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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임산부 폭행에 성폭력까지…악마 같았던 철거 용역 적준, 아직까지 사과는 없다

[꼬꼬무 찐리뷰] 임산부 폭행에 성폭력까지…악마 같았던 철거 용역 적준, 아직까지 사과는 없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11일 방송된 '사라진 나의 집, 그리고 적준'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베이비복스 출신 배우 윤은혜, 가수 KCM, 배우 채서진이 출연했습니다. (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특별한 기록이 담긴 사진
꼬꼬무

가수 故 김광석. 이 사진 속 김광석과 함께 있는 인물의 이름은 임종진. 한 언론사에서 사진 기자로 일했던 그는, 오랫동안 실력 있는 사진 작가로 활동했어. 이라크 전쟁터, 북한 등 남들이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다니며 사진을 찍었어. 북한엔 6번이나 다녀와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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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사진기자로 10여 년 활동했고,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 사회에 여러 형태로 빚어지고 있는 현상들에 관심이 많아져서, 이런 거에 제 몸이 늘 따라가더라고요. 그래서 학창 시절부터 빈민촌 같은 곳에 많이 다니고 장애를 지닌 분들에 대해 관심 많이 갖게 되고. 이런 분들을 사진으로 남겨서, 세상이 이런 분들에게 좀 더 알려지거나 삶이 개선되거나 뭐 이런 바람으로 그때는 사진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임종진, 사진작가

예전부터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다는 임종진 작가는 주로 인물사진을 촬영했어. 인물의 표정이나 몸짓이 찍힌 사진을 통해서 사람들의 사연을 알리고 싶었대. 그래서 그는 '사연 전달자'라고 불리기도 했어.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담은 사진이 있어. 바로 이 사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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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수환 추기경을 찍은 사진이지. 이 사진 속에는 상상하지 못할 엄청난 사연이 담겨 있어. 임종진 작가는 지금도 이 사진들을 찍던 그 순간을 잊지 못 한대. 그의 시선을 따라서, 사진 속 그날로 돌아가 볼게.

▲ 도원동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는 1998년 3월. 서울의 한 월간지 사무실이야. 당시 종진 씨는 이곳에서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었어. 정신없이 마감을 하던 그때, 종진 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어. 서울 용산구 도원동에서 한 남자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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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해야 해서 사진 정리하고 넘겨야 하고. 마감이 하루 이틀 정도밖에 시간이 안 남은 상황이었는데 연락이 온 거죠. 도원동에서 화재 사고, 화상 사고가 났다… 정말 불같이 또 화가 솟아서, 이거는 우리가 사진을 남겨서 실어야 되겠다. 그날 기사를 넘겼어야 하나, 다음날 오전에는 무조건 넘겼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래야지 책이 월간지가 나오니까. 근데 '이거는 무조건 실어야 된다' 해서. 스톱을 시켜놓고 병원으로 갔죠."
-임종진, 사진작가

카메라를 들고 병원 응급실로 간 그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어. 온몸을 붕대로 칭칭 감은 그 남자는 신음을 내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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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말로는 80% 죽음이고, 20% 소생이라고 하는데. 보면 막 물이 질질 흐르고, 좌우지간에 보질 못해. 사람으로서는."
-화상 환자 가족

화상을 입은 사람은 27세 청년 백 씨. 전신 3도 화상에 불이 기도로 들어가 숨도 쉬지 못하는 상황이야. 어떻게 된 일일까?

"뒤에서 뭐가 뒤통수를 치는데 앞에서 불이 번쩍하더래요. 그러면서 이제 정신을 잃었대요. 정신을 잃어서 누웠는데 뭐가 화끈하더래요. 온몸이. 화끈하고 정신이 아찔했는데, 깨어나보니 병원이랍니다."
-화상 환자 가족

그런데 이날 도원동에서 다친 사람, 백 씨뿐만이 아니야. 인근 병원에는 예순 살 이 씨가 응급수술을 받고 있었어.
갈비뼈가 비장을 뚫고 다리 한쪽이 두 동강 나는 큰 부상을 입었어. 이 씨 말에 따르면, 그날 누군가로부터 심하게 폭행을 당했대.

