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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권 최고 부자들의 공통점…그들이 성장한 지역의 특별함이 있다 [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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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만리,성시인문(縱橫萬里-城市人文)] 리카싱, 마화텅 등 걸출한 CEO들을 배출한 해안도시, 차오저우(潮州), 산터우(汕頭), 제양(揭陽) (글 : 한재혁 전 주광저우 총영사)
한재혁 중국본색 썸네일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중화권 최고의 부자를 꼽는다고 하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리카싱(Li Ka-shing, 李嘉誠)일 것이다. 올해의 '포브스 홍콩 부자 리스트(2024 Forbes Hong Kong's 50 Richest)'에서도 리카싱은 362억 달러의 자산을 기록하며 어김없이 1위를 차지했다. 2018년에 회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나서 지금은 '청쿵그룹(長江集團, Cheung Kong Holdings)'의 고문(Senior Advisor)으로 활동하고 있는 리카싱은 1999년 처음 홍콩 최고의 부자로 등극한 이후 20년 넘게 거의 매년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 부자 순위로는 38위에 해당한다.

리카싱의 청쿵그룹 빌딩
올해 96세를 맞아 아직도 건강함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는 그는 1928년 광둥성 차오저우(潮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소학교 교장 선생님이었지만 잇단 전란과 가난으로 11살 때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홍콩으로 이주하게 된다. 홍콩에 온 지 2년 만에 아버지는 시계 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하게 되고 장남인 그에게 두 동생과 집안 살림까지 맡겨진다. 공장을 전전하다 플라스틱 공장에서 생산과 판매 수완을 익혀 21세에 6,500달러로 '청쿵(長江) 플라스틱' 공장을 설립하고, 이어 부동산, 전기, 항만, 석유 등 여러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하며 큰 성공을 거둔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본토에도 팍슨(Parkson, 百家) 백화점, 왓슨스(Watsons, 屈臣氏) 편의점, 왕푸징 오리엔탈 플라자(王府井東方廣場) 콤플렉스 등 유통과 부동산을 비롯한 여러 프로젝트에 선구적으로 진출하였으며, 홍콩 갑부 반열에 오른 이후에는 캐나다의 석유, 영국의 항만과 천연가스, 호주의 에너지 등 세계 유망 기업들을 대상으로 투자를 확장했다. 2007년 아직 적자 상태였던 페이스북(Facebook)에 투자를 결정할 때는 5분도 채 안 걸렸다는 일화도 있다.

아시아의 슈퍼맨(亞洲超人)으로 불리는 그는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리카싱기금회(Li Ka-shing Foundation)'를 통한 기부액이 38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중국 거대 IT 기업 텐센트(Tencent, 騰訊)의 회장으로 전 세계 부자 리스트 57위에 오른 마화텅(馬化騰)도 같은 차오산(潮汕) 출신이다.

리카싱, 마화텅 등 유난히 많은 유력 기업 경영인들을 배출한 차오산은 홍콩의 동편, 광둥성의 남동쪽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푸젠(福建)성과 접해 있다. 약 8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하며, 역사 이후에는 백월(百越)의 지역이었다. 해상 실크로드의 관문이었으며, 청나라 때 통상항구(通商口岸)로 지정되었다. 근현대를 거치며 인문 지리, 역사 문화 환경을 공유하는 차오산(潮汕) 지역으로 형성되었다. 1981년에는 경제특구(經濟特區)가 설치되었고, 1991년 현재와 같이 3개 도시인 차오저우(潮州), 산터우(汕頭), 제양(揭陽)으로 분리된다.

작년 말 통계로 차오저우시 275만 명, 산터우시 555만 명, 제양시 565만 명으로, 차오산 지역 상주인구의 합은 약 1,400만 명이다. 광둥 등 중국 내 다른 지역 거주자도 1,000만 명, 고향을 떠나 해외에 거주하는 화교 수는 약 1,500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태국에만 5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동남아를 중심으로 전 세계에 진출해 있다. 홍콩은 5명 중 한 명이 차오산 출신이다. 태국 최대 재벌인 CP그룹의 회장 타닌 찌야와논(Dhanin Chearavanont; 謝國民)를 비롯한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의 동남아 화교 재벌과 정치인 다수가 이곳 출신이거나 부모가 이곳 출신이다. 이런 성공의 원인은 무엇일까?

