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위기그룹의 이스라엘 선임연구원 마이라브 존제인이 텔아비브에서 보내온 글이다.
하마스에 붙잡힌 인질들을 즉시 석방하고, 정권 교체를 위한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린 텔아비브. 한 시위 참가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인 팻말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없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여기서 그들은 하마스에 붙잡혀 간 인질을 뜻한다. "이 나라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기 좋은 이유를 단 하나만 대보라"는 팻말도 있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전쟁을 벌인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이래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다. 시위대가 든 팻말 속 구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스스로 던져봤을 질문들과 맥이 닿아 있다.
유대인의 땅이라고 믿은 곳에 세운 나라가 그 나라 국민의 목숨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장하지 못한다면, 혹은 그러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나? 과연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낄 날이 평생 다시 올까? 지도자들이 온통 '끝없는 전쟁'밖에 말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까?
1년 전 10월 7일, 하마스의 잔인무도한 테러 공격으로 시작된 가자 전쟁을 치르며, 이스라엘은 점점 실존적 위기에 빠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미 물리적으로 쪼그라들었다. 주변 국가, 여러 무장단체와의 갈등이 고조되고 전선이 확대되면서 키부침 등 북부 도시와 남부 지역의 많은 마을을 비롯해 국경 근처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 수만, 수십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하마스와 헤즈볼라, 후티, 그리고 이란까지 적들은 곳곳에서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다. 여기에 내부적으로 혼란이 계속되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더 커졌다.
전쟁이 시작된 뒤 이스라엘을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은 속속 다른 나라로 떠났다. 당장 이민 갈 수 없는 이들 중에도 이민을 고려하는 사람이 많다. 남은 사람들은 매주 수천, 수만 명씩 거리로 몰려 나가 시민 불복종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미 지난해 10월 7일 테러 공격이 있기 전부터 네타냐후 정부가 사법부를 장악하려는 시도를 규탄하는 시위가 잇달아 열렸다. 시위는 테러 공격 직후 잠시 중단됐다가 하마스에 붙잡혀 간 인질들의 석방과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새로운 요구와 함께 재개됐다.
지난달에는 네타냐후 총리 사저 앞에서 농성을 벌이던 이스라엘 전 육군 참모총장 댄 할루츠 장군을 경찰이 강제로 끌어내는 사진이 충격을 줬다. 또 경찰과 사법 공무원들이 인질의 친인척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폭행했다는 증언도 잇따랐다. 모두 이스라엘의 내부 위기와 갈등이 얼마나 심각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시위에 나선 수많은 이스라엘 시민 중에는 세속적인 자유주의 엘리트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은 이번 시위를 단지 인질의 석방을 촉구하는 문제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과 국격이 달린 문제로 본다. 이들은 지금 이스라엘이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사이의 갈림길, 독립적인 사법부를 지켜내느냐, 행정부가 사법부의 장악을 막지 못하느냐 사이의 갈림길, 또는 시위의 자유가 보장되고 정치 지도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나라와 표현의 자유가 탄압받고 권력자가 대중 위에 군림하는 나라 사이의 갈림길이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중대한 갈림길 앞에서 명운을 건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는 놀라울 만큼 눈을 감고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마치 우리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 취급한다. 이스라엘과 요르단강 서안, 예루살렘과 가자지구에 사는 사람들이 서로 완전히 단절된 채 사는 것처럼 말이다. 거리에 나선 사람들의 분노는 철저히 하마스에 붙잡혀 간 인질을 데려오지 못하는 이스라엘 정부를 향해 있다. 그런데 가자지구를 향한 무차별 폭격과 인도주의 위기, 전쟁이 시작된 뒤 사망자가 무려 4만 명을 넘었고, 희생자 대부분이 민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일절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과도한 무력 사용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이스라엘이 서서히 실존적 위기에 빠지고 있다면, 사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위해 매일 싸우고 있다. 이 사실을 동시에 고려하는 이스라엘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의식적으로든 의식하지 못했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은 전쟁이 시작된 뒤 이스라엘의 삶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불안한 장면이 됐다. 물론 이런 외면과 무시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훨씬 더 두드러지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스라엘 극우 세력은 바로 이 팔레스타인을 향한 무관심 덕분에 별로 힘들이지 않고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팔레스타인을 적으로 상정하고 상대하는 데 진심이다. 우파 연정이 고안하고 확립한 오늘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은 분명하다. 바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이스라엘 땅 전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며, 필요하면 총칼을 앞세운다는 원칙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최근에 주재한 각료 회의에서 유대교 경전인 타나크(기독교의 구약 성경) 사무엘서를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라고 묻는 사람이 있는데, 중동에서 칼 없이는 어떤 것도 '영원히' 살아남지 못합니다.
네타냐후 총리가 인용한 구절 바로 뒤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는 말이 나오지만, 인용은 앞부분에서 잘렸다. 네타냐후 총리는 유대인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무력이라고 믿는다. 적을 무찌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국민이 일부 희생되더라도, 또는 이스라엘의 국제적 평판이 추락하고, 안보 위기에 윤리적인 지탄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이스라엘 내각의 재무부 장관으로, 사실상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총독을 겸하고 있는 베잘렐 스모트리치는 최근 "내 삶의 목표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등장을 막고 이스라엘 땅을 건설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지난 1년 동안 이스라엘은 전쟁 동안 점령한 땅에 전례 없는 속도로 유대인 정착촌을 지음으로써 사실상 가자지구를 다시 점령했다. 그러고는 이제 다시 레바논에서 갈등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스모트리치 장관을 비롯해 대표적인 강경파 이타마르 벤그비르 장관, 그리고 네타냐후 총리 같은 자들이 통치하는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의 약속을 내팽개치고 모든 걸 파괴하는 정책을 펴나갈 것이다.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을 분리하고 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인정하는 길을 닦은 약속이었다. 반대로 극우 세력이 장악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압도적인 힘으로 제압하고 학살하며, 현재 살고 있는 땅에서 계속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사람들을 쫓아낼 것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에 무관심했던 이스라엘 사람들도 서서히 본질적인 모순에 직면하게 됐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한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의 근원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 나라가 정말로 유대인의 권리와 자치를 최우선으로 하는 나라라면, 인질로 잡혀간 자기 나라 국민을 무기력하게 포기하고, 온 나라를 끝 모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유대인의 삶과 가치를 땅에 떨어뜨린 건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정치 지도자가 시민의 삶보다 자신의 정치 권력과 정치적 생존, 과도한 군사력을 더 우선시하는 나라에 사는 시민은 무엇을 해야 올바른 것인가? 노골적인 법적 이중잣대를 서슴지 않고 휘두르는 경찰을 두고도 이스라엘을 법치 국가라 부를 수 있나?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집단 폭행하고 학대하는 유대인 정착촌의 이스라엘 주민들에겐 한없이 관대한 법이 인질들을 조속히 가족 품으로 돌려오라는 평화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하고 체포하는 데는 어떠한 관용도 없이 적용된다.
물론 이런 현상 또한 새롭지는 않다. 나는 종종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국의 체계적인 폭력을 과연 언제까지 외면하고 모른 척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팔레스타인에 군대를 주둔하고 정착촌을 만들어 땅을 빼앗으면서 일상적인 폭력을 행사해 온 이스라엘은 이제는 가자지구를 폭격하며 사실상 학살하고 있다. 굳이 자국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지 않더라도 국가의 성격이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현실을 외면하고 애써 모른 척하다 보면 심각한 인지 부조화에 직면한다. 지난 1년은 그 인지 부조화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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