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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쯤 소환됐을 80∼90년대 감성과 클리셰가 주는 위안 [스프]

[취향저격]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보듬어주는 동화 같은 이야기 - <백번의 추억> (글 :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백번의 추억
최근에 완결된 JTBC 드라마 <백번의 추억>에는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보기 힘든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설득력이나 현실성의 여부를 제쳐두고,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새로운 캐릭터가 아니고 오히려 클리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보기 힘든 캐릭터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 타인을 누르고 올라서면서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영례는 빈곤한 환경에서도 밝고 긍정적이며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캔디형 캐릭터다. <백번의 추억>에는 로맨스 드라마의 흔한 상황, 낯익은 캐릭터들이 나온다. 삼각관계와 엇갈린 애정의 화살, 키다리 아저씨처럼 위태로운 상황마다 등장하는 은인과 필요 이상으로 악독한 빌런의 대립 같은 기본적인 원형을 바탕으로 한다. 그 위에 세밀하게 바뀐 변주들이 모여 새로운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백번의 추억>도 로맨스 드라마의 클리셰로 가득 차 있고, 우연의 중첩과 갑작스러운 도약이 곳곳에 깔려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이 있다. 긴장감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자극적인 스릴러 형식의 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되고 관심을 모으는 가운데, 촌스럽기까지 한 추억 소환 드라마들이 기대 이상의 시청률을 확보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백번의 추억>의 두 주인공, 고영례(김다미)와 서종희(신예은)는 100번 버스의 안내양이다. 제목에 나오는 백번은 중의적이지만 일차적으로 버스 번호를 뜻한다. 당시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이 많이 가졌던 직업이 버스 안내양이었다. 그들이 일하는 환경은 공장 만큼 열악했다. 종일 선 채로 일해야 했고, 승객들에게서 받은 차비를 빼돌릴까 봐 몸수색도 당해야 했다. 영례처럼 꿈을 버리지 않고, 선 채로 꾸벅꾸벅 졸면서도 영어단어장을 놓지 않는 열정으로 대학에 진학한 버스 안내양의 사례가 크게 기사화될 만큼 그들의 삶은 고달팠다. 하지만 <백번의 추억>이 그렇듯, 드라마나 영화에서 묘사되는 그들의 삶에는 꿈이 있고 청춘의 활기가 있다. 그리고 삭막한 시대를 함께 버티어 나갈 수 있는 연대 의식이 있다. 산재사고를 당한 동료를 위해 해고의 위협을 무릅쓰고 파업과 농성을 벌이는 장면처럼, 80년대 후반 무렵 빠른 산업화의 이면에 있는 노동자 착취에 맞서 노조가 결성되고 파업 시위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안내양이 동행해야만 버스를 운행할 수 있었던 법규는 자동화 시스템의 발달로 89년에 폐지되고 그 많던 버스 안내양들은 일시에 자취를 감춘다.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해 직업 자체가 사라진 경우지만 그 뒷이야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드라마에서도 그 부분은 생략되고 7년 후로 건너뛰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배경이 90년대로 바뀌면서 시대성은 사라지고, 개인 간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본격적인 로맨스 드라마가 된다. 남자 주인공들은 이런 드라마 장르의 전형적인 직업군이라고 할 수 있는 예비 판사, 의사가 됐고, 영례는 헤어디자이너, 종희는 신데렐라처럼 재벌 회장의 수양딸이 된다. 영례와 종희 사이에는 신분의 격차가 생겼지만 둘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을 비롯해 과거에 버스 안내양으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그 시절의 애틋한 감정을 끝까지 끌고 간다. 종희는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려한 생활을 하지만, 감정적으로 더 힘들고 외롭다. 그래서 예전에 함께 어울렸던 사람들을 그리워하고, 자신의 정체성이 지워진 재벌 딸 역할에 염증을 느낀다. 영례와 종희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경쟁 관계가 됐지만, 운명적인 만남으로 비롯된 로맨스를 택하고 우정을 버리는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그리고 사랑과 우정을 둘 다 취하면서, 주변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야말로 동화 같은 결말로 끝난다. 현실성은 떨어져 보이지만, <백번의 추억>의 등장인물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성취가 아닌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감성을 다시 끌어낸 드라마의 시작은 tvN에서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방영됐던 <응답하라> 시리즈다. 특히 마지막 시리즈인 <응답하라 1988>이 가장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 드라마의 특징은 비슷한 환경에 놓인 서민들이 한 집 식구처럼 서로 챙겨주고, 옹기종기 뭉쳐서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와 더불어 80년대와 90년대의 기억을 소환하는 소품들, 가요, 가수들을 보며 시청자들은 그 시절의 감성에 빠졌다. 신군부 세력의 등장과 대학생들의 시위, 경제적인 급성장과 IMF를 겪은 격랑의 시대였고 문화적으로는 도약적인 발전이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현재 방영 중인 tvN의 드라마 <태풍상사>는 IMF 시기의 몰락과 좌절감으로부터 시작한다. <태풍상사>에서 남자 주인공인 강태풍(이준호)은 유복한 환경에서 철없는 시절을 보냈지만, 회사의 부도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사업 경험이 전혀 없는 태풍의 도전은 무모해 보이지만, 그의 옆에는 현장 경력과 빠른 두뇌 회전, 꼼꼼함을 갖추고 그를 지지하는 오미선(김민하)이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아들을 위로하는 엄마가 있다. 오미선은 <백번의 추억>의 영례처럼 그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오빠나 남동생을 위해 희생하거나 가장 노릇을 하는 K-장녀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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