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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가사상까지 받았는데 왜 금지곡이 되었나…신화가 된 노래 '아침이슬' [스프]

[더 골라듣는 뉴스룸] 강헌 음악평론가
아침이슬7월 21일은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죠. '김민기 1주기'를 맞아 '아침이슬'이 실린 김민기 1집이 LP로 복각 발매된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음악평론가 강헌 씨와 함께 '아침이슬'에 얽힌 기억들을 이야기해 봅니다. 발표 당시엔 아름다운 노랫말로 서울시에서 주는 상까지 받았던 곡이, 어쩌다 금지곡이 되었을까요. 김민기 개인의 노래가 우리 모두의 노래가 된 과정, '아침이슬'이 시대의 상징이 된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최영아 아나운서 : 저는 김민기라는 이름보다 '아침이슬'을 먼저 알았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인 86년인 것 같은데 미술 수업 시간이었어요. 머리가 길고 안경을 낀 멋쟁이 선생님이셨는데 어느 날 교실 문을 딱 닫더니 칠판에 '아침이슬'을 쓰고 노래를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따라 부르게 하는데 큰소리를 못 내게 조용조용하게 부르고, 위험한 짓이죠. 그러면서 절대 이 노래는 너희만 알고 있고 집에 가서도 부르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알게 됐고 그다음에 김민기 선생님의 이름을 알게 됐는데, 왜 이 노래가 당시에 금지됐는지, 또 선생님께서 왜 밖에 나가서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했는지를 몰랐던 거예요. 금지를 왜 시킨 거예요?

강헌 음악평론가 : 이 노래는 굉장히 아이러니합니다.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됐을 때부터 금지곡은 아니었고, 오히려 서울시에서 주는 아름다운 가사상까지 받았어요. 요즘으로 치면 건전가요. 사실 김민기의 가장 위대한 음악적인 성취는, 김민기 선생이 1951년생이에요. 해방 후 세대, 일본어 교육을 받지 않은 첫 번째 세대였고 식민지성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세대였죠.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의 울림을 음악으로 만든 사람이에요. 우리는 김민기가 가지는 사회성에만 집착을 하는데 사실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아름다운 우리말의 음악적 울림이 김민기가 추구한 미학적 본질입니다. 그래서 외래어라든지 한자의 사용도 최대한 자제했어요. 

'아침이슬'은 1971년 6월 30일 양희은 1집으로 처음 발표됐어요. 근데 많이 팔리지 않았습니다. 성공하지 못했어요. 4개월 뒤인 71년 10월 21일에 김민기의 목소리로 김민기 1집이 발표됐는데 더 안 팔렸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그냥 사라지는 노래였을 겁니다. 대중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가수로 두 사람 다 끝날 상황이었는데, 그다음 해인 72년 봄, 학기 초에 대학교 OT를 하잖아요. 김민기도 당시 서울미대생이었으니까 신입생들을 상대로 자기 노래를 가르쳐 준 거예요. 마치 그 중학교 미술 선생님처럼.

그런데 개학하자마자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됐는데, 학생들이 '아침이슬'을 시위하면서 부른 거예요. 그러니까 경찰이나 당시 중앙정부에서 '무슨 노래야? 판으로 나왔네' 그래서 연행됩니다. 그래서 조사받고 '저는 가수인데요. 그냥 노래 가르쳐 준 것 밖에는 없고, 걔들이 나가서 부르면 내 잘못이 아니잖아요'

최영아 아나운서 :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강헌 음악평론가 : 사실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는 시위용 노래가 아닙니다. 그냥 젊은 지식인의 고뇌를 담은 노래가 졸지에 불온한 체제 비판적인 노래가 되고, 그런 시각으로 보면 다른 노래들도 다 그렇게 보이죠. '좀 이상해' B면 첫 번째에 '길'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사실 이 노래는 조금 의도가 들어가긴 한 것 같아요. 가사가 '여러 갈래길 누가 말하나 이 길 뿐이라고' 독재 정권에 대한 메타포잖아요. '알고 보니까 아주 나쁜 놈이야' 그래서 일단 방송 금지가 됩니다.

긴급조치 통보가 발효됐을 때는 아예 김민기라는 이름이 들어간 모든 곡. 이전에는 문제가 되는 곡만 금지곡을 시켰지만, 75년에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면서 이른바 금지곡 파동이 일어나는데, 외국 노래도 마찬가지였어요. 밥 딜런 등 이 사람의 모든 것, 사랑 노래를 부르든 자연을 예찬하는 노래든 상관없어요. 이렇게 암흑의 시대로 들어가게 되고 아무것도 발표할 수도, 누구를 통해서 부르게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됩니다.

