라우마의 재경험을 한 거거든요. 진짜 자유를 찾고 싶다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을 거고요. 세번째 새로운 나라로 떠나는 건, 이런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서 굉장히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심리이기도 해요."
-김지용, 정신의학과 전문의
"이수근이 왜 이런 삶의 역경을 겪게 되었느냐 하면, 그 사람이 지식인이라는 게 중요해요. 지식인. 지식인은 권력에 무조건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지식인의 운명이라고 보여집니다."
-조갑제 신문기자
"북한 사람들이 지식인들에 대한 박해, 지식인들에 대한 모욕과 천대가 참을 수 없는 그러한 충격을 자아냅니다."
-이수근의 탈북 직후 기자회견 中
수근 씨는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직후 항소 의사를 밝혔지만, 만료 기일을 넘겨 사형이 확정돼. 항소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사형 선고인데 항소를 안했다? 이상하지 않아?
"교도관이 관찰한 당시 이수근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그 이유기 또한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었다는 저의 판단을 강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교도소까지 중앙정보부 직원이 따라와서 그 앞을 지켰다는 거 아닙니까. 그때의 중앙정보부가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때의 중앙정보부는 대통령 다음으로 권력이 세요. 그러니까 왜 이수근이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항소를 포기했느냐. 비밀이 바로 그런데 있는 거죠."
-조갑제 신문기자
조갑제 기자가 만난 당시 교도관의 말에 의하면, 항소를 안한 게 아니라, 못 하게 막은 거야. 그럼 왜 중앙정보부는 이렇게까지 한 걸까. 수근 씨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을 취재한 조 기자는 당시 중앙정보부와 김형욱 부장이 처한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을 거라 설명해.
"중앙정보부에서 요원을 붙여 감시하고 있던 이수근이 출국한 것을 뒤늦게 알고 어디로 갔는지를 알아내는 데는 이틀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보기관으로서 치명적 실수죠. 정보기관은 잘한 것도 알릴 수가 없고 잘못한 것도 알릴 수가 없는데, 이 경우에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했다는 사실이 폭로되게 생겼거든요. 김형욱이 정보부장인데 완전히 위기에 몰렸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살기 위해서, 김형욱이 살기 위해서, 이수근을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만들었다고 봐야죠."
-조갑제 신문기자
중앙정보부 감찰실은 감시자를 놓친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 김형욱 부장은 자신의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수근 씨를 간첩으로 만들어야 했어. 수근 씨가 간첩으로 죽어야지만, 중앙정보부가 사는 거야.
▲ 사형 집행 후 37년…간첩 조작 의혹 조사
자, 이제 수근 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진실을 밝혀내야 해. 그 첫 걸음은, 수근 씨의 사형이 집행된 지 무려 37년 만에 내딛었어. 국가 기관에서 '간첩 조작 의혹 사건' 조사 대상에 선정된 거야. 그런데 수근 씨 가족은 북한에 있잖아? 본인은 사형 당해서 세상에 없고. 그럼 누가 이걸 신청해서 선정된 걸까?
"이중간첩 혹은 위장 귀순, 이 이야기는 몇 건 없거든요. 우리나라 역사상. 그게 사실이냐,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 실제로 저하고 만났던, 배경옥이라는 수근 씨와 인척뻘 되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 분이 신청했어요."
-이명춘, 2006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국장
수근 씨와 동반 출국 후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처조카 배경옥 씨. 복역 중에 감형 받아서 수감 당시 31세였던 경옥 씨는 1989년 12월, 51세의 나이로 출소했어. 억울하게 20년 간 수감됐던 경옥 씨. 수근 씨가 간첩으로 만들어졌던 것처럼, 경옥 씨도 중앙정보부에게 강제로 고문을 당했다고 해. 출소 후 1999년 경옥 씨의 증언이야.
"조사관들 얘기가 중앙정보부가 최고 우위다. 그렇게까지 얘기를 했고, 또 수사 과정을 보면 알잖아요. (진술서를) 불러주는 대로 받아 썼으니까요. 그게 무슨 조사예요. 오랫동안 고초를 받아서, 다른 거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거죠. 조사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진실이든 아니든 빨리 끝나서, 빨리 일이 처리돼서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행복하다, 이렇게 생각했으니까요. 그 후에 몸이 계속 아파서 뼈가 다 안 좋아진 건가 봐요."
-배경옥, 1999년 인터뷰 中
수근 씨와 경옥 씨는 비행기에서 체포돼 돌아온 순간, 남산의 중정에 끌려가. 중정은 두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이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그곳에서 전기, 물, 몽둥이로 끔찍한 고문을 당했대. 1기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 김일성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도, 북한에 가기 위해 탈출했다는 것도, 모두 조작이었어. 이제 바로 잡으려면 '재심'을 해야 해.
