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최근 삼성 임원들에게 "삼성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에 직면했다"며 '독한 삼성인'을 주문한 것을 두고 재계 안팎에서는 최근 삼성을 둘러싼 복합 위기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국내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가 고대역폭 메모리(HBM) 납품 지연으로 경쟁사에 밀리며 삼성이 자부해 온 '초격차 경쟁력'이 무색해졌고, 글로벌 경기 침체 장기화와 도널드 트럼프 2기 출범 등으로 삼성 앞에 놓인 경영 환경이 그 어느 때보다 짙은 안갯속에 처해있기 때문입니다.
오늘(17일) 재계에 따르면 이 회장은 전 계열사의 부사장 이하 임원 2천여 명을 대상으로 순차적으로 진행 중인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을 통해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며 "'사즉생'의 각오로 위기에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교육에서 공개된 이 회장의 메시지에는 "중요한 것은 위기라는 상황이 아니라 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라며 "당장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영상에 직접 등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 회장이 '생존의 문제' '사즉생' 등을 언급하며 위기를 진단하고 임원을 강하게 질책하는 메시지가 대외에 알려진 것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입니다.
특히 교육 참석자들에게 나눠준 크리스털 패에 새겨진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 문구가 삼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 회장의 의중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 위기론'이 제기되며 이 회장이 사장단 회의 등 여러 자리에서 이런 내용을 수차례 강조해온 것으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이 회장은 앞서 지난해 11월 25일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최근 들어 삼성의 미래에 대한 우려가 매우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저희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녹록지 않지만, 어려운 상황을 반드시 극복하고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현재 삼성은 말 그대로 복합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실제로 임원 대상 세미나에 강연자로 나선 한 외부 전문가는 "예전에는 '삼성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이제는 전 국민이 삼성을 걱정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 부진으로 휘청거리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은 15조 1천억 원으로, SK하이닉스(23조 4천673억 원)에 크게 못 미쳤습니다.
인공지능(AI) 시장 확대로 고부가 제품인 HBM이 급부상한 가운데 선제 투자로 HBM 시장을 선점한 SK하이닉스가 사상 최대 실적을 쓰며 고공행진하는 동안 HBM 투자에 실기한 삼성전자는 HBM 납품 지연 등으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탓입니다.
여기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은 수조 원대의 적자를 내며 글로벌 1위 업체인 대만 TSMC와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의 작년 4분기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전 분기 대비 2.4%포인트 상승한 67.1%를 기록했습니다.
반면 삼성전자는 같은 기간 9.1%에서 8.1%로 하락했습니다.
이에 따라 두 회사의 격차는 지난해 3분기 55.6%포인트에서 4분기 59%포인트로 확대됐습니다.
TSMC가 최근 엔비디아·AMD·브로드컴·퀄컴 등에 경영난에 빠진 인텔에 대한 공통 투자를 제안한 가운데 실제로 이 같은 방안이 실현될 경우 TSMC의 시장 지배력은 더 커질 가능성도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반도체 관세 부과 방침과 반도체법 보조금 폐지 움직임이 있는 것도 부담입니다.
삼성전자는 현재 건설 중인 미국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에 오는 2030년까지 37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로 하고 미 상무부와 지난해 말 47억 4천500만 달러(약 6조 9천억 원)의 직접 보조금 지급 계약을 체결했으나, 경우에 따라 약속한 보조금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커진 상황입니다.
여기에 햇수로 10년째 이 회장의 발목을 잡아 온 사법 리스크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다는 점도 삼성의 불확실성을 키우는 요인입니다.
부당합병·회계부정 의혹으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1·2심 모두 무죄가 선고되기는 했지만 이후 검찰이 대법원에 상고함에 따라 이 회장은 대법원의 결정을 예의주시하며 '로우키'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회장은 항소심 무죄 선고 하루 만에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등과 'AI 회동'을 하면서 글로벌 네트워크를 재확인했으나, 이후로는 별다른 공개 행보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재계 관계자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등으로 이 회장의 역할에 거는 기대가 커지고 있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당분간은 '로우키'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삼성 내부적으로는 위기 극복을 위한 고삐를 죄며 초격차 경쟁력 회복에 시동을 걸고 있습니다.
삼성은 지난해 말 인사에서 복합 위기 타개 방안 중 하나로 삼성글로벌리서치 내에 경영진단실을 신설했습니다.
삼성전자 미래전략실 출신 최윤호 사장이 맡은 경영진단실은 출범 후 처음으로 지난 1월 반도체 설계를 담당하는 시스템LSI 사업부에 대한 경영진단에 착수했으며, 이후 다른 사업부에 대한 경영진단에도 나설 전망입니다.
지난해 말 신설한 미래로봇추진단도 인력을 충원하며 휴머노이드를 비롯한 미래 로봇 기술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레인보우로보틱스와의 기업결합을 승인하며 로봇 사업 추진에도 탄력이 붙은 상태입니다.
앞서 한종희 대표이사 부회장은 연초 기자간담회에서 "이 회장이 '세상에 없는 기술' 화두를 던졌는데 그 제품이 아마 올 하반기부터 시작해 내년도에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사업부별로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HBM의 경우 5세대 HBM인 HBM3E 개선 제품을 1분기 말부터 주요 고객사에 공급하고 2분기부터 본격적으로 공급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6세대인 HBM4는 올해 하반기 양산이 목표입니다.
삼성전자는 이사회에 반도체 전문가 3명을 보강하기로 하고 오는 19일 열릴 주주총회에 이사 선임 안건을 상정할 예정입니다.
삼성SDI와 삼성디스플레이 등 전자 계열사도 지난해 말 인사에서 '기술통'을 전진 배치했습니다.
재계 안팎에서는 삼성의 경쟁력 약화 원인 중 하나로 그룹 차원의 컨트롤타워 부재를 꼽히는 만큼 그룹 컨트롤타워 부활 논의가 속도를 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댓글 아이콘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