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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 정유정, 여전히 새로운 《영원한 천국》 [북적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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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 정유정, 여전히 새로운 《영원한 천국》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424: 《영원한 천국》
 
누군가를 다시 만나고자 롤라에 왔으나, 누군가가 오히려 고통이 되었다. 해석이 맞다면, 그도 나처럼 누군가를 가뒀을 것이다.

[북적북적]의 휴방이 죄송스럽게도 길어지면서, 출간과 거의 동시에 낭독 허가를 받아둔 이 책을 읽기가 조금 민망해졌습니다. 익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 사이에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숨은 보석 같은 작가, 신진 필자를 발굴하는 데 되도록 초점을 맞추겠다는 [북적북적]의 기조와도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분의 작품이 3년 만에 새로 나왔는데, [북적북적]에서 읽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사심, 이라면 사심입니다. ‘팬심’으로 늘 기다리고 있는 작가, 정유정의 [영원한 천국]을 오랜만의 [북적북적]에서 낭독했습니다. 제가 뉴욕에서도 [북적북적]을 통해 읽었던 [완전한 행복] 이후 3년 만인 지난 8월 28일에 발간됐습니다. [완전한 행복]에 이어, 이른바 ‘정유정 욕망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 [완전한 행복]의 낭독파일과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올 10월까지 용산 텐트촌에 있었잖아. 거기 있을 때 젊은 애가 하나 죽었는데 그 애를 두고 야릇한 소문이 돌았단 말이지.”

야릇한 소문에 대한 이야기는 쭉 이어지지 않았다. 곰방대만 빨고 있는 걸로 봐서 청중의 분위기가 안달복달 수준으로 달아오르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로 말하면 안달복달을 넘어서 소리쳐 묻고 싶은 심정이 됐다. 그러니까 용산 텐트촌에서 죽은 젊은 애가 어쨌다는 거냐고.

“여기 혹시 롤라라는 말 들어본 사람 있어?”

곰방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청중의 시선만 일제히 곰방대의 입에 꽂혀 있었다. 내 머릿속에선 기억이 되감겼다. 만경부동산 백 사장의 전화로 잠에서 깨어났던 아침,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뉴스가 생생하게 재현됐다.

……세계 최대의 IT 기업 엑스와 글로벌 제약 회사 SG바이오가 손잡고……인류의 마지막 숙제, 죽음을 극복하는 프로젝트……

“언뜻 들으면 사이비 종교 교리 같은 얘긴데 말이지.”

곰방대가 한 박자 말을 끊었다. 실내는 고요해졌다.

“어마무시하게 돈이 많은 미국의 한 생명공학 회사가 인간이 죽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는 거야.”

우리 시대의 우리말 이야기 장인, 정유정 작가는 여전히 새롭습니다. ‘욕망’하고 ‘추구’하는 존재인 인간을 언어로써 탐구하는 장인 궁극의 과제를 위해 이번에는 ‘메타버스 SF 스릴러’를 들고 왔습니다. 인간이 육체를 떠나, 자신이 지나온 시간의 모든 감각과 정보를 가지고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메타버스가 건설됐다는 설정에서 이번 이야기는 출발합니다.

작가 스스로 “과학에 대한 내 지식은 미천하기 그지없다. … 그래도 상상은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사이언스픽션까지 진출한 소감을 겸손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 ‘메타버스’를 허술하게, 우습게 만들지 않기 위해, 치밀하고 치열하게 이 새로운 개념들을 공부했다는 것이 곳곳에서 한 땀 한 땀 드러납니다. 그리고 어쩌면, 요즘 우리 모두가 장을 봐오곤 하는 범상한 식재료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메타버스’의 청사진은 우리 시대의 독보적인 우리말 이야기꾼 정유정의 손에 들어가서 ‘미슐랭 3스타 그 이상’의 요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범상하게 들리되 여전히 생경한 ‘메타버스 설정’이 작가의 주제의식을 몰입도 높게 담아내는 맞춤의 그릇이 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여기의 삶, 그리고 종종 망각되는 ‘한국적 진실’들과 찰떡처럼 달라붙는 그 문학적 성취를 감상하는 쾌감이 -이번에도 역시- 짜릿합니다. 정유정이 이번 이야기에 시도한 소설적 구조 역시 그 마지막 장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주제의식에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역시 정유정!’을 내적으로 부르짖게 합니다. 정말이지, 이 책을 직접 집어들어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경우에만 공유할 수 있는 소설적 쾌감입니다. “정말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요.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끊임없이 들려오던 쿵 소리의 정체가 뭔지. 먼바다로부터 밀려온 유빙이 갯바위나 이미 밀려와 있던 유빙 덩어리와 충돌하며 내는 굉음이었다. 한 번씩 부딪칠 때마다 산산이 부서진 유빙 가루가 물보라처럼 솟구쳐 올랐다. 몰려온 유빙들은 직소 퍼즐을 맞추듯 해안가 전역에 얼음 벌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구동토의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쿵쿵….. 언제부턴가는 내 머릿속에서도 유빙이 부딪기 시작했다. 빗장을 걸어 잠가둔 어떤 문이 충돌의 충격으로 열리고 있었다. 문안에서 지금껏 피해왔던 질문, 떠올리지 않으려 몸부림쳤던 생각들이 와르르 떠밀려 나왔다.