최영아 아나운서 :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이 들어요.

강헌 음악평론가 : 어찌 보면 '아침이슬'은 김민기 개인의 독백이었지만 70년대 초반 한국의 20대 대학생들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킨 거예요. '이건 내 마음이야, 나의 노래야' 여기에 제4공화국 정부가 조연으로 신화를 만든 거죠. 만약 모른 척하고 가만히 놔뒀으면 묻히고 잊히거나 극소수의 마니아들만 좋아하는 노래로 끝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최영아 아나운서 : 그런데 그 생명력이 지방에 있던 소녀가 알 정도로 끈끈히 이어져 온 거고.
아침이슬

강헌 음악평론가 : 중세 시대 때부터 모든 수도원이 매달 금서 목록을 발표하거든요. 젊은 수도사들이 읽어서는 안 되는 책, 이단적인 책들. 말 안 하면 모를 텐데 '이거 읽지 마' 그러면 '뭐가 있길래 읽지 말라는 거야' 그게 바로 베스트셀러 목록이에요. 어찌 보면 유신 정권이 김민기라는 이름을 더 신화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 아닌가.

이 '아침이슬'이 가장 위대했던 순간은 바로 최영아 아나운서님이 노래를 배운 그다음 해인 87년 6월 항쟁 때, 저는 현장에 있었어요. 이한열의 운구가 연대 앞에서 시청 앞으로 가는데 약 100만 명의 인파가 연대 앞부터 이대 앞으로 해서 아현동 고개를 지나서 광화문으로 가는 거리를 사람들이 다 메웠어요.

제가 이대 앞 사거리 육교 위에 올라가서 보는데, 사람이 길을 가득 메웠으니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갈 거 아닙니까? 누구의 선창인지는 모르겠는데 '아침이슬'을 부르기 시작한 거예요. 근데 저 앞에서 부르는 것과 이쪽 1km 떨어진 뒤가 같이 부를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마치 돌림 노래처럼. 저는 그 육교에서 들으니까 저쪽에서는 '나 이제 가노라' 하는데 여기는 '긴밤 지새우고' 이런 식으로, 100만 명이 노래 하나를 부른다고 상상해 보세요.

최영아 아나운서 : 저 지금도 전율이...

강헌 음악평론가 : 그거를 녹음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에요. 스마트폰만 있었어도 녹음했을 텐데.

그리고 개인적으로 기억나는 장면은, 제가 81학번이에요. 제5공화국 시작 후 처음 입학했는데 학교에서 관제 축제, 파트너를 데리고 와서 쌍쌍 파티를 한다고. 대운동장에 엄청나게 큰 무대를 만들고, 락 밴드들인데 그때 최고 인기 있었던 홍서범 씨의 '옥슨80'. 근데 학생들은 관제 축제를 거부하는 입장이니까 학생관 앞에 5천 명이 모여서 따로 집회를 하고 대운동장 쪽으로 축제를 무산시키기 위해서 가는데.

뭔가 일이 크게 일어날 것 같아서 대운동장 스탠드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5천 명 대열이 대운동장 입구로 들어오는 거예요. 무대 위의 밴드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시작인 줄 알고 '불놀이야'의 전주가 시작되고, 정면에서는 5천 명의 학생들이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들어오는 거야. 그 5천 명의 목소리가 이 앰프의 소리를 덮어버립니다. 사실 무대 위의 밴드들은 무슨 죄예요. '이건 무슨 상황이지? 연주를 해야 돼, 말아야 돼' 하는 순간 '와' 하면서 그 무대를 다 부숴버렸어요. 

저는 스탠드 위에서 보고 있었는데 느낌이 뭔가 이상한 거예요. 보니까 전투 경찰들이 다 포위했어요. 학생들을 딱 가두고 최루탄을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난사하는데, 그 5천 명 가까운 애들을 전부 연행했어요. 남자애들 전부 군대 보내고, 강제 징집이죠. 그런 무시무시한 사건의 도화선을 만드는 노래가 '아침이슬'이었습니다.

최영아 아나운서 : 중요한 순간들마다 '아침이슬'이라는 노래가 있었기 때문에.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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