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The Ugly American." 미 해군 출신 작가 윌리엄 레드러와 정치학자이자 소설가인 유진 버딕이 같이 쓴 정치 풍자 소설로 1958년에 발매돼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국내에도 "추악한 미국인"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됐지만, 지금은 절판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아시아에 파견된 미국 외교관들이 현지 문화를 얕잡아 보고 현지인을 무시하며 엘리트층하고만 교류해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문제를 날카롭게 그린 책입니다.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이 책을 감명 깊게 읽고, 국무부 직원들한테 필독을 권했다고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외교관들에게 필독을 권유한 건 그저 책이 좋아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냉전 초기 거의 모든 분야에서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누구 편도 아닌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소위 제3세계 국가에서 미국이 신망을 잃고 미움받는 건 냉전 구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평화봉사단(Peace Corps)이 탄생한 것도 케네디 대통령 때의 일입니다. 전 세계 곳곳에 미국인을 파견해 봉사활동을 벌이는 단체로, 특이한 점은 후원 주체가 미국 정부라는 점입니다. 그저 좋은 일 하는 걸 넘어 미국의 좋은 이미지를 심는 게 목적인 단체죠. 같은 시기에 생긴 또 다른 정부 단체가 바로 미국 국제개발처(USAID)입니다. 전 세계 여러 나라에 인도적 지원이나 자선 활동을 하는 단체인데, 특이한 점은 자금을 미국 정부가 댄다는 점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인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만큼 그저 좋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추악한 미국인"의 이미지를 "도움을 주는 좋은 친구"로 바꾼다는 목적 아래 움직이는 단체였습니다.
국제개발처는 도와주러 간 나라에 학교, 병원, 도로, 식수 시설 등 인프라를 짓고 구호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하며, 현지의 경제 개발을 지원합니다. 또 보건 및 질병 예방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합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미국을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늘리고, 미국과 가까운 사회를 만드는 게 목표였습니다. 무기와 군사력, 힘을 앞세운 '하드 파워'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마음을 얻는 '소프트 파워'를 추구하던 전략이었습니다. ('소프트 파워'라는 용어는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가 처음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힘센 국가 둘이 나머지 나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경쟁하던 냉전은 1990년대 초에 끝났습니다. 그럼, 이제 더는 약소국에 잘 보일 필요가 없어졌으니, 국제개발처도 쓸모가 없어졌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국이 분명 헤게모니를 쥔 유일한 강대국이 됐지만, 여전히 힘만으로 되지 않는 일이 있었고, 소프트 파워도 계속 필요했습니다.
9.11 테러는 군사력의 총합을 따지면 미국과 대적할 수 없는, 심지어 국가도 아닌 테러단체가 미국에 엄청난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또한, 빈곤과 사회 기반의 붕괴가 극단주의 성향을 키워 반미 테러리즘의 자양분이 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탈냉전 시대의 국제개발처는 사회적, 경제적 인프라가 부족한 나라의 기반시설을 정비하고 경제적 기회를 제공해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일을 맡습니다. 이게 곧 새로운 방식으로 미국의 안보에도 기여하는 일이라고 정부는 믿었습니다.
최근 들어 국제개발처는 특히 보건 및 질병 예방 프로그램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출범한 긴급 에이즈 구호 계획은 에이즈 치료제를 아프리카 전역에 보급해 지금껏 수백만 명의 목숨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또한, 모기를 방역하고 치료제를 보급하며, 관련 연구를 지원하는 말라리아 퇴치 프로그램도 국제개발처가 없었다면 지금 같은 효과를 내지 못했을 겁니다.
MAGA와 양립할 수 없는 USAID
작은 정부를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티파티 운동이 본격적으로 세를 불리기 시작한 게 2010년 선거부터니까 "혈세 낭비"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 본격적으로 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비판은 포퓰리즘 진영에서 나왔는데, 단순히 "세금 낭비"를 비판하기보다 미국 사람들도 힘든데, 왜 우리 세금을 엉뚱한 나라에 쏟아붓느냐는 비판이 핵심입니다.
세계화를 향한 불만, 비판과도 어떻게 보면 맥락이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소프트 파워든 자유무역이든 모두한테 다 좋다는데, 정작 그 혜택을 보고 과실을 누리는 건 일부 엘리트 계층에 한정된 것 아니냐는 비판은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지난 10여 년간 선거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의 득표에 상당히 도움을 줬는데, 국제개발처를 비롯한 "민주당, 리버럴, 좌파들의 해외 원조"도 비슷한 맥락에서 마가(MAGA)의 표적이 됐습니다.
로스 더우댓은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칼럼니스트 가운데 몇 안 되는 보수 논객입니다. 보수주의자들도 성향이나 의견이 다 같지는 않은데, 더우댓은 가톨릭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지지하는 가톨릭 신자로, 현대 서구 사회에서 종교의 쇠퇴를 우려하는 글이나 종교적 신념을 토대로 사회 문제의 해결을 주문하는 칼럼도 많이 쓰는 편입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는 편이지만, 트럼프를 향한 지지는 마가 진영과는 결이 다르고, 민주당의 경우 특히 문화적으로 급진적인 변화가 미국 유권자들에게서 멀어지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국제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전통적인 보수주의 시각에 가깝습니다. 작은 정부를 절대적인 선으로 보는 이들이 주장하는 "세금 낭비"가 일리 있다고 보면서도 국제개발처를 좌파 사상의 온상으로 보는 일부 포퓰리스트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더우댓은 칼럼에서 명확히 자기 의견을 밝히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게 미국에도 득이 되는 게 많으므로, 지금 제국의 지위 혹은 최소한 여러 강대국 가운데 두드러지는 하나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게 낫고, 그러려면 국제개발처 같은 단체를 활용하는 게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고 말합니다. 힘을 앞세운 하드 파워와 함께 소프트 파워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트럼프와 MAGA의 선택이 가져올 변화
루비오 장관의 생각은 제가 보기에도 전통적인 공화당 보수주의자들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루비오 장관에게 어디까지 재량이 허락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실제로 많아야 수십억 달러로 알려진 국제개발처의 예산은 미국 정부의 전체 예산이 7조 달러라는 걸 고려하면 큰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일론 머스크의 정부효율부가 정말 예산을 줄이고 싶다면 국제개발처 말고 다른 데로 공격 대상을 바꿔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권자들도 일단은 정부의 취지에 공감해 지지를 보내지만, 구체적인 혜택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흥미를 잃고 말 겁니다.
국제개발처가 정말 해체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미국이 손을 떼면서 생긴 선진국의 원조 공백은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앞세운 중국이 메울 가능성이 큽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프트 파워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소프트 파워 싸움에서 중국이 유리한 위치에 오를 수 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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