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없지만, 한국인에게 필요한 뉴스"를 엄선해 전하는 외신 큐레이션 매체 '뉴스페퍼민트'입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스프에서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그 배경과 맥락에 관한 자세한 해설을 함께 제공합니다. 그동안 미국을 비롯해 한국 밖의 사건, 소식, 논의를 열심히 읽고 풀어 전달해 온 경험을 살려,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글을 쓰겠습니다. (글 : 송인근 뉴스페퍼민트 편집장)
도널드 트럼프를 다시 백악관으로 보낸 건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 나아가 주류 엘리트와 기득권 전반을 향한 유권자들의 실망과 분노였습니다. 여기에 트럼프라면 뭐라도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낼 거라고 기대하는 마음도 보태졌을 겁니다. 실망과 분노를 이용해 4년 만의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 당선인에게 통치의 시간이 쉽지 않으리란 전망은 선거 이후에 이미 짚어드렸습니다.
선거를 치를 땐 정부 여당을 향한 불만을 결집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이제 정부 여당이 된 트럼프와 공화당은 자신의 비전이 더 낫다는 사실을 결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정책을 입안해 시행해야 하죠. 장밋빛 공약을 던져 쌓은 희망은 '어떻게'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금세 실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낡고 부패한 제도를 싹 갈아엎겠다는 약속을 향한 환호도 결과를 내지 못하면 이내 식어버리고 냉소로 대체될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구체적으로 트럼프 2기 행정부 앞에 놓인 딜레마를 살펴보려 합니다. 선거 국면에선 일단 트럼프를 당선시키고 보자는 목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GA)"는 대의 아래 뭉쳤지만, '어떻게'를 기준으로 보면 실은 꽤 다른 계획과 생각을 하던 이들이 트럼프 2기 백악관 참모진과 행정부 요직에 속속 임명 또는 지명됐습니다. 이들의 동상이몽이 어디까지 드러나고 어디까지 반목하고 부딪힐지, 트럼프 대통령이 과연 리더십을 발휘해 생각의 차이를 잘 조율하고, 서로 견제하며 건전한 경쟁을 벌이는 통치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지에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성패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구성하는 세 집단의 동상이몽
먼저 생어 기자가 '복수조(revenge team)'라고 부른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미국을 막후에서 조종하는 딥스테이트가 진짜로 있다고 믿고 있으며, 법무부와 국방부, 정보기관을 장악해 딥스테이트를 궤멸하고, 트럼프를 기소하거나 법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은 사람들을 철저히 응징하려는 이들입니다.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를 신념처럼 떠받드는 것도 바로 이들입니다.
두 번째 집단은 트럼프에게 돈을 댄 갑부들, 그중에도 월스트리트 출신의 부자들을 비롯해 자유로운 시장 경제가 굴러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재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된 스콧 베센트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트럼프 당선인이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인 베센트를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수장으로 임명한 건 베센트가 마가의 주장을 신봉해서라기보다 주식시장의 호황을 오래도록 이끌어줄 적임자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트럼프는 1기 때도 그랬지만, 주식시장의 호황 여부를 대통령의 경제 성적표로 인식하는 경향이 특히 강합니다) 임기가 사실상 헌법으로 보장돼 대통령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일방적으로 해임하기 어려운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바꾸고 싶어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론 머스크로 대표되는 '작은 정부 만들기와 효율성에 혈안이 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앞의 두 집단과는 결이 좀 다르기도 하지만, 트럼프에게 선거 전후로 엄청난 돈을 후원함으로써 측근의 '자리를 샀다'는 점에서는 두 번째 집단과 비슷합니다.
앞서 말한 동상이몽은 결국, 선거를 앞두고 트럼프에게 돈과 표가 모두 필요해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복수조'는 선거인단 과반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유권자 다수의 표를 대변하는 집단입니다. 선거에서 또 질 수 없던 트럼프는 당연히 표가 필요했습니다. 트럼프는 특유의 유세 실력을 발휘해 유권자들에게 직접 표를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서민들의 삶을 외면하는 엘리트, 기득권층에 지친 유권자들은 트럼프에게 희망을 걸고 표를 줬습니다.
유권자들이 지지한다고 선거에서 승리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미국 선거에는 특히 천문학적인 돈이 듭니다. 트럼프 본인이 아무리 부자라도 자비를 털어서 선거를 치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데다 '수완 좋은 사업가' 트럼프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겁니다. 심지어 일반 유권자들이 많지 않은 돈을 십시일반 모아 후원하는 경쟁에서는 해리스 후보에게 크게 뒤처졌던 트럼프는 그래서 기존 공화당의 갑부 기부자들에게 선거자금을 적잖이 의존했습니다.
