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교육 학원
'9+99+999+…+99999999999999999999(9가 20개). 다음을 계산한 결과에 숫자 1은 몇 개 들어있을까요'
유명 초등수학학원의 2019학년도 초등과정 선발시험(레벨테스트) 문제 중 하나입니다.
이후 연도의 학원 기출문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현재는 난도가 더 올라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입시 1번지'로 불리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일부 영어학원에서는 7세 반 교재로 미국 초등학교 3∼4학년 교과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해당 학원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유치원생 때부터 학원을 보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교육 연령이 점차 낮아지고 과열되고 있지만, 정부는 정확한 실태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23일 교육계에 따르면 유명 영유아·초등학생 대상 학원의 레벨테스트를 지칭하는 '4세 고시', '7세 고시'란 말은 이제 낯선 얘기가 아닙니다.
코미디언 이수지 씨가 대치동 엄마를 패러디한 '제이미맘' 영상은 공개 약 2주 만에 조회수가 580만 회를 넘어섰습니다.
동의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영유아 사교육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최상위권 초등학생이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초등수학학원의 예비 초3·4학년용 레벨테스트 문제는 중·고교 수준으로 파악됐습니다.
일례로 '오빠가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지금의 네 나이일 때 너는 9살이었지. 네가 내 나이가 될 때 나는 24살이 될 거야." 그러면 지금 오빠와 동생의 나이는 각각 몇 살일까', '2분 동안 1m를 가는 거북이와 10초 동안 2m를 가는 토끼가 30m 달리기 경주를 한다. 토끼가 경주 중간에 잠이 들어 거북이보다 3분 늦게 결승점에 도착했다. 토끼는 얼마 동안 잠을 잔 것일까' 등은 초등학생 수준에선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심지어 '장훈, 해동, 유미, 태곤, 현석의 성은 김, 이, 박, 정, 편 중의 하나이다. 다음 [조건]이 모두 거짓일 때, 다섯 명의 이름에 맞는 성을 바르게 써라'는 문제는 삼성 직무적성검사(GSAT) 추론영역에서 나온 문제와 유사하다고 김상우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교육걱정) 책임연구원은 분석했습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배울 수 있는 내용이 아닌 만큼 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선행학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서울의 한 공립고 수학 교사는 "문제 구성이 빌드업(buildup) 없이 1번부터 상(上)급 난도"라며 "중·고교 수학 개념을 슬쩍 숨겨놓고 이를 어린이 언어로 풀어놓은 상황"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영어 사교육은 나이대가 더 내려갑니다.
통상 어린이집을 졸업하는 3∼4세부터 영유아 대상 영어학원(영어유치원)에 보내기 때문입니다.
맘카페 등에선 미국 초등학교 학년별 문제집인 '스펙트럼 테스트 프랙티스'(Spectrum Test Practice)를 대치동 '빅3' 영어학원 레벨테스트 대비용으로 추천하기도 합니다.
김한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 정책국장은 "초등학교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알아야 할 영어단어는 800개인데 해당 교재에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 단어가 매우 많다"며 "중학교 2∼3학년 때 다루는 현재완료형, 현재완료진행형 문장도 많이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초등학생의 사교육 참여율은 86.0%입니다.
서울은 91.3%에 달했습니다.
과목별로 보면 영어 52.5%, 수학 50.5%, 국어 28.3%, 논술 15.6%, 사회과학 12.9%였습니다.
영유아 사교육 관련해선 공식 통계조차 없습니다.
2017년에 국가 차원의 첫 유아 사교육 실태조사가 있었으나 시험조사라는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2023년 6월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방치됐던 유아 사교육 문제에 대해 조속히 실태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따라 작년 관련 조사를 시행했으나 그 결과가 당장 공개되진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교육부 관계자는 "국가통계로서 마련이 돼야 공신력이 있어서 전 단계로서 작년에 사전조사를 했고 통계청과 본조사를 위한 논의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교육 전문가들은 과열되는 영유아·초등 사교육 시장을 우려하며 정확한 실태를 파악하고 이를 토대로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인 정혜영 서울교사노동조합 대변인은 "초등학교에서 처음 영어를 배우는 학생이 학원에서 선행한 친구를 만나면 얼마나 좌절할지 교사로서 마음이 안 좋다"며 "일부 학생은 선행학습 때문에 수업을 듣지 않는다"고 우려했습니다.
사교육걱정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학교급을 뛰어넘는 교육과정을 익히도록 부추기는 선행 사교육 경쟁 열풍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며 "아무런 규제가 없는 사교육 시장에 최소한의 법적 울타리를 마련해 선행 경쟁이 더는 폭주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TV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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