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통상교섭본부에 있을 당시 한·미 FTA, 한·유럽연합(EU) FTA 협상과 비준 과정에 참여했고, 주제네바 대사를 지내면서는 WTO에서 이루어지는 다자 간 통상 협상에 한국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최 전 대사는 자신의 경력을 군대의 '보병'에 가깝다고 설명했는데, 그만큼 실전 경험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한국 시간으로 24일 저녁 9시, 미국의 관세 정책 관련 한·미 협의가 열린다. 정부는 이번 만남이 협상이 아닌 '협의'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 이번 협의는 미국 측 요청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번 만남에서 뭔가를 결정하기보다는 의견을 교환하는 데 집중하고, 우리가 요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사실 미국의 관세 정책은 우리 입장에서 황당한 조치다. 한·미 FTA로 한·미 상호 간의 관세율은 0%에 가까운데, 미국은 한국에게도 일방적으로 10%의 보편관세를 부과했다. 그러고서는 상호관세 15% 추가를 발표했다가 90일간 적용을 유예했다. 지금은 마치 한·미 간의 관세가 원래 25%였고, 한국이 뭔가를 내놓으면 관세율을 낮춰주겠다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길 가던 사람에게서 1천 원을 뺏은 후 500원을 돌려주면서 마치 자기 돈 500원을 주는 것처럼 선심 쓰듯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 중 거의 유일하게 경제가 큰 폭으로 성장하고 있는 시장이 미국이다. 포기할 수 없는 곳이다 보니 대부분의 국가가 울며 겨자 먹기로 협상에 임하고 있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단합한다면 미국에 대응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죄수의 딜레마'가 지배하는 곳이라는 걸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들이 알고 있다. 각자도생의 국제 관계 속에서 이번 '협의'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최석영 전 대사에게 물었다.

- 미국의 관세 조치가 결국에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라고 많이들 이해하고 있는데, 지금은 미국이 좀 더 급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은 미국이든 중국이든 시간 여유가 별로 없다. 고관세 상태가 장기화되는 건 미국이든 중국이든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서 치킨게임이 지금 시작돼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데, 역설적으로 긴장이 고조될수록 협상하기에는 좋은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본다. 중국 입장에서도 고관세가 유지되면 미국 수출 자체가 안 되지 않겠나. 미국하고 중국이 굉장히 큰 긴장을 조성한 다음 어떤 식으로든지 타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한국을 포함한 5개국에 대한 우선 협상 발표는 미국이 중국에 대한 공세 수위를 올리던 와중에 나왔다. 이것도 미국이 급해 보이는 상황과 관련 있다고 봐야 하나.
"5개국에 대한 협의는 미국이 우방국의 협조를 구하는 상황이라고 본다. 근데 협조를 구하는 강압적인 측면이 굉장히 강하지 않나? 우방국하고 동맹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건 사실 미국의 신뢰라든가 이런 것을 잃을 수 있다고 본다. 일본과 한국 등 이런 우방국들과 협상하면서도 투명한 협상이나 규칙이 있는 협상을 추진하지 않고, 굉장히 불확실한 상태에서 상대국을 압박하는 형태가 지금 반복되고 있지 않나. 지금은 정상적인 협상의 구도라고 보기 어렵다."
- 그렇지만 뭔가 논의를 진전시켜야 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미국은 초강대국이고 한국과 일본은 상대적 약소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에게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굉장히 인접해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국제 통상 질서의 긴장감이 장기화되면 우방국인 미국, 거대 시장인 중국 사이에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합의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러나 빨리 합의한다는 게 최상의 방식이 될 수는 없다. 협상을 하면 크게 세 개의 전선이 형성된다. 양국이 마주하는 협상장과 각국의 국내 정치다. 세 개 전선을 충족하지 않는 협상 결과는 언제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은 대선 정국이기 때문에 국내 이해당사자들의 불만이 제기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미국이랑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그게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 한국은 6월 3일 대선이 예정돼 있고, 지금은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이다. 정부가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 우리 정부는 어떻게 협의에 임해야 할까.