수백, 수천만 달러를 트럼프 캠프에 기부한 부자들의 요구 사항을 무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트럼프는 아예 이들에게 요직을 맡겼습니다. 사람들은 트럼프에게 많은 돈을 후원하고, 정부 요직을 맡은 인물로 일론 머스크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겁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더 큰 여파를 미칠 수도 있는 상무부 장관 자리에 '월스트리트의 대표 마가 전도사'로 불리던 하워드 러트닉을 앉힌 것도 파격적인 인사였습니다. 러트닉은 트럼프에게 돈도 많이 냈고, 트럼프의 신임을 받아 공동 인수위원장을 맡기도 했지만, 산업 정책을 펴고 무역 기조를 총괄하는 상무부 장관에게 요구되는 경험을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렇게 백악관과 행정부의 주요 보직이 비전과 목표가 일치하지 않는 이들로 채워지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내건 공약을 '어떻게' 실천에 옮길지를 두고도 의견이 갈립니다. 정책적 딜레마에 빠질 수도 있는데, 당장 예상되는 시나리오가 관세입니다. 트럼프는 인정하지 않지만, 관세를 올리면 기업들은 가격을 올려 관세를 소비자에게 전가할 겁니다. 그럼 인플레이션 압력이 커집니다. 연준은 금리 인하를 늦추거나 심하면 금리를 다시 올릴 수도 있고, 그럼 주식시장이 활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상품은 말할 것도 없고, 서비스와 금융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데서 혜택을 봐온 월스트리트 출신 부자들이 과연 이런 결말이 뻔한데도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인상안을 두 팔 벌려 환영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그럼 트럼프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요? 자신에게 표를 준 유권자들과 돈을 댄 후원자들을 모두 만족시키는 절충안이나 묘수를 찾을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문제일 겁니다.
보수 성향 매체 콤팩트 매거진을 만든 매튜 슈미츠가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를 강력히 추천하는 칼럼을 썼습니다. 라이트하이저는 자유무역보다 보호무역을 뚜렷이 선호하는 인물로, 지난해 펴낸 책의 제목부터 "세상에 공짜 무역은 없다(No Trade Is Free)"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자유무역보다 공정무역"의 개념을 확립한 것도 라이트하이저 전 무역대표부 대표입니다. 자유무역을 선호하는 월스트리트 출신 부자들은 대체로 라이트하이저를 탐탁지 않아 하고, 반대로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지지하거나 미국 우선주의에 환호하는 일반 유권자들은 라이트하이저를 좋아하는 게 당연해 보입니다.
라이트하이저는 한쪽을 만족시키는 경제 정책은 다른 쪽을 실망하게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타개할 수 있는 카드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문제는 행정부의 주요 보직이 이미 거의 다 찼다는 데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25일 월요일 오전 현재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주요 인사는 거의 다 발표됐습니다. 남은 자리 가운데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자리가 가장 눈에 띄긴 하는데, 라이트하이저가 1기 때 이미 했던 무역대표부 대표를 다시 맡으려 할까요? 이에 관해서는 트럼프 측근들과 언론 사이에서도 전망이 갈립니다.
라이트하이저는 무역에 있어서 보호주의를 설파해 온 사람입니다. 무역대표부 대표 시절이나 책에서 편 주장이나, 대선 전후로 한 발언에서 일관적으로 자유무역이 초래한 잘못된 결과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신념이 읽힙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경제 정책을 온통 월스트리트 출신에 맡기는 것보다 마가의 비전을 체화한 사람을 한 명쯤 두고 싶어 할 수도 있습니다. 주식시장의 활황이 끝나는 것도 아쉽겠지만,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지지한 (관세) 정책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하는 것도 트럼프로서는 굴욕적인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라이트하이저에게 재무부나 상무부 장관을 맡겼다면 몰라도 이미 더 중요한 자리를 다른 인물로 채운 만큼 라이트하이저가 2기 행정부에는 적어도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을 거라는 전망도 제기됩니다. 무역대표부가 직제상으로는 대통령 직속 기관이지만, 사실상 무역 정책을 총괄하는 상무부와 호흡을 맞춰야 하고, 많은 경우 상무부가 정한 기조를 따르게 됩니다. (상무부 장관의 별명 중 하나는 '무역 차르'입니다) 라이트하이저로서는 러트닉 장관과 의견이 갈려 충돌하면서까지 무역대표부 대표를 다시 맡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어쩌면 라이트하이저는 2017년 그랬던 것처럼 상무부 장관이 무역 정책을 잘 펴지 못해 트럼프 대통령의 인내심이 빠르게 바닥날 때 '구원투수'로 등장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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