한 명은 뒤통수를 맞은 뒤에 전신 화상을 입었고, 또 한 명은 비장이 파열될 만큼 폭행당했어. 이들이 그날 겪은 일은, 임종진 씨가 찍은 사진과 함께 월간지에 기사로 실리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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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기절한 젊은이의 등에 화염방사기를 쏘았나>
"3월 30일 새벽 용산구 도원동 재개발 지구에서 두 사람이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한 청년은 온몸에 중화상을 입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온몸에 골절상을 입었다."

이 모든 일은 용산구 도원동 재개발 지구 철거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야. '철거촌', 본 적 있어? 지금 서울 곳곳에 즐비한 높은 아파트들. 이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전, 그 자리에는 소시민들이 사는 작은 집과 판자촌이 가득했어. 90년대 들어서며 서울시에 재개발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돼. 아파트를 짓기 위해 노후 주택을 철거하면서,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하나 둘 집을 떠났어. 그런데 그 과정에서, 누구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누군 죽을 만큼 폭행을 당한 거야. 철거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이건 시작에 불과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일이 벌어질 거야.

▲ 사라진 보금자리

1990년대 초 30대였던 송경란 씨는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에 살고 있었어. 결혼 후 작은 전셋집에서 살기 시작한 경란 씨는 옷을 만드는 일을 하며 어린아이들을 키우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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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방 하나 부엌 하나. 그런 집들, 마루 있고 주방. 아주 전형적인 주택이었어요. 전농동은 거의 40년 산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 아이도 초등학교 입학할 때 아빠가 그 학교 다녔던 그런 친구들도 많았고. 시골에서 뭐가 올라오면, 그 집으로 모여서 다 같이 밥도 먹고. 동해안이 친정이나 시댁인 집은 게가 올라온다거나 그러면 그 집 가서 다 먹고. 순덕이네 같은 경우에는 친정에서 파프리카가 그때 왔어. 파프리카가 흔하지 않을 때니까. 귀한 거였어요 그때는. 파프리카 오면 그 집 가서 다 밥 먹고 그랬어요. 골목마다 그런 게 있었죠."
-송경란, 당시 전농동 주민

전농동은 이렇게 형편은 넉넉지 않아도 소박하고 정이 넘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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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살던 유영우 씨는 사업에 실패하고 이곳에 이사를 오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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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집들이 다닥다닥 다 붙어 있는 산동네에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곳이었죠. 대부분 그 동네에 그때 살았던 분들은, 아빠들은 건설 일용직이라든가, 엄마들은 파출부라든가, 가내수공업, 집에서 재봉틀 작업, 이런 걸 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세입자들도 집주인들도, 풍족하게 산 건 아니었고. 집이라고 해봐야, 허름하게 다 쓰러져 가는…"
-유영우, 당시 행당동 주민

90년대의 행당동. 방 한 칸에 보증금 100만 원, 월세는 15만 원이었어. 저렴해서 집값 걱정 잠깐 내려놓을 수 있는 소중한 집이었던 거지. 그렇게 유영우 씨는 실패의 아픔을 딛고 다시 시작해 보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버텼대.

1997년 전농동에 살던 경란 씨는 그날 잠시 집 근처에서 일을 보고 있었어. 그런데 한 이웃이 다급하게 소리치기 시작해. 경란 씨네 집에 불이 났다는 거야. 당시 경란 씨 집엔 어린아이가 혼자 자고 있었어.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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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떡해요. 불난 집에 어린애들이 있어요. 어린애들이 대피하고 있어요. 엄마들이 여기 나왔기 때문에. 어떡해요 어린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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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같은 경우에는 철거 때 불이 났었어요. 홀랑 애들 돌사진 하나 안 남았어요. 홀라당 다 탔어요."
-송경란, 당시 전농동 주민

화재가 난 곳에 있던 철거 용역. 경란 씨가 살던 전농동이 재개발 지역으로 결정되고, 사람들의 집이 강제로 철거된 거였어. 그럼 화재는 왜 난 걸까? 유영우 씨가 살던 행당동 역시 마찬가지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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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죠. 폭격 맞은 전쟁터. 집 주변이 거의 다 몇 집 안 남겨두고, 다 반파돼 있는 거예요. 폭격을 맞은 거랑 똑같아. 굉장히 무기력하게, 정신없이. 굉장히 많이 울고 한탄하고 그랬던 것으로 기억해요."
-유영우, 당시 행당동 주민

