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일 노인 택배원이 의뢰인을 만나 물건을 전달받고 다음 행선지를 휴대전화로 검색하고 있다.
서울, 경기는 물론 천안까지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다면 365일 언제 어디든 '타고' 갑니다.
모두 65세 이상 '노인'으로 지하철을 탈 때 요금을 내지 않습니다.
오토바이 퀵 택배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지만 이용 요금이 적다는 게 장점입니다.
고령화 시대, '지하철 택배 특공대' 실버 택배원들의 일상입니다.
지난 2일 오전 8시 서울 중구 오장동에 위치한 '실버퀵' 지하철 택배 사무실에 이른 아침부터 노인 열댓 명이 전화기가 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칠판에는 출근 순서에 따라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지하철 택배 3년차인 최 모(75) 씨는 "까치산역에서 5시 52분 첫 차 타고 출근해도 2등으로 도착했다"고 말했습니다.
배 모 실버퀵 대표는 "배달 의뢰가 오면 선착순으로 일이 배치되다 보니 직원들이 일찍부터 출근해 일감을 기다린다"며 "요즘 경기가 안 좋아 일감이 줄었다. 하루에 보통 50~60건 정도 배달 요청이 들어온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4월은 '마의 계절'이라 유독 배달 건수가 적은데 생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 걱정"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어르신 배달원'이 30명 남짓 일합니다.
최고령자는 15년 차 '베테랑' 배달원 백 모(87) 씨입니다.
매일 인천에서 오전 5시 37분 급행 첫차를 타고 6시 30분에 출근한다는 1년차 배달원 최 모(71) 씨는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첫 일감을 받았습니다.
반포역으로 가 서류 봉투를 받아다가 개봉역 인근 아파트에 전달하는 일입니다.
가방에 물건을 묶을 노끈과 물, 비상식량인 빵을 챙겨 3시간 거리의 여정에 나섰습니다.
역에서 역으로 이동하는 쉬운 경로에 가벼운 서류봉투를 배달하는 일로 시작하면 운수 좋은 날이라고 최 씨는 설명했습니다.
그는 지하철 계단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며 "엘리베이터는 무슨, 직업이 퀵 배달인데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충무로역 개표구에 교통 카드를 찍자 '우대권'이라는 글자가 선명했습니다.
3호선 지하철 경로석에는 이미 사람이 꽉 차 있었고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지하철 손잡이 아래에 섰습니다.
일반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쳐다볼 뿐 비켜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30분가량 서서 이동한 최 씨는 "은퇴 전엔 사무직으로 일하면서 평생 차로 이동하지 걸어 본 적이 없다"면서 "나이 들어 운동하기가 쉽지 않은데 하루에 1만 보 이상 걸으면서 당수치도 낮아지고 건강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오전 11시 반포역에서 의뢰인을 만나 전달할 서류와 택배비 1만3천 원을 건네받았습니다.
이중 회사에 30% 수수료를 내고 얻는 삯은 9천 원 남짓입니다.
한 달 수익은 평균 70만~80만 원으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지만 꼭 돈 때문에 일하는 건 아닙니다.
최 씨는 "임대료와 연금 받아 아끼며 살 수도 있지만 집에서 마냥 노는 것은 못 할 짓"이라면서 "일하면서 여윳돈 벌고 건강도 챙기니 안 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2025년 기초연금은 단독가구 기준 월 최대 34만 2천510원입니다.
무엇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다른 직장을 찾아봐도 지하철 택배 말고 노인을 불러주는 데가 마땅히 없다는 게 그의 설명입니다.
서류가 구겨지지 않게 가방에 잘 넣고 개봉역으로 이동해 그의 첫 번째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마침 빈 자리에 앉아 익숙하게 휴대전화로 유튜브를 틀었습니다.
실버 택배원들이 배달하는 물품은 서류, 전자기기, 꽃다발, 유골함, 영정사진까지 다양합니다.
배달료는 서울에서 1시간 이내 거리면 1만 3천 원, 경기도는 2만~3만 원, 천안 등 원거리는 3만~4만 원 선입니다.
서울 시내 기준 3만 원에서 시작하는 오토바이 퀵 택배 요금에 비하면 저렴한 편입니다.
지하철 요금을 내지 않는 노인들이 배달하는 덕분입니다.
근조기도 배달합니다.
학교나 단체, 정치인들이 깃발을 사무실에 맡겨두고 장례식장에 설치하도록 의뢰하는 식입니다.
요금은 서울 시내 기준 3만 원대입니다.
오전 8시 반부터 사무실에서 대기 중이던 여성 배달원 A씨는 "친구들은 집에서 손주·손녀 보면서 허리 다 나간다고 하더라"면서 "외향적인 성격은 집에 있으면 근질거리고 내가 행복한 게 최고"라고 말했습니다.
