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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푸젠(福建)성을 방문하면 반드시 참관하는 건축물이 있으니, 토루(土樓)다. 토루는 흙으로 쌓아 올린 집이라는 뜻이다. 오직 중국에 있는 객가(客家)의 전통 건축물이다.
객가는 중국과 해외 곳곳에 퍼져 산다. 하지만 토루는 푸젠, 광둥(廣東), 장시(江西) 3개 성에만 있다. 겉모습은 원형, 방형, 장방형, 사각형, 타원형 등 다양하다.
흥미롭게도 푸젠의 토루는 다른 곳보다 훨씬 크다. 한 채의 토루가 마치 성채처럼 거대하다. 그 덕분에 토루에는 적게는 수십 가구에서 많게는 200~300여 가구가 생활한다.
하나의 씨족 공동체가 모두 살 수 있는 큰 규모다. 그 이유는 객가의 이주와 정착 역사에서 비롯됐다. 객가는 본래 북부의 황허(黃河) 중류 일대에서 살았던 한족이었다.
객가의 시작은 흥미롭게도 진시황의 남정(南征)에서 비롯됐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은 남부를 평정하기 위해 60만 대군을 파견했다. 214년에는 추가로 50만 명을 파병했다.
병영에는 군졸의 식솔이 있었다. 가족이 함께 남부로 내려가 둔전을 하며 보급을 해결했다. 적지 않은 병사와 가족은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남아 최초의 객가가 됐다.
그 뒤 다섯 차례에 걸쳐 객가의 이주가 벌어졌는데, 2~4차는 전란과 내란이 원인이었다.
4세기 북방 유목민족이 대거 침입한 영가의 난, 당대 후기 안사의 난과 황소의 난, 12세기 북송이 금나라에게 패한 정강의 변이 촉발했다. 5~6차는 배경이 전혀 달랐고, 이주 지역도 중국 서남부와 해외로 넓혔다.
명말과 청초에 푸젠과 광둥에는 홍수와 가뭄이 반복해 일어났다. 따라서 객가 공동체에서는 서진(西進) 운동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도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인구가 급감했던 쓰촨(四川)으로의 이주를 적극 장려했다.
당시 쓰촨으로 갔던 객가의 대표적인 후손이 덩샤오핑(鄧小平)과 주더(朱德)다. 19세기 태평천국운동은 객가와 좡족(壯族)이 주도했다.
그로 인해 청조는 태평천국을 멸망시킨 뒤 객가를 혹독히 탄압했다. 이에 수많은 객가가 대만과 동남아로 이주했다. 그들의 대표적인 후손이 차이잉원(蔡英文)과 리콴유(李光耀)다.
그러나 객가가 이주했던 지역에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토착민을 몰아내고 외지인이 정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객가는 원주민을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고 독자적인 씨족 공동체를 구성했다.
그래서 자신을 원주민과 구분해 '손님'이란 뜻인 객가라고 불렀다. 오늘날 객가는 중국 19개 성·시에 5,000여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또한 전 세계 80여 개국에 3,000만 명이 거주한다. 객가는 어디에 살던 '진짜배기 한족'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중원에서 내려와 자신만의 공동체를 구축했고 독특한 문화를 보존했기 때문이다.
객가어는 당·송대 한족 언어의 순수성을 잘 보존했다. 제례의식과 풍습은 1000여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유지했다. 음식 문화도 예부터 계승하면서 이주한 지역 환경과 접목하여 재창조했다.
이런 배경에는 토루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한 토루에 사는 씨족은 성이나 출신지를 붙여 '○○루(樓)'라고 불렀다. 그 안에는 식당, 목욕탕, 서당, 사당 등 시설을 갖추어 자급자족했다.
토루의 침실은 2층부터 4층까지 두는데, 보통 한 가족을 한 단위로 해서 수직적으로 배열했다. 특히 처음 지을 때는 훗날 늘어날 가족을 염두에 두어 규모를 크게 지었다.
