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지난달 29일 한국 방문을 계기로 추진됐던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 북미 정상 만남이 무산된 지 20여 일이 지났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만남을 희망했지만 북한이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북, 북미 정상 만남 염두에는 두고 있었는데…

북한이 처음부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김정은은 지난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화 의사를 밝혔습니다. '미국이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데 기초해 북한과의 평화공존을 바란다면 미국과 마주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밝힌 것입니다. 지난달 10일 노동당 창건 80주년 열병식 연설에서는 국방력 강화를 강조하면서도 대미 비난은 하지 않았습니다. 열병식이라는 행사가 무력을 과시하는 자리인데도 수위조절을 한 것입니다. 김정은-트럼프 만남 가능성을 닫지 않은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었습니다. 국정원도 지난 4일 국정감사에서 "(북한이) 물밑에서 미국과의 대화를 대비해 둔 동향이 다양한 경로로 확인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하기 1주일 전쯤부터는 북미 정상 간 만남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지난달 22일 5개월 만의 탄도미사일 발사, 지난달 26일 최선희 북한 외무상의 러시아 방문 보도 등은 북한이 북미 정상 만남을 준비하지 않고 있음을 시사했습니다. 김정은이 트럼프와의 만남을 고민하다 결국에는 만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북미 정상 만남, 왜 거부했나?
그렇다면, 김정은은 왜 북미 정상 만남을 거부했을까요?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바뀌지 않았다는 이유가 크겠지만, 북한의 국내 정치일정과 연계해 추정해 볼 수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북한은 지금 대규모 정치행사를 잇달아 앞두고 있습니다. 5년 만에 열리는 제9차 당대회가 내년 초쯤 열릴 예정이고, 그에 앞서 다음 달 중순 노동당 전원회의도 예정돼 있습니다. 북한은 열병식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제9차 당대회에 맞춰 열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북한의 제9차 당대회는 '당이 곧 국가'인 북한에서 매우 중요한 정치행사입니다. 제8차 당대회 이후 지난 5년 간의 사업을 평가하고 향후 5년 간의 국가 계획을 수립하는 자리인데,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 지난 5년 간의 성과를 보고해야 합니다.
김정은은 이번 당대회에서 자랑할 만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북한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부분입니다.
북러 동맹 복원과 러시아 파병으로 북한은 북러 관계를 혈맹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그에 기반해 북중 관계까지 복원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난 9월 중국 전승절 열병식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은 것은 북한이 미국에 반대하는 이른바 '반제국주의' 진영에서 주요 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보했음을 의미합니다.
북한은 러시아 파병의 대가로 식량과 기름 등을 지원받고 있고,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함으로써 국경 지대에서의 밀수 묵인 등 경제적 이득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은으로서는 중요한 정치행사인 제9차 당대회에서 이런 성과를 과시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만약 지난달 김정은이 트럼프와 만났다면 김정은에게는 다소 애매한 상황이 발생합니다. 북미 정상이 만났다면 특별한 합의는 없었다 해도 북미 실무협상을 재개하는 정도로는 뜻을 모았을 텐데, 이렇게 되면 북미 협상과 제9차 당대회가 시기적으로 겹치게 됩니다. 반미 진영의 '리더'로서 위상을 과시해야 할 제9차 당대회 때 다른 한편에서는 북미 접촉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당대회 때 김정은이 반미 성과를 과시하기가 좀 애매해집니다. 지난달 북미 정상 회동을 가졌을 경우, 북한의 국내 정치일정을 북한이 원하는 방향으로 소화하기가 다소 애매해지는 것입니다.
북, 트럼프 정부에 대한 실망 표명

어쨌든 올해 북미 정상 만남은 무산됐고 이제 내년을 내다봐야 할 텐데, 지난 18일 북한은 주목해 볼 만한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한미 팩트시트와 한미연례안보협의회 공동성명에 대해 입장을 내놓은 것인데, 미국에 대한 주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북한은 조선중앙통신 논평 형식으로 내놓은 반응에서 한미 팩트시트가 '변함없이 적대적이려는 한미동맹의 대결선언'이라면서 트럼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했습니다. 집권 1년을 가까이 하는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이번 팩트시트를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해 한국과 확약한 것을 보면 미국의 선택이 북한과의 대결임을 입증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 보면 이런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로써 현 미 행정부가 추구하는 대조선(대북) 정책의 진속과 향방을 놓고 언론들과 전문가들 속에서 분분하던 논의에는 마침내 종지부가 찍혔으며 우리는 물론 전반적 국제사회가 미국의 대조선(대북) 입장에 대한 보다 확실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 조선중앙통신 논평, 지난 18일
- 조선중앙통신 논평, 지난 18일
김정은과 세 차례나 만난 적이 있는 트럼프의 집권을 맞아 북한도 미국의 대북정책에 변화가 있는지 1년 가까이 지켜봐 왔는데, 결국 전임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다다랐다는 뜻입니다. '북한 비핵화'라는 미국의 목표에는 변화가 없는 것이 확인된 만큼, '사실상의 핵보유국 인정'이라는 북한의 목표는 트럼프 정부에서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으로 최종적인 판단을 내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결국 북한이 북미 대화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도 연결됩니다. 미국과 만나서 대화해 봤자 크게 얻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분간은 김정은-트럼프 만남이나 여타 북미대화의 가능성이 더 낮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전히 고민하는 북한
하지만, 북한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판단이 끝났다는 입장을 조선중앙통신이라는 매체 논평 형식으로 발표한 것은 북한이 여전히 수위조절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향후 필요에 따라 언제든 김정은이나 김여정 명의로 입장을 바꿀 수 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