"우리 입장에서는 상호관세 90일 유예 조치는 일단 시간을 번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상호관세와 별개로 철강과 자동차에 대한 품목별 관세는 이미 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은 상호관세 협상도 중요하지만, 이미 발효된 품목별 관세에 대한 축소 내지 인하, 면제 또는 유예 같은 협상이 굉장히 시급하다. 지금 협의단은 대선이 예정된 상태에서 미국에 가는 것이라 굉장히 부담이 클 것이다. 현재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조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미국의 요구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다음 정부로 결정을 넘기더라도 시간적 여유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 트럼프 대통령이 이야기한 '원스톱 쇼핑'의 논의 대상, 향후 일정 등 내용 파악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현재 미국의 진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미국이 한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핵심적으로 요구하는지, 그리고 또 무엇을 우리에게 줄 수 있는지 아주 허심탄회하게 파악하는 것이 이번 협상단의 최대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한·미 FTA로 비관세 장벽도 거의 없고, 관세율도 낮아서 다른 국가에 비해 불리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성급하게 뭔가 양보하고 협상을 타결할 필요가 없다. 미국의 압박에 못 이겨 협상을 먼저 타결하는 곳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러면 그것을 참고할 수도 있다.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라는 현재 정치 상황을 설명하며 시간을 벌 수도 있다."
- 한국의 정치 상황이 협의의 일종의 지렛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우리 협상 대표는 국내의 이런 복잡한 정치 상황, 그리고 협상 대표가 컨트롤할 수 없는 국내 정치 상황을 미국 협상 대표에게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가는 정부의 관료가 책임을 다 지고 협상을 해나갈 수는 없다. 협상 대표가 양보하기 어렵거나 양보하기 싫을 때 국회의 핑계를 댈 수도 있는 것이고, 국내 여론의 핑계를 댈 수도 있다. 특히 지금 한국과 같은 (정치) 상황은 핑계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우리가 당면한 도전 요인 아닌가? 이런 부분은 설명을 잘하면 이해시킬 수도 있다. 협상장에서는 강대국이 모든 힘과 에너지를 이용해 약소국을 압박한다. 그에 대응하려면 국내 정치와 정부 내부에서 확고한 입장이 정립되어 있어야 하는데, 권한대행 체제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 우리 협의단에 대한 당부나 조언이 있다면.
"미국이 강국이고 우리나라가 상대적 약소국이기는 하지만, 협상장에 나갈 때는 미국을 압박할 수 있는 카드를 속으로 가지고 가야 한다. 현재 협상 구도가 불리하지만, 방어적인 태도로만 협상해서는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걸 다 못 얻는다."
최 전 대사는 과거 웬디 커틀러 미 USTR 부대표와 한·미 FTA 관련 협상을 진행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의 쌀 시장 개방을 촉구했다. 쌀 시장은 교역액으로만 보면 크다고 할 수 없는 시장이지만, 식량 주권이 걸린 문제이면서 수많은 농민의 생계가 걸린 문제로 국내 정치적으로 예민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이에 대해 최 전 대사는 미국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일화를 소개했다.
"협상을 할 때 미국에게 '우리 농산물 시장은 국내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하니까 좀 봐달라' 이렇게 말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협상 상대방도 협상 결과를 자국에 가서 설명해야 하는데, 쌀 개방을 압박했지만 한국이 너무 민감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당시 우리는 미국이 가장 민감해하는 부분을 함께 건드렸다. 미국에는 '존스법'이라는 것이 있다. 미국 내의 항구를 오가는 선박은 미국에서 건조돼야 하고, 미국인이 소유·운항해야 해상 운송을 허가하는 법이다. 당시 우리 협상단은 존스법을 폐지할 수 있다면 우리도 쌀 문제를 한 번 검토해 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양측은 두 가지 문제는 언급하지 말자는 암묵적 합의가 형성됐다. 그런 식으로 압박을 해야 한다."
최 전 대사는 이번 협의에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가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이고, 대선 후 어떤 방향을 가진 정부가 들어설지 모르는 상황에서 협상 대표는 굉장히 신중하게 협상에 임하고 성급하게 타협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최 전 대사의 이 말은 기대라기보다 당부에 더 가깝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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