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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게 행운" 368일 행군 끝 도착한 곳...붉은 별들의 성지 됐다 [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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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대륙을 뒤엎은 공산혁명 성지의 '십삼춘추' - 산시·옌안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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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만 5천 리를 행군해서 우치현에 도착한 홍군 1군단
중국 공산당과 홍군(紅軍) 주력 부대는 1934년 10월 16일 밤에 장시(江西)성 위두(于都)현을 떠났다. 총연장 2만 5천 리를 행군해서 1935년 10월 19일에 산시(陝西)성 우치(吳起)현에 도착했다.

장정(長征) 기간 홍군은 11개의 성에 진주했고 700여 개의 시·현을 거쳤다. 18개의 고산을 넘었으며 24개의 강을 건넜다. 고산 중 5개는 해발 4천m에 달하는 설산이었다.

또한 인적이 없는 고지대 초원도 가로질렀다. 장정 중 235일은 주간 행군이었고 18일은 야간 행군만 했다. 나머지 115일은 싸웠거나 쉬었다.

옌안에 도착한 중국 공산당과 홍군의 지도자를 묘사한 동상
장정 중 국민당군과 38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이 중 15일은 행군이나 휴식 없이 하루 종일 전투만 했다. 따라서 행군한 날짜만 계산하면 홍군은 하루 평균 40km를 걷는 초인적인 강행군이었다.

이런 여정 때문에 장시를 출발했던 공산당과 홍군 8만 6천여 명 중 3천여 명만 산시에 도착했다. 여기에 장정 도중 보충한 병력 중 5천여 명까지 8천여 명이 산시 땅을 밟았다.

장정 중 사망한 당·군 간부는 430명에 달했고, 평균 연령은 30살이 조금 못 됐다. 368일의 장정은 살아남은 것이 행운인 고난의 행군이었다.

공산혁명의 성지 옌안을 상징하는 바오타산(寶塔山)과 옌허
장정은 공산당과 홍군이 우치현에 도착함으로써 끝났다. 하지만 우치에 머물렀던 기간은 짧았다. 얼마 뒤 바오안(保安)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1936년 7월 시안(西安)에서 기획된 손님이 찾아왔다. 미국의 진보적인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였다. 이 푸른 눈의 젊은이는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홍군의 심장에 숨어 들어갔다.

3개월여 동안 바오안에 머물면서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및 홍군 지도자를 만나 인터뷰했다. 스노우는 그들의 이야기를 이듬해 영국에서 책으로 출판했으니, 《중국의 붉은 별》이다.

옌안을 취재한 뒤 《중국의 붉은 별》을 출판한 에드가 스노우
《중국의 붉은 별》 덕분에 중국과 전 세계에서 수많은 공산당 추종자를 만들었다. 책에서 묘사한 홍군 지도자의 영웅담과 장정의 숨 막히는 스토리가 감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스노우가 바오안을 떠난 지 두 달 뒤인 12월에 시안사변이 일어났다. 공산당 토벌을 독려코자 난징(南京)에서 온 장제스(蔣介石)를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張學良)과 서북군 사령관 양후청(楊虎城)이 감금해 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내전은 중지됐고 2차 국공(國共)합작이 시작됐다. 본래 공산당이 산시에 도착했을 때 앞날은 불투명했다.

저우언라이가 양자링에서 묵었던 구야오식의 야오둥
그러나 바오안에서 운명이 뒤바꿨다. 1937년 1월에 공산당은 혁명 근거지를 옌안(延安)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옌안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공내전이 격화되는 1947년까지 홍색 수도로 명성을 떨쳤다. 공산당은 옌안에서도 거처를 여러 차례 옮겼다. 그중 양자링(楊家嶺)에서 1938년 11월부터 9년간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현재 양자링에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 등이 묵었던 야오둥(窯洞)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야오둥은 중국 황토고원(黃土高原)에만 있는 독특한 주거시설이다.

마오쩌둥이 자오위안(棗園)에서 묵었던 스야오식의 야오동
황토고원은 산시, 허난(河南), 산시(山西), 간쑤(甘肅) 등지에 분포된 해발 1~2천m의 진흙지대다. 수십만 년 전에는 수풀이 우거졌지만, 시간이 흘러 메마른 땅으로 변했다.

여기에 사막지대에서 불어온 모래가 황허와 빗물에 뒤섞여 단단한 진흙층을 형성했다. 그리고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주민이 굴을 파서 집을 지었다.

처음에는 계곡이나 산 밑에 구멍을 내어 모래를 퍼낸 뒤 물에 적신 황토를 발라 지었다. 이때 천장 격인 야오딩(窯頂)을 아치형으로 만들어 위에서 내리눌리는 압력을 분산시켰다.

야오둥 안에서 일하는 마오쩌둥을 재연한 모습
시간이 흘러 기술이 발전했고 야오둥도 변화했다. 외벽을 황토로 구운 벽돌로 쌓는 구야오(箍窯), 돌로 쌓는 스야오(石窯) 등이 개발됐다.

야오둥을 원용해 평지에 집을 짓고 지붕에 흙을 덮는 양식도 등장했다. 야오둥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기 때문이다. 야오둥 덕분에 공산당은 막대한 주거비를 아꼈다. 또한 자력갱생으로 당과 군을 정비했다.

마오쩌둥은 수시로 집회를 열어 당원 및 민중을 가르치고 의식화시키는 일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결국 1938년에는 당권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게 됐다.

공산당 7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던 양자링 중앙대례당
예부터 옌안은 산시 북부의 중심지였지만,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평균 해발은 1천200m에 달하고 주변은 온통 황토고원이다.

비는 여름에 집중해서 내려 봄에는 가뭄이 극심하고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만약 옌안을 가로지르는 황허의 지류 옌허(延河)가 없었다면, 수만 명을 헤아렸던 공산당 대식구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양자링에 있는 중앙대례당은 1942년 완공되어 1945년 4월 공산당 7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유서 깊은 장소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6차 대회 이후 17년 만에 개최됐다.

1945년 9월 조선군정학교의 전체 구성원이 옌안에서 찍은 기념사진
대회 결과 공산당은 당헌에 마오쩌둥사상을 삽입했고 당 조직 제도를 도입했다. 마오쩌둥사상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하되 중국 현실에 맞게 재창조한 혁명 사상이다.

특히 농촌을 혁명 근거지로 삼아 유격전을 전개하고 광범위한 통일 전선을 구축해 도시를 공략하는 전술이 채택됐다. 또한 모든 기관과 단체에 당 조직을 설치했다.

이로써 마오쩌둥 우상화와 '당이 곧 국가'라는 중국 사회주의 체제의 기초가 다져졌다. 옌안에는 적지 않은 조선인도 살았다. 뤄자핑(羅家坪)에 조선혁명군정학교가 개교했기 때문이다.

뤄자핑에 세워진 조선혁명군정학교와 조선항일의용군 기념비
군정학교는 조선독립동맹의 무장 조직인 조선항일의용군이 세운 독립투사 양성 터전이었다. 조선독립동맹은 1941년 허베이(河北)성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처음 성립했다.

1944년 4월 조선의용군은 옌안으로 옮겨왔고, 8월 학교 부지를 마련해 12월 개교했다. 오늘날 교사(校舍)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사라졌고 기념석만 세워져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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