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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취재파일] "우리는 당신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취재파일] "우리는 당신들을 잊지 않았습니다"
북한 억류자 송환의 '첫 번째 조건'
▲ 정욱 선교사가 지난 2008년 중국 단둥 선교 활동에 사용하기 위한 물품에 손을 얹고 사진을 찍고 있다.
 
"낮에는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와 허리가 끊어질 듯한 중노동이 내 육체를 망가뜨렸다. (…) 북한 검사는 똑같은 말을 하고 돌아갔다. 그는 '당신 가족들은 이미 당신을 잊었어. 당신네 정부도 당신을 잊었고. 이제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라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 선교사의 회고록 내용입니다. 그는 45살이던 2012년 북한을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고, 극심한 중노동을 견뎌야 했습니다. 두 달 만에 몸무게가 20kg가량 빠지고 지병이 악화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북한 당국은 매번 그를 노동교화소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는 신체적 고통만큼이나 "세상은 당신을 잊었다"는 말이 자신을 무너뜨린 가장 잔인한 심리적 고문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검사의 말과 달리 미국 정부와 시민들은 그를 잊지 않았고, 석방을 위한 캠페인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결국 2014년 가을, 735일 만에 케네스 배 선교사는 자유를 되찾았습니다.
통일부가 북한에 억류된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선교사 등 국민 6명의 송환을 촉구하기 위해 이제석 광고연구소와 공동 제작한 영상의 캡처 화면

그러나 케네스 배 선교사가 석방되던 무렵 같은 북한 땅에는, 훨씬 더 긴 시간을 견디고 있음에도 지금까지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들이 있었습니다. 케네스 배 선교사가 억류 기간 중 가족과 통화하고 어머니를 직접 만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한국인 억류자 6명은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억류자 가족들은 이들의 송환 요청은 물론이고, 최소한 생사 확인이라도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지만, 북한은 일절 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진작 영사 접견권을 인정했다면 억류자들의 생사와 구금 장소를 모를 수가 없는데, 애당초 국제인권법을 무시한 반인도적 결정을 한 데 이어 자신들이 당사국인 여러 규약, 협약도 무시하는 처사를 10년 넘게 이어오는 것입니다.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 6명

역류자 CG

현재까지 정부가 공식 확인한 북한에 억류된 한국인은 김정욱, 김국기, 최춘길 선교사 등 6명입니다. (※ 각주: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한 한국인은 전시·전후 납북자, 국군포로, 억류자 등으로 분류됩니다. 이 글은 김정은 집권 이후 억류된, 그리고 정부가 확인한 억류자 6명을 다룹니다.)

김정욱 선교사는 2013년 10월 체포된 이후 4,400일이 넘는 시간을 억류된 상태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 단둥을 기반으로 탈북민을 지원하던 중 붙잡혀, 이듬해 국가전복음모죄 등 중형을 적용받아 무기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김국기·최춘길 선교사도 각각 2014년 10월과 12월 체포돼 2015년 무기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세 사람의 억류 기간은 케네스 배 선교사의 735일과 비교해 약 5배에 이릅니다.
또한 북한이탈주민 3명도 2016년부터 억류돼 있습니다. 탈북자를 '변절자'로 여기는 북한의 특성을 감안하면 이들의 처우는 선교사들보다도 더 열악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 환갑이 넘었는데"…12년 넘게 매일 기도하는 형의 절실함

2014년 2월 27일 평양에서 기자회견하는 김정욱 선교사의 모습

김정욱 선교사의 형 김정삼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동생이 이미 북한에서 환갑을 넘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난 12년 동안 매일 새벽 3시 30분에 일어나 동생의 석방을 위해 기도해 왔다고 했습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을 들으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도 털어놓았습니다.
"(대통령의 '처음 듣는다'는 발언은) 제가 듣지 말아야 될 말을 들은 거죠. 국민을 사랑해야 하는 정부에서, 그 사랑함이 이번을 계기로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는 대통령실이 뒤늦게라도 공식 입장을 내고 대응 의지를 밝힌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대응을 하겠다는 표시를 한 것 같습니다. 어제 안보실에서 연락이 와서 '대통령이 원래 잘 알고 있었는데, 최신 억류 상황이 새로 생긴 줄 알고 그렇게 얘기한 것 같다'고 해명하더군요. 저는 이번 계기로 더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말했습니다."