재개발 사업이 시작됐지만, 당장 떠날 곳도, 떠날 돈도 없던 사람들은 아직 그곳에 남아 있었어. 갑자기 이사 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주변 집 값이 폭등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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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집값의 한 세 배? 세 배 이상?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산동네 달동네에 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이주해 버리니까."
-유영우, 당시 행당동 주민

그러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세입자들은 한순간에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됐어. 남은 철거민들은 터를 옮길 때까지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잠시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어. 하지만 이런 그들 앞에 나타난 건,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쇠파이프와 온갖 연장을 든 철거 용역들이었어. 그들은 사람들이 아직 살고 있는 곳에 불을 내고, 중장비와 연장으로 집을 부수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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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만 있는데도 와서 (중장비로) 지붕 뚫고 막 그랬었다니까요. 뚫고 그거(집 천장)를 안방에다 떨어뜨렸다니까. 애들만 있는데."
-송경란, 당시 전농동 주민

▲ 철거 용역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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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용역들은 이런 모습을 했어. 소위 용역 깡패라 불리는 이들은, 매일같이 철거촌에 찾아와 나가라고 협박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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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명이 오는 게 아니라 몇백 명씩 날짜를 잡고 새벽에 와요. 몸에 막 용 그려져 있고 그런 사람들이 밤에 옷 안 입고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면 무서워서 여자들 못 돌아다녀요. 젊은 애들이 욕도 험악하게 했어요. 용역들이. 우리 동네 같은 경우에도, 젊은 애들이 골목골목 있으니까 쇠 파이프 들고 있으니까 많이 겁났죠."
-송경란, 당시 전농동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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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목에 쇠 파이프 들고 오고. 입에 담지 못할 몰상식한 말도 많이 하고. 아빠들한테 굉장히 폭력을 가하려고 위협도 가하고, 그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있는 거예요. 많이 두들겨 맞았죠."
-유영우, 당시 행당동 주민

존재만으로 위협이 된 철거 용역들. 철거 용역 중 일부는 철거 현장에 상주하며 밤낮으로 주민들을 위협했어. 이때 동원된 철거 용역은, 수십 명에서 수 백 명이야. 이 철거 용역은 뭐 하는 사람들이었을까. 실제로 예전 철거 용역이었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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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인원이 필요 없이 뭐 50명 100명 미만일 때는 직원들, 동생들이라고 해서 경비 절약해서 인원을 합치면 그래도 한 7, 80명 100명 미만은 있으니까. 필요시에는 그 인원들을 쓰고. 많은 인원을 동원시킬 때는 인력 시장 가서 사 오고."
-이전 철거 용역원

대부분의 용역 깡패들은 인력 시장에서 구한 사람이거나, 조폭 출신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었대. 그런데 서울시 재개발 지역의 철거를 맡았던 여러 철거 업체 중, 아주 유명한 철거 업체가 하나 있어. 그 누구보다 잔인했다고 알려진 곳이야. 이름하여 '적준 용역'. 이라크 전쟁 등 여러 긴박했던 현장을 취재했던 임종진 씨도, 적준의 철거 현장은 마치 전쟁터만큼 잔혹했다고 이야기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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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준. 저는 그 단어만 들어도, 이런 데가 올라와요. 지금 이 긴 시간이 지났는데. 그 사람들의 용역원들의 표정이 다 떠올라요. 적준 철거반원들이 치고 들어올 때, 진짜 무섭거든요. 욕은 기본이고, 쇠 파이프 들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예요. 굉장히 무자비하고. 엄청나게 폭력적이에요."
-임종진, 사진기자

적준의 철거 용역들이 어떤 일을 벌였길래 종진 씨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지, 살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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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구 봉천동. 2층에서 자고 있는 장ㅇㅇ씨의 집으로 침입. 'XXX 이리 나와'라고 하면서 쇠파이프와 망치로 위협. 발로 걷어차 치료 일수 미상의 상해를 입히고, 초교생 자녀 세 명을 계단 밑으로 던져버린 후 강제철거."

