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운상가에서 본 서울 종묘공원과 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宗廟) 맞은편 재개발 사업지인 세운4구역에 최고 높이 142m의 초고층 빌딩이 들어설 길이 열렸습니다.
고층 건물이 종묘의 경관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계 안팎에서는 '제2의 왕릉뷰 아파트' 사태가 재현되는 게 아닌지 우려가 나옵니다.
반면, 인근 주민들은 높이 제한이 대폭 완화되며 20년 넘게 표류하던 재개발 사업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시는 지난달 30일 이런 내용이 담긴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결정(변경) 및 지형도면'을 시보에 고시했습니다.
이번 고시는 세운4구역의 높이 계획을 변경하는 게 주요 골자입니다.
고시된 내용에 따르면 세운4구역의 건물 최고 높이는 당초 종로변 55m, 청계천변 71.9m에서 종로변 98.7m, 청계천변 141.9m로 변경됐습니다.
청계천변 기준으로 보면 건물 최고 높이가 배 가까이 증가하는 셈입니다.
세운4구역은 북쪽으로 종묘, 남쪽으로는 청계천과 연접해있습니다.
시 관계자는 "세운4구역은 2004년 정비구역으로 지정됐으나, 9년간 총 13회에 걸쳐 문화유산 심의를 받으며 높이가 50m 축소되면서 사업 동력을 잃고 장기 지연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높이 변경에 대해 "종묘 경관을 훼손하지 않도록 앙각 기준을 확대 적용해 도심 기능과 환경이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했다"고 배경을 설명했습니다.
세운4구역의 높이 기준이 변경되는 건 2018년 이후 7년 만입니다.
세운4구역은 2004년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된 이후 꾸준히 재개발을 추진했으나 역사 경관 보존과 수익성 확보, 잦은 사업 계획 변경 등으로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특히 사업시행인가를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의 문화재위원회 심의에서 제동이 걸리면서 2018년에야 55∼71.9m 기준이 정해졌습니다.
그러나 높이 계획이 또 달라지면서 관련 논의 역시 불붙을 전망입니다.
국가유산청은 무엇보다 세계유산인 종묘의 가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종묘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으로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과 더불어 한국의 첫 세계유산입니다.
국가유산청은 세계유산으로 인정받은 핵심 요소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규모 사업이기에 '세계유산영향평가'가 필수라는 입장입니다.
세계유산 관련 활동을 총괄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WHC)는 여러 잠재적 개발로부터 세계유산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유산영향평가(HIA)를 받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만, 영향평가와 관련한 하위 법령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국가유산청은 지난해 11월 세계유산영향평가를 하도록 명문화한 '세계유산의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특별법'(약칭 '세계유산법')이 시행된 만큼, 서울시 측이 영향평가를 이행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측은 세운4구역의 높이 제한을 완화하기 위해 국가유산청과 여러 차례 협의하고, 타협점을 찾으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입장입니다.
시 관계자는 "국가유산청은 기존에 협의된 높이인 55∼71.9m를 유지하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영향평가를 이행하라는 내용만 일관되게 권고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서울시 측은 세운4구역이 높이 규제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세운4구역은 종묘로부터 약 180m 떨어져 있어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서울 기준 100m) 밖에 있으므로 '세계유산법' 등에 따라 규제할 수 없다는 설명입니다.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은 지정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정하는 구역으로, 유산의 외곽 경계로부터 500m 이내에서 시·도지사가 국가유산청장과 협의해 조례로 정하도록 합니다.
다만, 서울과 제주를 제외한 대부분 지자체에서는 주거·상업·공업지역은 200m, 녹지지역 등은 500m 범위를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측은 "종묘의 국제적 위상 강화, 종묘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남북 녹지 축 및 녹지생태 도심 실현을 위해 높이 계획은 조정하는 것이 적정하다"고 밝혔습니다.
학계 안팎에서는 종묘를 둘러싼 갈등이 재점화될까 우려하는 분위기입니다.
세계유산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한 교수는 "종묘라는 역사적 공간이 갖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밀어붙이는 개발은 마이너스가 더 클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2004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리버풀, 해양 무역 도시'는 대규모 개발 사업이 문제가 되면서 2012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에 올랐고, 9년 뒤에는 세계유산 지위를 아예 잃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빈 역사 지구'(2001년 등재) 역시 급격한 도시 개발로 인해 유산의 경관이 침해된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2017년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에 오른 상태입니다.
건축계의 한 원로 학자는 "세계유산 등재와 보존은 국제사회와 한 약속"이라며 "중요한 유산의 역사·문화 경관적 가치를 훼손하는 개발은 심히 우려스럽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국가유산청과 서울시의 견해차가 큰 만큼 문제 해결은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국가유산청은 서울시가 고시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내용을 토대로 대응 방안을 고심 중입니다.
(사진=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