차오저우 한강의 광제교 산터우 시내 풍광
차오산 출신들은 일찍이 가난한 어촌마을 환경을 떠나 홍콩과 동남아 등지에 정착하여 동양의 유태인으로 불리며 성실성과 근면성을 밑천으로 비즈니스에 성공한 경우가 많다. 차오산에는 민남어(閔南語)계의 차오산어(潮汕話)라는 고유의 방언이 있어, 이 지역 출신들 간에는 표준 중국어가 아닌 이 언어로 소통한다. 낯선 땅에서 동일한 문화와 풍습을 공유하면서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서로 긴밀히 도우며 발전하는 것이다. 중국의 웬만한 지역이나 동남아 각 곳에는 차오상회(潮商會)라고 불리는 일종의 향우회이자 비즈니스 모임을 결성해 운영한다. 과거 차오산 사람들(潮汕人, Teochew People)은 객가인(客家人, Hokkien People)들과 함께 오랜 세월에 걸쳐 전란과 곤궁을 피해 중원(中原)지역으로부터 이동해 온 사람들이다.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바탕으로 독특한 음악극(潮劇, Teochew Opera), 무용(英歌, Yingge Dance), 나무 조각(木彫, Wood Carving) 등 다양한 문화예술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홍콩의 가수이자 배우인 저우화젠(周華健), 양첸화(楊千嬅), 정슈원(鄭秀文), 식신 추아람(蔡瀾) 등도 이곳에 원적을 두고 있다.

차오산 건축장식과 조극(潮剧)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한유(韓愈)만큼 차오산(潮汕) 지역에 큰 영향을 준 이도 없다. 한유는 당나라 때 관리이자 문필가로, 원래 허난(河南) 지역 출신이다. 한문공(韓文公), 한창려(韓昌黎)로 불리기도 하며, 류종원(柳宗元)과 같이 고문운동(古文運動)에 나서 함께 한류(韓柳)로 불리기도 한다.

한유는 이부시랑(吏部侍郎)으로 재직하던 시기, 당 현종(唐玄宗)이 석가모니 진신 유골을 직접 영접하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간영불골표(諫迎佛骨表)>라는 글을 상주하였고, 황제의 분노를 사서 폄직(貶職)되어 머나먼 차오저우(潮州) 땅의 자사(刺史)로 가게 된다. 험한 귀양길에 딸을 잃고 한유는 "아침에 조정에 나아가 글 하나 상주했더니, 저녁에 폄직되어 차오저우로 향하는데 길이 팔천 리나 되는구나(一封朝奏九重天,夕貶潮州路八千)"라고 한탄한다.

속죄하는 글을 올려 나은 환경의 위안저우(袁州) 자사로 옮길 때까지 7개월여 동안 한유는 현지에 유가 사상과 학문을 전파하고 교육하였으며, 노비 석방, 농사 개선 등 백성들을 위한 업적을 이룬다. 특히, 악어가 가축을 잡아먹어 폐해가 많은 지역에 악어문(鰐魚文)을 발표하고 악어 퇴치에 나서기도 했다. 그 결과 차오저우 사람들은 "남쪽으로 팔 천리 거리 귀양길이 헛되지 않았네, 강과 산 모두 한 씨 성을 받게 되었으니(不虛南謫八千里,嬴得江山都姓韓)"라고 후일 칭송했다.

실제로 차오산 지역 사람들은 한유를 신(神)의 수준으로 존경했으며, 지역 내 큰 강과 산의 이름에 한유(韓愈)의 성(姓)인 한(韓) 자를 붙여 한강(韓江), 한산(韓山) 등으로 부르고 사당(韓文公祠)을 지어 기리고 있다. 1000년이 지난 지금도 차오산 지역을 가보면 한(韓)으로 시작하는 지명이나 장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연유이다.

한유(韩愈)와 한문공사(韩文公祠)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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