"양천구 신정동. 임신 5개월 된 임산모를 때려 약 4주간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히는 등 주민 25명에게 치료일수 미상의 상해를 가하고 아주머니들에게 강제로 똥물을 먹이는 등의 폭행."
-적준의 범죄 보고서 中

적준 철거 용역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폭력을 행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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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다쳐서 피가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모르고 사람 죽는다고 악을 쓰고 이랬지. 뭐 정신이 없었어요. 나는 한국전쟁 때도 그런 거 못 보고, 일제강점기 때 그렇게 폭탄이 쏟아져도 그런 걸 못 봤는데, 세상 기가 막힌 일이지."
-당시 철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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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탁 한 명이 때리고 두 명이 양쪽에서 옆구리를 발로 차고 하는데 진짜. 맞는 게 아파서 엎드렸던 거야. 더 이상 맞으면 아프니까. 지금 그 생각하면 너무나 비굴해서 비참하지."
-당시 철거민

이 사람들이 저지른 일은 이런 폭행뿐만이 아니었어.

"관악구 봉천동 95년 4월 25일. 새벽 6시 20분경 주민 ㅇㅇㅇ 씨를 적준 용역의 철거 깡패 30여 명이 둘러싸고. 성폭력 테러를 자행했다. 명치를 발로 무자비하게 내리밟고 가슴을 사정없이 쥐어짜며 이것도 부족해 하체를 모두 벗겨 연탄재를 사타구니에 집어넣고 발로 짓이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성동구 행당동 97년 9월 30일 8시 50분경. 철거 깡패들은 여자들을 엎어놓고 올라타 머리를 바닥에 짓이기는 등의 상상할 수 없는 성폭력을 자행했으며 여자들의 젖가슴을 움켜쥐고 공을 패스하듯 이놈이 잡아서 저놈에게 돌려가며 추행을 서슴지 않았다."
-적준의 범죄 보고서 中

기록에 의하면, 여성 철거민들을 대상으로 입게 담지도 못할 성폭력까지 저질렀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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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갖다가 'XXX 절로 가라'면서, 제 머리카락을 당기며 넘어지면서 같이 그 사람하고 넘어졌어요. 같이 넘어졌는데 그 사람이 누운 상태에서 저를 여기를 젖가슴을 물고 누운 상태에서 발로 찼어요. 그러니까 저는 엎어진 상태에서 여기(가슴)를 맞았어요. 집에 와서 보니까 여기가 파랗게 멍이 든 거예요. 젖에서 피고름 같은 게 나왔어요. 애가 젖을 안 먹는 거예요. 그때 아기가 몇 개월이 안 돼서 젖을 먹이는데 젖을 안 먹으니까, 그게 최고 가슴이 아팠어요."
-당시 철거민

이밖에 방화, 재산 손괴, 어린이 인권 유린 등 철거 현장에서 수많은 범죄를 저질렀어.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 모든 걸 깨끗이 치우는 거. 그 목적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그럼 힘없이 당해야 했던 철거민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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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저희의 삶이 다 쓰러지는 거 같고. 정말 그때 저희 식구들은 아마 다 죽었다는 그런 생각에 좌절감에 빠져서 전부 그냥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그 상황이."
-당시 철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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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없는 게 뭐 그렇게 죄도 아닌데. 집 없고 싶어서 없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엄마가 몸도 별로 안 좋거든요…"
-당시 철거민 자녀

▲ 하늘 위의 집

철거민들은 내 집을 지키기 위해 온갖 모욕과 폭력을 버텼지만, 집이 무너지는 걸 막지 못했어. 결국 주민들은 적준 철거 용역의 폭력을 피해 하늘 위에 집을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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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골목이 이렇게 비스듬해서 잘 안 보였으니까. 우리 나름대로 방어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망루를 짓게 된 거죠. 위에 올라가서 보면 보이니까."
-송경란, 당시 전농동 주민

그 위에서 관찰하면 용역이나 위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수도 있고. 하지만 적준 철거 용역들은 이들의 살기 위한 몸부림조차 허락하지 않았어.

