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촬영한 경주 동궁과 월지 항공 사진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제7권 679년 8월 기록)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뒤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입니다.
674년에는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었다고 전합니다.
5년 뒤에는 궁궐을 웅장하게 고치고 태자가 머무는 동궁을 건립합니다.
후대 왕위에 오를 신라 태자의 독립적 공간이 처음으로 확인됐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오늘(6일) "신라 태자의 공간으로 알려진 동궁이 그동안 알려졌던 것처럼 월지(月池·옛 명칭은 안압지)의 서편에 있는 대형 건물터가 아니라 월지 동편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습니다.
그간 학계에서는 월지의 왼쪽, 즉 Ⅰ-가 지구 일대가 동궁 터라고 여겨왔습니다.
1975년부터 약 2년간 월지 일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679년을 의미하는 '의봉4년'(儀鳳四年)을 새긴 기와가 나왔고, 동궁을 연결할 만한 여러 유물이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신라 왕성이었던 경주 월성(月城)의 동쪽에 있다는 점도 이런 가설을 뒷받침했습니다.
그러나 2007년 이후 발굴 조사가 순차적으로 이뤄지면서 월지의 동쪽이 신라 태자가 정무를 보거나 기거했던 장소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측은 "월지 동편에서 규모가 큰 건물터 흔적이 발견됐고, 통일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세식 화장실 유적이 처음으로 확인되기도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간의 조사 성과를 종합하면 월지 동편은 태자를 위해 조성한 별도 공간으로 추정됩니다.
연구소 측은 월지의 동쪽 즉, Ⅱ-나 지구로 분류된 일대에서 복도식 건물에 둘러싸인 건물과 넓은 마당 시설, 정원 안에 있는 연못(園池·원지)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유구(遺構·옛날 토목건축의 구조를 알 수 있는 자취)를 고려하면 중심 건물은 정면 5칸(약 25m), 측면 4칸(약 21.9m) 규모로 추정됩니다.
건물을 오가는 계단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과거에 넓은 기단 형태의 월대 공간을 증축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월대는 흙이나 돌을 쌓아 궁궐과 같은 주요 건물에 설치합니다.
원지의 경우 남북 방향으로 이어진 별도의 배수 구조를 갖춘 것으로 추정됩니다.
국가유산청은 월지 동·서쪽에서 발견된 건물의 구조와 형태에 주목했습니다.
월지의 서편인 Ⅰ-가 지구의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로 동쪽보다 큰 편입니다.
계단 진입 부분을 기존으로 한 높이도 서쪽(해발 52.6m)이 동쪽(해발 50.3m)보다 높습니다.
건물의 위계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국가유산청은 "월지 동편 건물터를 동궁으로 보고, 당초 동궁으로 추정했던 서편 건물터를 왕의 공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동궁 건물은 대지를 조성하는 단계부터 왕과 태자의 공간이라는 위계 차이를 두고 경관 조성도 계획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왕의 공간은 신라 월성과 연결해 봐야 한다는 게 학계 중론입니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 관계자는 "통일 이후 왕경(王京·수도)이 확장되고 왕궁의 영역도 넓어지면서 월지의 서편 건물터까지 왕궁 영역이 확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국가유산청은 기존에 월지 주변에서 찾아낸 유물도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2017년 발견된 주사위는 한 변의 길이가 약 0.7㎝로, 코끼리의 상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주사위와 같은 형태인데 과거 고급 놀이기구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종이처럼 얇게 편 금박에 머리카락 굵기의 절반 정도 되는 매우 가느다란 선으로 새와 꽃을 표현한 8세기 '화조도'(花鳥圖) 금박 유물은 섬세한 세공 기술로 주목받은 바 있습니다.
국가유산청은 "두 유물이 출토된 곳은 (월지 동편에 자리한) '진짜 동궁'의 북쪽"이라며 "동궁 북쪽에는 태자와 이를 보좌하기 위한 궁인들이 생활한 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동궁의 진짜 위치를 찾아내면서 향후 유적 정비 방향에도 관심이 쏠린립니다.
이 일대는 과거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연못이라는 의미의 '안압지'(雁鴨池)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졌으나,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된 바 있습니다.
현재까지 부속 건물인 누각 3채가 복원된 가운데, 경주시는 2018년 일부 건물을 복원하려 했으나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추가 연구·고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무산됐습니다.
발굴 조사 자문에 참여한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그간의 조사 성과를 토대로 '왕궁과 월지', '동궁' 등으로 문화유산 정보도 명확하게 수정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주 교수는 "태자의 공간으로 여겨지는 동쪽은 건물 흔적이 명료한 상황"이라며 "향후 복원·재현 가능성을 논할 때 유력한 공간으로 검토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국가유산청은 동궁과 월지를 비롯한 신라 왕경의 핵심 유적 발굴 조사 10년의 성과를 강조했습니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은 "역사의 숨어있던 1㎝를 찾아내 살아있는 역사로 되살리는 것이야말로 국가유산청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향후 조사·연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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