억류된 국민의 송환을 위해 지금 가장 필요한 것

김정삼 씨는 정부가 "가장 먼저 생사 확인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다음 곧바로 송환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실무자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가능하다면 연내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종교계·시민단체가 지난 수년간 준비해온 석방 노력에 대해 언급하며, "그 노력들에 정부가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과거 남북 정상회담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억류자 문제를 강하게 요구했다고 밝힌 데 대해서 김 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부분은 조금 이해합니다. 그러나 가족에게는 '기다려라'는 말밖에 없었어요."

이어 그는 일본·미국·캐나다와 비교하며 아쉬움을 드러냈습니다.
"일본 총리는 늘 납북자 배지를 달고 나오잖아요. 미국과 캐나다는 실제로 데리고 오고, 모시고 오고 하잖아요. 부럽죠. 우리나라는 아직도 어렵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동생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곳은 얼마나 더 힘들겠어요. 그래도 여기까지 잘 참아줘서 고맙죠. 석방·송환이 되는 날까지 믿음 잃지 말고 돌아왔으면 합니다. 따뜻한 밥 먹으며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억류된 국민의 송환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


북한은 그동안 미국이나 캐나다 등 다른 국가들과 달리 유독 한국에는 억류자 문제에 있어 협상의 여지를 주지 않아 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갈 수 있을까요?

일단 통일부는 지난 4일 "억류자 문제 해결의 시급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북한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공개된 기록으로 보자면, 우리 정부가 북한과 억류자 문제를 교섭한 것은 2018년 4월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그에 이어진 6월 고위급회담이 마지막입니다. 통일부에 따르면 당시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억류자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리선권 북측 대표단장이 "현재 국내 전문기관들에서 철저히 검토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지금까지 실질적인 진전은 없는 상태입니다. ​

국내 여러 전문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들을 모색해 왔습니다. 그중에 종종 거론되어왔던 아이디어 하나는 바로 '한국판 프라이카우프'입니다. 반인권적 상황에 놓인 정치범에게 자유를 되찾아주기 위해서 불가피한 조치로 추진됐던 독일의 '정치범 자유 거래(Freikauf politischer Häftlinge 혹은 Häftlingsfreikauf)'를 한국형으로 적용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제언입니다. 서독은 프라이카우프를 통해 지난 1963년부터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직후까지 동독에 대가를 지불하고 동독 정치범 3만 1천755명을 석방해 서독으로 데려온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논쟁의 여지가 큰 만큼, 정치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방법 외에도 지속적으로 거론되는 방안에는 미국처럼 스웨덴 등 제3국, 이른바 '이익보호국'의 도움을 받아 영사 접견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제언도 있습니다. 또, 북한으로 가길 원하는 비전향 장기수 등과 억류자를 맞교환하는 방안도 제기돼 왔지만, 정부는 현 단계에서 억류자 송환 대책을 국내 비전향 장기수 북송 문제와 연계해 추진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통일부 당국자는 지난 4일 북한에 억류된 우리 국민의 석방 대책을 국내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 문제와 연계해 검토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만일 이 방안이 시행된다면, 우려할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북한이 워낙 촘촘한 대북 제재를 받고 있어 자칫 북한에 건네는 '대가'가 제재를 위반할 소지가 있을 수 있고, 국제법상 한국이 제3국을 이익보호국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비전향 장기수 북송의 경우 국가보안법 등에 저촉될 여지마저 있기 때문에 선제적이고 면밀한 법적 검토가 필수적입니다.

'잊지 않는 것'이 곧 국가의 책무

735일간 북한에 억류됐다가 2014년 석방된 케네스 배 선교사
케네스 배 선교사는 억류 기간 내내 생면부지의 시민들로부터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는 편지를 열어보며 석방의 희망,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이들이 자신을 기억하고 노력해 준 덕분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법적·외교적 절차를 준수하는 해법을 찾는 동시에 '그들이 잊히지 않도록' 사회적 관심을 지속하는 일일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삶의 희망이 꺼져가고 있을지 모를 억류 국민들에게 '법적 흠결 없는 방법론'만큼이나 절실한 것은, 그들이 세상에서 잊히지 않았고, 그들을 안전하게 송환하는 게 국가의 당연한 책무라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았다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사진=김정욱 선교사 가족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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