1997년 7월 25일. 전농동에서 지내던 경란 씨와 사람들에게 상상치도 못한 사건이 벌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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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저녁 6시 반쯤. 서울 전농동 재개발 지역. 세입자 10명이 농성을 벌이고 있던 망루에 불이 붙었습니다."
-당시 뉴스 보도 중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현장. 부상자들이 속출했어. 이날 전농동 사람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한 기록이 있어.

"폐타이어를 쌓아놓고 불을 지르면, 그 연기에 망루의 사람들이 질식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일명 '너구리 작전'으로 명명. 오후 5시경 탈수와 허기, 최루탄 등으로 탈진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폐타이어에 불을 질렀다."

지금은 불법이지만, 과거에 사용했던 너구리 수렵 방식이야. 너구리 굴 입구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워 굴 안에 그 연기를 넣고 너구리를 밖으로 나오게 한다는 거야. 기록에 의하면 아래에 불을 질러서 연기가 위로 올라가면, 주민들이 너구리처럼 나올 거라는 거지.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안에는 유독가스가 가득 찼어. 연기가 계속 위로 올라가는데, 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18미터 되는 높이에서 사람들은 불을 피해 아래로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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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란 씨의 남편도 그때 다리를 크게 다쳤대. 그리고 뛰어내린 경란 씨 남편 옆에서 사망한 사람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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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덕이는 배가 터져서 죽었거든요. 떨어진 자리가 남편의 옆이었다고 해요. '아저씨 우리 어떡해요' 그러더래. 순덕이가 죽어가면서. '괜찮아 곧 119 올 거예요' 그랬는데 119 오기 전에 숨이…"
-송경란, 당시 전농동 주민

경란 씨 남편 옆에서 사망한 사람이, 당시 귀했던 파프리카를 함께 나눠 먹었던, 경란 씨 앞집에 살던 순덕 씨였어. 철거 용역들은 사람이 있는 곳에 일부러 불을 질렀고, 그들이 불길을 피하다가 사망하게 만들었어.

도원동 역시, 임산부를 포함해 45명의 철거민들이 그들만의 집을 새로 지었어. 물도 전기도 끊긴 그곳에서 한 달이 넘도록 지낸 철거민들.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어. 이들의 사연을 들은 임종진 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현장에 가서 사진으로 남겼어.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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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걸, '골리앗'이라 불렀대. 하지만 이름과 다르게 이 골리앗은, 철근으로 얼기설기 지어져서 툭 치면 무너질 듯 굉장히 위태로웠어. 그런데 철거 용역들은 거기에 매일같이 물대포를 쐈어. 적준 철거 용역들의 이런 폭력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졌어. 당시 현장에 있던 종진 씨도 피해를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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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같은 사진기자, 저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많이 있는데, 폭력은 사람을 가리지 않거든요. 카메라 부서지고, 스트로보(카메라 플래시) 꺾여서 나가떨어지고. 욕은 욕대로 먹고.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끼어들었다가 맞고. 늘 그건 현장을 같이 있던 동료 사진 기자들도 '적준' 하면 다들 몸서리를 쳤어요."
-임종진, 당시 사진기자

▲ 위기의 골리앗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어. 이걸 봐봐.
꼬꼬무

주변에 2.5미터 높이의 펜스가 쳐지면서, 골리앗이 봉쇄됐어. 그리고 펜스 주변에 200명 가까이 되는 철거 용역들이 순찰을 돌아. 한마디로 고립시켜 버린 거지. 아까 종진 씨가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뛰어갔었잖아? 청년 백 씨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발견되고, 이 씨가 폭행당했던 상황이, 바로 이 펜스 안에서 벌어진 일이야.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있어. 불에 탄 백 씨, 폭행당한 이 씨 모두, 골리앗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었어. 그 사람들은 인근 주민들이었어. 내 이웃이 이 골리앗에 갇혀 배고프고 힘든 상황이니, 외면하지 못하고 식량을 전달하려 했던 거야. 당시 이들과 함께 있었던 이희재 씨의 이야기를 들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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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펜스를) 넘어서 약간 기어 올라가서 들어와야 해요. 그러니까 거기도 깡패들이 달려올 거 아니에요. 어쨌든 간에 막 이겨내고 들어갔어요. 들어가서 보니 두 명의 낙오자가 생긴 거예요. 그중에 한 명이 우리 청량 1동 주민 백 씨였고. 생각을 해보세요. 이건 전쟁이에요. 잡히면 백 씨나 지역 주민처럼 죽거나…"
-이희재, 당시 인근 주민

