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바스를 달라. 그러면 휴전하겠다."
지난 15일 알래스카 회담에서 푸틴이 트럼프에게 던진 조건이다. 3년 반 전쟁의 휴전 조건으로 우크라이나 동부 핵심 지역의 완전 포기를 요구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트럼프의 반응이었다. "즉각 휴전"을 외치던 그가 푸틴의 제안을 젤렌스키와 유럽 정상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의 말대로 두 당사국이 담판으로 합의가 도출된다면 11년간 이어진 돈바스 전쟁의 운명이 갈린다. 50㎞ 철벽 요새를 두고 벌어진 혈투가 협상 테이블 위의 거래로 끝날 수 있을까.
11년간 뚫리지 않은 '철혈 요새'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 친러 분리주의 세력이 도네츠크·루한스크에서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며 내전이 시작됐다. 러시아는 이후 무력 개입을 확대했고, 2025년 현재 루한스크 전역과 도네츠크의 약 4분의 3을 장악한 상태다. 전체 돈바스 면적의 88%를 러시아가 점령했는데, 푸틴 대통령은 남은 12%까지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푸틴이 돈바스 전체를 고집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가 구축한 50㎞ '요새 벨트(Fortress Belt)' 때문이다. 슬로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코스챤티니우카 등 주요 산업 도시를 잇는 이 방어선은 참호·벙커·지뢰밭과 도시 지형이 결합한 철혈 요새다. 러시아군은 11년 동안 이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수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전력도 크게 소모했다. 워싱턴 전쟁연구소(ISW)는 "현재 추세라면 러시아가 이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알래스카 회담에서 떠오른 '돈바스 양도론'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푸틴 대통령의 제안을 젤렌스키 대통령과 유럽 지도자들에게 전달하면서 "푸틴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로부터 단순 휴전을 끌어내려는 시도를 중단하라"면서 "대신 돈바스 지역을 포기하면 러시아와 신속한 평화협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의 '즉각 휴전' 입장에서 사실상 선회한 것으로 평가된다.
"요새 벨트 포기는 재앙적 결과"
"돈바스를 장악하면 러시아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러시아계 주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침공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는 2014년부터 러시아가 괴뢰 정권을 세우고 지배해온 지역이라 통제가 쉽습니다. 이런 지역을 내주는 건 러시아의 추가 침공을 예고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크라이나 안보협력센터의 세르히이 쿠잔도 "도시 하나를 내주는 순간 방어선 전체가 붕괴된다"며, 도네츠크 방어선이 무너지면 전선이 80㎞ 밀려 서부 평야가 무방비로 드러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는 철도망과 도로망의 허브로, 이곳을 내주면 러시아군이 언제든 수도 키이우로 진입할 수 있는 침공로가 된다. 곧 전체 방어선이 무너질 수 있다는 의미다.

젤렌스키의 딜레마
하울렛 교수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상황도 짚었다.
"우크라이나 군대는 사실상 시민군입니다. 원래 군인이 아니었던 자원자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내주는 순간 '이 희생은 헛되지 않았는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는 또 "정부가 철수를 명령하더라도 많은 자원 부대들이 계속해서 돌아가 싸울 것"이라며, 어떤 합의도 강력한 안보 보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푸틴의 '제국 꿈'과 국제 질서의 시험대
하울렛 교수는 "도네츠크·루한스크 점령이 목적이었다면 2022년 전면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체를 영향권에 두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국제사회 역시 우려를 공유한다. 무력에 의한 국경 변경을 허용하는 순간, 다른 지역 분쟁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WSJ는 최근 사설에서 "푸틴의 요구는 일시적 휴전 뒤 재침공을 예고한다"고 경고했다.
운명의 순간을 맞은 돈바스
트럼프-푸틴 회담에 이어 열릴 3자 정상회담은 돈바스의 운명뿐 아니라 "힘에 의한 영토 변경을 국제사회가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다. 세계의 눈은 다시, 도네츠크의 50㎞ 요새 벨트에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