요즘은 '재심'이란 게 좀 익숙하지만, 2000년대까지만 해도, 신청조차 어려운 일이었어. 게다가 경옥 씨의 재심을 맡았던 재판장은 심적으로 더 부담감이 컸대.
"억울한 사람이 사형당하고 또 억울한 사람이 20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나중에 드러난 바에 의하면 중앙정보부가 잘못을 회피하려고 뒤집어 씌운 거였잖아요. 그러면 이게 당시 우리나라 수사기관과 재판기관의 결정을 부정해야 하고요. 과거 선배들의 또 사법부의 잘못을 더 나아가서는 국가 권력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건의 무게감은 엄중한 것이죠."
-박형남, 재심 당시 재판장 판사
재심을 담당한 재판장은 경옥 씨에게 이 한마디를 꼭 전하고 싶었대.
"피고인 배경옥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 325조 후단에 의하여 피고인 배경옥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마지막으로 피고인에게 격려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피고인은 법정 밖으로 세상 속으로 나가도 좋습니다."
-박형남, 재심 당시 재판장 판사
박형남 재판장의 마지막 한마디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어. 법의 사슬에서 풀려나 밝은 태양 아래 당당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길. 그렇게 2008년 12월 19일, 경옥 씨에게 무죄가 선고됐어.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이모부 수근 씨는 기록상 간첩으로 남아있거든.
"어떻게든 돌아가신 분에 대한 명예를 내가 회복시켜야 한다, 이런 각오를 갖게 되고 삶의 의지를 갖게 되는 거죠. 저는 이제 이모부의 명예를 회복하고 이모부님의 이름을 영원히 남겨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
-배경옥, 무죄 판결 후 인터뷰
그렇게 또 10년의 세월이 흘러 2018년. 이수근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 결과가 나와.
"피고인 이수근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아울러 피고인은 위법 부당한 공권력의 행사로 위장 귀순한 간첩으로 낙인찍힌 채 사형 집행에 의하여 생명을 박탈당하기에 이르렀는 바, 이에 암울했던 권위주의 시대에 국가가 범한 과오에 대하여 피고인과 그 유가족들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구한다."
-판결문 중
드디어 대한민국 법원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다'라고 공식적으로 판단했어. 무려 49년 만에 원점으로 돌아왔어. 경옥 씨는 이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이 곳을 찾았어.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며 찾았던 무덤. 이 곳에는 연고가 없는 시신들이 함께 합장돼 있어. 그래서 유해를 분리할 수도, 개인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놓을 수도 없다고 해.
▲ 피해자 배경옥을 찾아서
그럼 현재 경옥 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꼬꼬무' 제작진은 그와 인연을 이어온 조갑제 기자를 통해 경옥 씨에게 연락을 취해봤어. 2025년 11월, 조 기자가 오랜만에 경옥 씨에게 전화를 걸어봤어. 하지만 상대방은 전화를 받지 않았어. 메시지를 남겼지만, 역시 답이 없었어.
경옥 씨에 대해 아는 정보는, 받지 않는 전화번호와 예전에 살던 동네 정도야. '꼬꼬무' 제작진은 그를 찾아 나섰어. 경옥 씨의 행적을 찾아 동네 주민들에게 물었어. 그렇게 몇 주째 탐문이 이어졌고, 드디어 경옥 씨를 아는 주민을 만났어. 하지만 경옥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고 해.
"(배경옥 형님께서) 집에서 주무시다가 심정지로 돌아가셨습니다… 형님 생각하면 진짜 가슴이 메는 거죠. 평생을 순탄하게 못 살고 돌아가셨으니까. 그게 마음이 아픈 거예요. 순탄하게 산 인생이 아니니까. 참 힘들게 살았으니까. (형님이 그곳에서는) 그런 일 겪지 않고, 좋은 일만 있었으면 그런 마음이죠."
-배경수, 경옥 씨와 꼭 닮은 동생
안타깝게도 경옥 씨는 이모부 수근 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재심 판결이 나오고 1년 만인 지난 2019년 세상을 떠났어. '꼬꼬무'도 이번에 취재를 하며 처음 알게 된 사실이야. 조갑제 기자는 경옥 씨를 떠올릴 때마다, 그가 짊어지고 다니던 배낭이 눈에 걸렸대. 각종 민원 서류와 재심 자료로 무거워 보였거든.
그리고 또 하나, 안타깝게도 '꼬꼬무'가 이번 방송을 준비하며 만난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믿는 사람이 많았어. 지금은 묘비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수근'이라는 이름을, 진정한 자유를 꿈꿨던 한 인간으로 기억해주는 것이, 어쩌면 그가 진짜 원했던 게 아닐까.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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