심지어 '화염방사기'도 있었대. 대열 후미 쪽에 쓰러진 백 씨가 이 화염방사기에 의해 화상을 입었다는 거야.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백 씨는 손가락 6개를 잃었고. 폐가 오그라들어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가빠왔다고 해. 이희재 씨는 무사히 골리앗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 안에 갇혀서 주민들과 같이 고립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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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황에서 제일 당황하고 놀란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아이들이야. 골리앗에 갇힌 주민들의 어린 자녀들은, 학교에서 돌아와도 돌봐줄 수가 없어. 결국 아이들은 이웃 주민들의 집에 머물게 됐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곳의 아이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시간을 보냈어. 그리고 '꽃점놀이'를 자주 했대. 꽃잎을 떼어내며 "철거민이 산다", "철거민이 죽는다" 하면서.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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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준 아저씨들이 포클레인 갖다요. 막 뭐라고 하면서 집 부수려고 막 그랬는데. 한 사람은 막 쇠 파이프 갖다 막 때리고 그랬는데. 어떤 사람은 불 갖다 지르고. 엄마, 아빠가 철거 싸움 빨리 끝내게 해 주시면 좋겠고요."

도원동 주민들이 골리앗에 고립된 지 한 달 정도 지났어. 그러던 어느 날, 추위와 배고픔에 탈진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어. 그런데 갑자기,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한 사람들이 밖을 쳐다봤어.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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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박스 하나 와 있었거든요. 그런데 거기(크레인)다가 그걸(컨테이너) 다는 거예요. '저걸 왜 달지?'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걸 달아서 딱 끌어올리는 겁니다. 위에 딱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문이 철컥 열리더니. 한 2미터 정도 되는 쇠막대기로 휘젓습니다. 깡패들이 막 밑으로 휘젓습니다. 깡패들이 막 철근 있죠. 막 제끼는 걸로 철근 뜯으면서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예요."
-이희재, 당시 인근 주민

크레인에 매달린 컨테이너 안에는, 온갖 연장을 든 철거 용역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어. 마치 사냥하듯 위에서부터 아래로 몰아냈어. 그렇게 골리앗은 그대로 불타 사라졌어. 이들은 그렇게 살기 위해 지은 마지막 집에서조차 영원히 쫓겨나게 된 거야.

"그대로 쭉 위에서 공격이 내려오니까. 저는 맨 위층에서 최대한 막아보려고, 몇몇 주민하고 버티다가 결국은 못 버티고 밑으로 이제… '이제 더 이상 안 되겠다' 상황이었잖아요. 저항을 못하고 나와서 골리앗을 점령당하고 철거됐죠."
-이희재, 당시 인근 주민

▲ 닿지 않은 호소, 귀 기울여준 사람들

이건 1998년 무렵,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야. 그럼 철거민들은 왜 무자비한 폭력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 당시 임종진 씨가 찍은 사진들이야.
꼬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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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경찰이야. 이런 상황에 경찰들이 왔으면 시민을 도와줘야지. 근데 보고만 있어. 철거민들은 피해를 입을 때마다 제발 도와달라 호소했어. 하지만 이들을 지켜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꼬꼬무

"경찰은 전혀. 우리가 폭력을 당해도 수수방관하고 있었던. 공권력이 거의 눈을 감아줬기 때문에."
-유영우, 당시 행당동 주민

도대체 공권력이 왜 도와주지 않은 걸까? '합동 재개발'이라 들어봤어? 과거엔 정부나 지자체가 재개발 사업의 시행 주체가 되어 철거 현장을 공무원들이 직접 감독, 관리했어. 그러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3년 이후, 합동재개발이란 방식이 도입됐어. 정부는 토지 확보나 인허가 등 행정 절차를 지원하고, 시행과 철거, 시공 등의 실질적인 사업 운영은 민간이 대부분 맞게 된 거야. 이 시기에 민간 철거 업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탄생한 업체 중 하나가 적준이었던 거지. 철거 업체 용역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철거민들을 대상으로 온갖 형태의 범죄를 저질렀어. 국가는 민간에게 재개발을 맡겼으니, 민간에서 알아서 하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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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 사람들하고 이야기해야지... 우리한테 뭐... 우리 책임구역이 아니고, 그 사람들의 책임구역이니까."
-당시 용산경찰서 서장