따라서 청대에 지어진 원형 토루의 경우 방은 300여 칸에 달했고, 최대 900명이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전통 풍수지리와 첨단 건축술을 총동원해서 지었다.
대부분 산에 기대어 있으면서 앞이 트인 작은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전면이나 측면에는 하천이 있거나 지하 수맥이 풍부한 위치가 보통이다.
공사는 단 하나뿐인 대문의 방향을 먼저 정했다. 대문을 기준으로 삼아 원을 그렸다. 그 선에 외벽의 기둥이 될 말뚝을 줄지어 박고 지반을 다졌다. 외벽은 하단을 돌담으로, 그 위는 오리나무와 대나무로 촘촘히 다져 흙벽을 만들었다.
흙벽의 하단 폭은 170cm, 평균 150cm로 웬만한 공격에도 허물어지지 않았다. 안쪽에는 나무의 이음을 정교히 해서 방과 복도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와로 지붕을 얹혔다. 이처럼 토루는 방어성이 뛰어났다. 옛날에는 산적과 원주민의 약탈이 끊이질 않았고, 야생동물의 공격도 흔했기 때문이다.
모든 토루의 중앙에는 조상신을 모시는 조당(祖堂)이 있다. 모시는 조상은 남방으로 갓 이주해 왔을 때 혹은 토루를 처음 건설했던 선조다. 매년 선조의 생일과 기일에는 온 씨족이 조당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이 조상신과 제사의식이 객가의 정신적 지주다. 객가는 토루 주변의 물을 이용해서 쌀, 옥수수, 감자, 채소, 과일 등을 심어 수확해 살았다.
작물 중 쌀과 차는 품질이 아주 뛰어났다. 객가 쌀에는 북방과 남방의 도작 문화가 한데 융합되어 있다. 그렇기에 남부의 여느 쌀보다 윤기가 흐르고 맛있다.
객가 차는 청대에는 최상품으로 쳐줄 만큼 유명했다. 청대 유일한 대외 무역항이었던 광저우(廣州)의 13행을 통해 유럽으로 수출했던 차가 푸젠의 객가 차였다.
푸젠의 객가는 경작한 찹쌀로 '냥주(娘酒)'를 빚는다. 냥주의 양조법은 간단하다. 먼저 찹쌀을 씻은 뒤 물에 담가 하루 동안 불린다. 불린 쌀은 건져서 물기를 빼고 시루에 푹 찐 다음 차게 식힌다.
여기에 누룩과 고두밥을 섞고 물을 부은 뒤 비비고 증류한 술을 더한다. 그리고 술독에 담아 반나절 정도 일정하게 끊이면 보글거리며 끓는 소리가 난다.
이때 술독 주둥이에 구멍을 내고 다시 이틀 정도 놔둔다. 그러면 냥주가 발효되어 숙성된다. 그렇다면 왜 미주(米酒)라고 부르지 않고 냥주라고 지었을까? 이는 객가의 재미있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객가는 전란을 피해 북방에서 내려왔다. 4차 이주 시기 한 무리의 대가족이 고향을 떠나 수개월 동안 남하한 끝에 푸젠의 산간마을까지 걸어왔다.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온 가족은 그야말로 기진맥진해 버렸다. 하지만 원주민은 그들을 적대시했다. 오직 백발의 노파만 달랐다. 노파는 가족에게 커다란 대나무 통에 담긴 술을 건넸다.
"어서들 마셔보게나. 금방 기력을 회복할 걸세." 향긋한 냄새가 진동하는 술을 연장자부터 들이켰다. 잠시 후 혼미한 정신이 맑아지고 기력이 점점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노파는 "이 술은 찹쌀로 지었다"면서 자세한 양조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 뒤 가족은 노파를 어머니처럼 받들었고, 술을 '어머니(娘)의 술'이라 명명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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