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왼쪽)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오른쪽)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의 220만 팔레스타인인을 주변 아랍국가에 영구적으로 재정착시킨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구상과 관련한 논란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대대로 살아온 터전에서 쫓아내면서 소수집단 자체를 계획적으로 말살하는 '인종청소'에 미국이 손을 보태는 셈이 될 것이란 이유에서입니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가자지구의 소유권을 갖겠다는 주장까지 내놓았습니다.
특히 이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 독립 국가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하고, 주민 강제 이주에 반대해온 전임 바이든 행정부와 완전히 다른 접근으로 해석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회담을 앞두고 기자들을 만나 보좌진과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을 요르단과 이집트 등 중동내 제3국에 재정착시키는 방안을 논의했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그는 "사람들을 행복할 수 있고 총에 맞지 않는 좋은 집에 영구적으로 재정착할 수 있도록 하는 합의"가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5일부터 여러차례 가자 주민을 제3국으로 이주시키는 방안과 관련한 발언을 해왔으나 '영구적 재정착'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팔레스타인인이 떠난 가자지구의 소유권을 미국이 넘겨받아 개발을 진행하길 원한다면서 '같은 사람들'이 이 땅을 재건하고 차지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로이터 통신과 AFP 통신은 전했습니다.
그는 네타냐후 총리와의 비공개 회담이 끝난뒤 기자들을 만나서는 "미국은 가자지구를 넘겨받을 것이고 그곳과 관련한 일도 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가자)을 소유할 것이고 위험한 불발탄과 여타 무기를 모두 해체할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네타냐후 총리와 어떻게 하마스를 제거하고 평화를 회복할지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면서, 미국은 무너진 건물 잔해 등을 치운 뒤 가자지구를 경제적으로 개발하려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날 트럼프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제3국에 재정착시키기 위한 과정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주민이 떠난 가자지구를 미국이 어떻게 관리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세부적 언급 역시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지역이나 국가에서 특정 집단을 정책적으로 몰아내는 행위는 '인종청소'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일단 제3국 이주를 강행하고 가자지구에 미군을 주둔시킨 채 이권을 챙긴다면 당장 국제법상 '인도에 반한 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가자지구에서 저지른 전쟁범죄 혐의 때문에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입니다.
미국을 '제국주의적 패권국'으로 보는 중동 내 반미 진영과 일부 글로벌 사우스에서는 이번 사태로 반미감정이 확산할 것으로 관측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주권 국가로 공존하는 '두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을 지지해온 미국의 동맹국들로부터도 강력한 반발이 불가피합니다.
뉴욕타임스(NYT)는 서방 강대국들이 지역 주민들의 자치권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지도를 다시 그리고 주민들을 이주시킨 시대를 연상시킨다면서 "지정학적 판도라의 상자를 사실상 다시 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WP)도 팔레스타인 주민과 아랍 국가들의 맹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미국을 중동 지역 분쟁에 더 깊이 끌어들일 방안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실현 가능성도 의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중동의 다른 나라 정상들과 대화했고 그들도 이 구상을 매우 좋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당장 이슬람권을 주도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외교부 성명을 통해 가자지구 주민의 강제이주를 반대한다고 밝혔습니다.
그간 사우디아라비아는 팔레스타인의 독립국 수립을 전제로 하지 않는 어떠한 미국의 중동 정책도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왔습니다.
주변국의 반대는 더 심합니다.
가자 주민이 이주할 국가로 거론된 요르단은 과거 중동전쟁 여파로 자국에 유입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왕가 축출과 국왕 암살 등을 시도해 내전을 치른 경험이 있습니다.
이집트 역시 경제 불안이 심각해 대규모 난민을 받기 힘든 실정입니다.
무슬림 형제단을 밀어내고 정권을 잡은 압델 파타 엘시시 현 이집트 대통령 입장에선 무슬림 형제단과 뿌리를 공유하는 하마스가 난민들에 섞여 유입되는 것도 우려할 지점입니다.
이미 이집트·요르단·아랍에미리트(UAE)·사우디아라비아·카타르 등 주변 아랍권 5개국은 이달 1일 외교장관 공동성명을 내고 트럼프 대통령의 가자 주민 이주 구상에 반대 의사를 밝힌 상황입니다.
당사자인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제3국으로의 이주를 반길지도 의문입니다.
가자 주민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제1차 중동전쟁 이후 75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인이 고향에서 쫓겨나 난민으로 전락했던 아픈 과거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려 왔습니다.
통제하에 있던 주민들이 중동 각지로 산산이 나눠질 경우 조직이 와해될 수 있는 하마스 역시 이러한 시도를 극력 막아설 전망입니다.
하마스 정치국의 사미 아부 주흐리 위원은 성명을 내고 트럼프의 제3국 이주 구상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을 "그들의 땅에서 추방하겠다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주흐리 위원은 "우리는 이것들을 역내에 혼란과 긴장을 조성하기 위한 처방전으로 여긴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그런 계획이 통과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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