공권력을 가진 자들이 수수방관하는 동안, 철거민들의 편이 되어준 사람들은 따로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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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故 김수환 추기경. 사진 속 이곳은 철거민들이 모여 노숙하던 임시 천막 안이야. 절망에 빠진 철거민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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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님이 행당동에 오신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주민분들의 표정을 제가 잊을 수가 없어요. 애들 막 같이 안아주고. 부모들이 같이 와서, 당신들의 상황을 막 설명하고. 굉장히 애절하지만 희망의 부분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주민 분들의 표정들. 이런 것들이 그때 당시 현장에서 봤던 기억 중에 좀 많이 남죠."
-임종진, 사진작가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철거민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위로했어. 많은 시민 단체들도 이들에게 힘을 보탰지.
꼬꼬무

"87년 이후부터 철거 용역 업체가 대행을 하게 되면서 철거 폭력 문제가 계속해서 우리 사회에서의 이슈로 제기돼 왔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거 폭력의 중심에는 적준 용역이라는 철거 용역 업체가 늘 대명사처럼 존재해 왔습니다."
-고상만, 당시 천주교인권위원회 간사
꼬꼬무

"정말 엄청나게 큰 체구에 폭력배 같은 철거 폭력배가 속옷만 입고 술에 취한 채 철거를 자행하면서 한 아주머니가 그걸 막아서면서 울부짖으니까. 그 아주머니를 무자비하게 폭행했고. 그걸 지켜보던 당시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이. 자기 엄마를 때리는 폭력배에게 당연히 달려들었겠잖아요. 그 아이가 울면서 절규하는 모습을 보니까. 그걸 보면서 제가 너무 많이 울었어요. 우리가 힘을 키워 처벌해주고 싶었는데. 그래서 시작한 거예요."
-고상만, 당시 천주교인권위원회 간사

▲ 철거 범죄 보고서

그렇게 시작된 노력은 1998년 11월, 놀라운 결과물로 만들어져. 바로 이거야.
꼬꼬무

'다원건설 철거범죄 보고서'. 범죄 보고서의 발간 당시, 적준은 다원건설로 이름을 바꿨어. 여러 시민단체들은 이 보고서를 통해 이들의 범죄 행위를 낱낱이 고발했어. 오늘 공개된 기록들은 이 철거범죄 보고서 안에 기록된 내용들이야.

"철거민들이 절망감이 굉장히 컸어요. 폭력배들에 대한 보복, 두려움이 커서. 그런 사례들을 모으는 게 쉽지 않았어요."
-고상만, 다원건설(구 적준) 범죄 보고서 작성자

158페이지에 달하는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적준 철거 용역들은 폭력, 성폭력, 방화, 인권유린 등의 범죄를 셀 수도 없이 저질렀어. 마치 범죄 백과사전 같은 이 보고서가 세상에 드러난 후에, 이들의 처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섰어. 그럼 적준은 어떻게 됐을까?

범죄 행위에 대해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철거 범죄 보고서에 가득했던, 악행에 대한 처벌은 끝끝내 없었어.
꼬꼬무

"이러한 브레이크라도 걸려서 폭력이 자정 되기 바라는 차원에서라도 저희가 문제 제기를 하고자 했던 거였지요. 어느 정도는 그래도 처벌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은 증거불충분이라고 얘기한 거죠. 굉장히 많이 싸웠어요. 범죄 사실이 분명히 이렇게 다 드러나고 확인되는 건데 어떻게 책임이 없냐고."
-고상만, 다원걸설(구 적준) 범죄 보고서 작성자

적준은 철거민들에게 휘두른 폭력과 인권 유린을 통해 국내 주요 철거 업체로 급부상했어. 93년 이후 4년 간 적준이 서울에서 수주한 총액은 570억 원이 넘어. 현재 금액으로는 2천억 원이 넘는 금액이야. 이후에 자회사, 계열사들을 늘려갔고, 다른 회사들도 인수했어. 그 결과, 이젠 거대 기업이 된 거야. 확인된 계열사만 13개. 골프장도 두 개나 운영했대. 철거민들이 집에서 쫓겨나 길거리에 내앉게 된 그 순간, 다원건설은 업계에서 인정받는 성공한 기업이 된 거지.

