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법원
특정 회사 명예를 훼손하는 현수막을 내걸어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표현을 바꾼 유사한 현수막을 게시해 또 재판에 넘겨진 경우 별개 범죄로 다시 처벌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습니다.
첫 범행 후 새로운 범죄 의도를 갖고 비슷한 죄를 저질렀다면 포괄일죄(여러 행위가 포괄적으로 하나의 죄를 이루는 경우)에 따른 '이중 기소'로 볼 수 없다는 취지입니다.
오늘(2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명예훼손과 옥외광고물법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 모 씨에 대해 이중 기소라며 검찰 공소를 기각한 1, 2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에 돌려보냈습니다.
앞서 김 씨는 2017년 12월∼2018년 1월 서울 서초구 하이트진로 사옥 앞에서 회사 명예를 훼손하는 현수막을 건 혐의(명예훼손, 옥외광고물법 위반)로 기소돼 2021년 10월 대법원에서 벌금 500만 원이 확정됐습니다.
김 씨는 해당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18년 4월∼2019년 6월 유사한 내용의 현수막을 재차 게시해 2019년 11월 또다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그러나 2021년 8월 1심은 이 사건과 선행 사건의 공소사실을 포괄일죄로 보고 공소를 기각했습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하이트진로에 대한 허위사실을 적시한 행위는 단일하고 계속된 범의(범행의도) 아래 이뤄진 여러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검사가 포괄일죄를 구성하는 일부 범죄사실을 기소한 뒤 그 판결 선고 전까지 나머지 범죄사실을 별개의 독립된 범죄로 기소하는 것은 '동일 사건에 대한 이중기소'여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판례입니다.
선행 사건 1심 선고는 2020년 8월에 있었는데, 검사가 이 사건 기소일인 2019년 11월 별도 기소할 게 아니라 앞선 재판 중 공소사실을 추가하는 취지로 공소장 변경 신청을 해야 했다는 게 1심 판단이었습니다.
검사가 항소했으나 2심 재판부도 1심 판단이 맞는다고 보고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선행 사건과 이 사건 공소사실은 포괄일죄로 볼 수 없다"며 2번째 기소는 '이중 기소'가 아니라고 봤습니다.
대법원은 유사 범행이 장기간 계속된 경우 범의의 단일성과 계속성을 판단할 때는 "개별 범행의 방법과 태양(행태·양상), 동기, 각 범행 사이의 시간적 간격, 범의의 단절이나 갱신이 있는지 등을 세밀하게 살펴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대법원은 이 사건 범행 전인 2018년 3월 내려진 가처분 결정으로 김 씨에게 범의의 갱신, 즉 새로운 범행의도 형성이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이트진로의 가처분 신청에 따라 법원은 당시 김 씨에게 현수막을 철거하라고 명령했고, 김 씨에게는 2018년 4월 가처분 결정이 고지됐습니다.
이에 김 씨는 앞선 현수막을 철거하고 표현이 살짝 수정된 새로운 현수막을 게시했는데, 이 사건 범행은 이렇게 이뤄진 별개 범행이라는 설명입니다.
대법원은 "가처분 결정에 따라 피고인이 선행 현수막을 수거함으로써 범행이 일시나마 중단됐다"며 "가처분 결정에 따른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선행 현수막의 표현과는 다소 다른 내용의 이 사건 현수막을 새로 게시한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1, 2심 판단에는 포괄일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있다"며 1, 2심 판결을 모두 깨고 사건을 1심에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아울러 공소사실 중 공소제기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확인하고 불분명한 부분은 검사에게 석명을 구하는 등으로 명확하게 한 다음 기소된 범위에서 심리·판단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해둔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진=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