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 업무 스트레스도 만만찮은데 '갑질'까지 당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와 함께 여러분에게 진짜 도움이 될 만한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해드립니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는 종종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이 발견된다. 가해자로 지목된 상사에게 피해자가 "감사합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와 같은 메시지를 보낸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런 흔적은 조사 단계에서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약화시키는 근거로 활용되곤 한다. "정말 불쾌했다면 왜 이렇게 친절하게 답했느냐", "사건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한 것은 자발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피해자들이 처한 구조적 맥락을 간과한 결과이며 실제로는 신고를 결심하지 못한 피해자들이 직장 내에서 안전을 담보받을 수 있는 나름의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한 공공기관의 사례에서, 피해자는 부서장의 반복적인 성적 발언과 신체 접촉에 시달리며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제출된 메시지에는 "팀장님, 내일 일정 공유드립니다. 오늘 말씀 감사했습니다^^"라는 문장이 남아 있었다. 회사 측은 이를 근거로 "적극적인 거부의 의사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피해자는 당시의 메시지를 보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팀원이잖아요. 팀장과 매일 마주치고 팀장의 지시를 받으면서 일을 해야 하잖아요. 직속 상사이고 평가자이기도 하고요. 불쾌하다고 말하는 건 더 이상 제가 이 직장을 다니지 않겠다는 결심을 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직장이라는 공간에서 생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고백이었다.
직장은 단순한 사회적 관계의 장이 아니라 생계의 수단이고, 평가와 위계가 존재하는 공간이다. 피해자는 그 구조 속에서 직장 내 성희롱으로 신고를 하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는 이상, 생계를 유지하되 평가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하여 성희롱 피해 이후에도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가고, 업무 보고를 하며, 때로는 웃는 표정을 지어야 했다. 적대감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서 취했던 방어적 선택이 직장 내 성희롱 신고 이후에는 가해자와의 친밀함으로 둔갑되어 피해자를 향한 화살로 돌아오곤 하는 것이다.
이처럼 피해자가 보이는 '이중적 태도'는 비합리적 행동이 아니라 심리적 자기보호의 표현이다. 성희롱 사건의 다수는 권력 불균형 상황에서 발생한다. 직속 상사, 인사권자, 평가자 등 가해자가 피해자의 업무와 경력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에서는 피해자는 '거부'나 '신고' 같은 적극적 행위 대신 '회피' 혹은 '순응'을 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피해를 살펴보면서 그 판단 시 피해자의 반응에 기준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는 "그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느냐", "왜 그렇게 친절하게 답을 했느냐"는 질문 앞에서 다시 한번 비난받는다.
피해자의 이런 대응은 피해의 경험과 떨어진 사람들한텐 낯설지 몰라도 피해자들에게는 흔히 확인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법원 역시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여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친근하게 행동하거나 대화를 지속하였다는 사정만으로 성희롱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