적준 철거 용역 말고, 오히려 법의 처벌을 받게 된 사람들이 있어. 바로 철거민들. 농성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갔고, 몇몇은 수배자가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됐어.
꼬꼬무

"다 수배 내려져 있었죠. 전농동 사람들은, 왜 수배가 내려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 수배가 내려졌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폭력, 뭔 저기라고 그랬는데. 동네 사람들 다 수배였죠."
-송경란, 당시 전농동 주민

▲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

그 옛날 철거 현장에는 적준 철거 용역에게 맞아가며, 그저 살게만 해달라 울부짖던 사람들이 있었어. 그리고 부모와 떨어져 남의 집에 얹혀살고, 몇 년을 천막에서 지내야 했던 철거촌 아이들이 있었어. 이번 인터뷰에 용기 내 참여해 준 철거민들 모두 여전히 그때의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해.
꼬꼬무

"난 지금도, 공사장의 흰 안전모가 무서워요. 철거 용역들이 들어올 때 항상 그 모자를 썼거든요. 위에서 보면 진짜 골목골목마다 그 모자들이 보여서. 지금도 난 도로공사 현장 보면 섬찟해지더라고."
-송경란, 당시 전농동 주민
꼬꼬무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된 것들이 그 상황이 끝난 뒤에도 심리적으로 내재돼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요."
-유영우, 당시 행당동 주민
꼬꼬무

"가끔씩 꿈에 나타나요 지금도. 꼭 트라우마 같은 거예요. 그게 아직도 나타나요."
-이희재, 당시 인근 주민

임종진 작가는 철거 용역들의 강압적인 폭력에 한없이 무너지는 사람들을 보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너무 괴로웠대. 이후 여러 현장들의 어려운 상황을 기록하며,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어.

2025년 8월. 그가 다시 서울 용산구 도원동을 찾았어.
꼬꼬무

"한 25년, 26년 이렇게 만에 오니까.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이 아프고 짠하고 그랬어서, 오기가 약간 그랬었거든요. 그때의 기억 속에. 여기에 세월들이 쌓여있고, 지금도 저기 보면 빨래들이 널려 있잖아요. 이런 것도 정겹기도 하고. 아 여기에 또 이렇게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이어가고 있구나…"
-임종진, 사진작가

그래서 그는 단순히 기록으로 머무는 사진이 아닌, 사진으로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전문 사진 심리 상담가가 됐어. 이젠 '사연 전달자'에서, '사진 치유자'가 된 거지.

철거촌의 참담한 그날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게 했고, 누군가에겐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지. 이 모든 이야기에 대해, 구 적준 용역, 현 다원 측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어. 그리고 너무 늦었지만, 과거 철거민들에게 저지른 짓을 사과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봤어. 뭐라는 답변이 왔을까.

답변은 무응답.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어.

27년 전 발간된 철거 범죄 보고서. 철거민들을 상대로 벌어진 범죄를 낱낱이 고발하는 보고서가 등장했지만,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어. 그럼 이 보고서는 실패한 걸까? 진실을 알려준 보고서. 27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보고서 덕분에 철거촌에서 벌어진 수많은 인권 유린과 잔인한 폭력의 실상에 대해 알 수 있었어. 인간의 권리를 짓밟힌 사람들의 고통과 울분도 기억할 수 있게 됐지. 그리고 다시는 이런 범죄가 일어나선 안된다는 다짐도 했어. 철거범죄 보고서의 머리말에 이런 글귀가 있어.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어떤 범죄도 영원히 숨길 수 있는 건 없어. 진실은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서. 끝내 드러나게 될 테니까.
꼬꼬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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