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6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특별전 기자간담회 당시 배우 김지미(오른쪽), 김씨가 전성기였던 1975년 대종상 시상식 당시 여우주연상을 탔을 때 모습(왼쪽)
85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지미(본명 김명자)는 1960∼1970년대 한국을 대표하는 미녀 배우로 긴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당시 보수적이던 사회상과는 반대로 자유로운 연애와 결혼을 이어가며 주체적 삶을 살았던 '신여성'이기도 했습니다.
김기영 감독이 길거리 캐스팅으로 발굴한 김지미는 '토지'(1974), '육체의 약속'(1975), '길소뜸'(1985) 등 60년간 공식 기록으로만 37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출연작이 하도 많아 정확한 숫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입니다.
김지미는 2017년 기자회견에서 "아마 700편 이상에 출연했을 것"이라며 "700가지의 인생을 살았던 만큼, 역할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했습니다.
김지미는 윤정희, 문희, 남정임이 우리나라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를 형성하기 전부터 활동했지만, 선후배 배우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1980년대까지 꾸준히 활약했습니다.
특히 1960년대에는 1년에 많게는 34편의 영화를 촬영해야 해 하루에도 몇 편씩 '겹치기 촬영'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김지미가 비교적 오랜 시간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뛰어난 외모도 한 몫했습니다.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이미지와는 달리 입체적인 얼굴을 자랑했던 그는 당대 최고의 미녀로 꼽혔습니다.
아름다운 신인 여성 배우가 등장하면 영화계나 대중은 "그래도 김지미만 못하다"는 말을 할 만큼 김지미는 미를 판가름하는 척도였습니다.
트로이카의 세 배우가 젊고 풋풋한 매력을 내세웠다면, 김지미는 노련한 여성미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영화계 '팜므파탈'의 원조인 셈입니다.
그는 영화에 큰 관심이 없던 때 얼떨결에 배우가 됐지만, 연기력 또한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김지미와 13편의 영화에서 호흡한 김수용 감독은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토록 자연스러운 연기를 했던 걸 보면 연기는 그의 큰 특기였던 듯하다"며 "'진짜 배우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올 정도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영화계의 유명한 여장부로 통했던 김지미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았던 '자유로운 영혼'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8세였던 1958년 홍성기 감독과 결혼했다가 4년 만에 이혼했습니다.
당대 인기 배우 최무룡, 1970년대 가요계 아이콘인 가수 나훈아 등과의 떠들썩한 결혼과 이혼은 세간의 화제가 됐습니다.
특히 나훈아와의 결혼 발표는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사실혼 관계였던 나훈아와 1982년 헤어진 김지미는 1991년 심장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으나 2002년 다시 이혼했습니다.
이로 인해 한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인 그에게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칭이 붙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