65세가 되자마자 반찬값 보태려고 일을 시작했다는 A씨는 현재 2달차 막내 배달원입니다.
A 씨는 "노인들이 스마트폰 이용 못 한다는 것도 편견"이라며 "보조 배터리 들고 다니면서 지도 앱 들여다보고 정확하게 배달한다"며 웃었습니다.
콜을 기다리는 동안 택배원들은 고물가 시대의 고충을 토로했습니다.
염색 가격이 6천 원 하는 이발소를 추천하는가 하면 맥주 한 캔 사 먹기도 겁난다는 대화가 오갔습니다.
일감을 기다리던 한 노인은 "하루에 힘들게 3만 원 벌면 맥주 사 먹기도 겁이 난다"면서 "돈이 곧 시간이고 고생스러운 걸 아니까 아깝다"고 말했습니다.
2년째 실버퀵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배달원 B(69) 씨는 "평일에도 갈 곳이 있다는 게 큰 위안이고 적은 돈을 벌더라도 책임감 느끼고 일하게 돼 좋다"며 "노인정은 가기 싫고 집에 있어 봐야 입에 곰팡이 피니까 택배 일하면서 사람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어려움도 있습니다.
특히 5월 가정의 달은 대목이지만 꽃이나 케이크의 경우 배달하기가 까다로워 골치 아프다는 것입니다.
B 씨는 "노인이긴 하지만 경계에 선 나이라 경로석에 앉기도 눈치가 보인다"면서 "훼손되면 안 되는 물건을 끌어안고 만원 지하철에 서서 이동하다 보면 짐짝이 된 기분이 든다"고 토로했습니다.
낮 12시 30분 두 번째 일감을 받은 최씨는 강남역에서 의뢰인을 만나 노트북 2대를 건네받고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오후 1시가 지난 시간, 그의 휴대전화에는 이미 8천54보 걸었다는 기록이 찍혀 있었습니다.
다행히 이날 배송할 노트북 2대는 그리 무겁지 않고 의뢰인이 종이봉투에 담아줘 운반하기 수월했습니다.
하지만 부피가 크고 무거운 물건이 걸리는 날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날 하루 똥 밟았다 생각한다"며 그는 웃었습니다.
15kg짜리 기계를 남양주까지 배달한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무게에 따라 운임은 추가됩니다.
최 씨는 "은퇴 전에 직장에서 평생 스트레스 받다가 이제는 의뢰인이 몇천 원이라도 팁이나 음료 쥐여주면서 고마워하는 일을 하다 보니 오히려 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두 번째 배달 임무를 완수한 뒤 구로디지털단지역에서 회사로 복귀한다고 대표에게 메시지를 남기자, 몇 분 후 근방 신도림역에서 시청역까지 배달하는 주문이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번에도 서류 배달이었습니다.
이에 최 씨는 "복귀하는 길에 가까운 곳에서 운 좋게 의뢰가 들어오면 생큐"라면서 "세상살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것 같다"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세 번째 배달까지 완료하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오후 4시였지만 최 씨는 또 다음 일감을 기다렸습니다.
"남양주에 배달 갔다가 막차 타고 귀가한 적도 있는데 그러다가도 볼 일 생기면 자유롭게 쉴 수도 있어 좋아요. 죄짓는 일도 아니고 부끄럽지도 않으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생각입니다."
배달 한 건당 평균 세 시간 정도 소요되니 아침 일찍 나와 3~4건 업무를 처리하고 저녁쯤 귀가하는 게 지하철 택배 노인 배달원의 하루입니다.
그렇게 번 일당은 3만 원 안팎입니다.
한 실버퀵 의뢰인은 "어르신 분들이 집 앞까지 와주시고 항상 친절하다"며 만족해했습니다.
또 다른 의뢰인은 "인터넷 검색하다 노인 택배를 알게 된 이후로 용돈벌이하시라고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서울시민 절반 이상이 70대부터 노인으로 여긴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서울시가 시민 5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지난 9일 발표한 '2024 서울서베이 도시정책지표조사'에 따르면 노인 기준 연령에 대한 응답은 평균 70.2세로 조사됐습니다.
노인 기준 연령을 상향하면 지하철 무임승차 연령 상향도 불가피합니다.
실버퀵 배 대표는 "65~70세 직원이 제일 많고 이 연령대가 택배 일을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텐데, 만약 무임승차 연령이 상향되면 앞으로 입사 나이는 더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B 씨(2년 차 노인 배달원)는 "노인 인구는 점점 늘 텐데, 젊은 세대들은 본인이 노인이 될 거란 생각을 못 하는 듯하다"면서 "옛날에는 지하철에서 자리를 비켜주고 짐도 들어주는 게 미덕이었는데 세상이 점점 각박해져 간다"고 아쉬워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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