 승주는 집을 떠난 이후 어떻게 살았을까. 뭘 먹고 어디서 잤을까. 길에서 웅크리고 잤을까. 구걸을 하고 다녔을까.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며 밥을 얻어먹었을까. 아니면 심장이 멈출 때까지 내리 굶었을까. 눈을 감기 전 마지막 순간엔 무얼 생각했을까.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 나를 떠올렸을까.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졌다. 무릎이 접히는 바람에 계단 앞에서 고꾸라지듯 주저앉았다. 쿵 소리는 끊임없이 울렸다. 머릿속에서, 바다에서, 아니 온 세상에서. 그 소리가 승주의 부름으로 들렸다. 형. 형……

문장의 느낌도 ‘욕망 1부작’ [완전한 행복]과는 좀 달라졌습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되 풍부한 어휘의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문장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홱 돌아서는 그 기세는 여전하지만, 그야말로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던 [완전한 행복]의 문장들보다 온도가 몇 도는 훌쩍 올라갔습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다루는 그리움, 죄책감, 상실감, 고마움, 사랑, 생의지나 모종의 결의 같은 감정들을 실어 나르기에 더 적절한 느낌으로 미묘하게 바뀌었습니다. 특유의 파워가 살아있되, 문장에 있어서도 안주하지 않고 ‘장인의 방망이’를 하나 더 깎아냈습니다.
 
랑이 언니는 말없이 남자를 마주 보다 건반에 손을 올렸다. 전주가 끝나면서 노래가 시작됐다.

“아베마리아, 그라치아 플레나……”

생물학적 경계를 단숨에 지우는 목소리였다. 천상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노랫소리와 귀신 소리의 차이를 분명하게 알려주는 노래였다. 나로 말하자면 노래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막귀였으나, 청량하고 힘 있는 목소리 밑으로 저류처럼 휘도는 ‘무언가’는 느낄 수 있었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무언가. 그 무언가는 내게로 와서 새파랗게 타는 슬픔이 되었다. 나는 숨길을 닫고 눈을 감았다.

“마리아 그라치아 플레나……”

껌껌한 눈꺼풀 안에서, 만경유도장을 맨발로 뛰어다니던 네 살배기 승주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캠핑카를 빌려 바다로 가자던 승주의 장밋빛 광채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마당 잣나무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승주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제가 만든 기차역 안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승주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내게 얻어맞던 밤, 물끄러미 나를 보던 승주의 황무지 같은 눈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승주가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시체 안치대가 나타났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마리아 그라치아 플레나 아베 아베 도미누스 도미누스 테쿰……”

아마 작가는 본인의 책이 아니라 작가 자신에 대해 ‘칭송’하는 걸 그다지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 하지만 [영원한 천국] 출간과 함께 ‘실은 10년간 암투병을 해왔으며 이제 완치됐다고 판정 받았다’고 밝힌 걸 보고 새삼 놀라웠습니다. 뭐랄까, 인간으로서의 존경심이 저 밑바닥부터 치밀어 올랐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 지울 수 없었을 심리 상태로, 수술과 항암 치료를 비롯한 투병을 장기간 해오면서 그 와중에 이토록 날카로운 긴장감과 선 굵은 재미가 가득한 작품들을 잇따라 써내다니요. 심신을 갈아 넣는 창작에 임하고 있지 않을 때는 히말라야 등정에 나서 농담을 던질지언정, 세상에는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는 스타 작가. 너무 폼나게 멋있어서 제 가슴이 다 벅차오르는 느낌입니다. 작가 정유정만큼 ‘방망이 깎는 노인’의 자세로 문장을 깎되, 읽는 이에게는 그 노고의 부담감을 조금도 지우지 않는, 스스로에게만 냉정한 뜨거운 이야기꾼을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인간 정유정의 삶을 대하는 자세도 그런 작가로서의 모습과 맥이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화났어? 나랑 이제 말 안 하기로 한 거야?”

승주의 부름 사이로 제이의 목소리가 파고들어왔다.

“그렇게 눈꼬리 올려서 쏘아보면 뭐랑 닮은 줄 알아?”

잣나무 군락지 안쪽이었다. 나무에 가려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는 맞바람을 타고 직선으로 뻗어왔다.

“네가 좋아하는 사막여우랑 똑같아.”

가만 보니 옥희 씨보다 더 말이 많은 놈이었다. 좀 전에는 휴게실에서 윤식 씨와 떠들고 있더니, 이번엔 잣나무 숲에서 누군가와 떠들고 있었다. 그것도 연애질할 때에나 쓸 법한 솜사탕 목소리로.

“금방 내 욕 했지?”

나는 쇠사슬을 붙들고 몸을 일으켰다. 제이의 달착지근한 밀어를 등지고 돌아서서 하늘을 봤다.

“눈빛 다 읽혀.”

듣다 보니 누군가와 함께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화상통화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제이의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흘러와서 내 어깨를 타고 넘어갔다. 봄날의 개울물처럼 나직하고 나른하게. 문득 제이의 노트북 화면에서 시원스럽게 웃고 있던 여자가 떠올랐다.

“거기 11시쯤 됐지? 여긴 아직 새벽이야.”

나도 모르게 손목시계를 봤다. 여기가 11시였다.  



정유정의 작품은 영화학교 수업이나 문예창작과에서 첫 자를 시작해 마침표를 찍은 작품이 아닙니다. 삶의 한복판에서 문학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작품들입니다. 세상과 어른들로부터 보살핌 받지 못하며 성장한 유년기를 그 누구보다 강렬하게 기억하지만, 그 자신은 덜어내고 더할 것도 없이 어른으로서 뚜벅뚜벅 성장한 인간. 삶이 몰아대는 곤경과 시험에 그때그때 자신의 최선을 다해 대처하면서도, 그 과정에 박힌 굳은살이 영혼까지는 침투하지 않도록 막아내는 ‘진짜 전쟁’에서 이겨낸 사람을 그의 이야기들은 연상시킵니다. 정유정의 작품들을 읽고 있으면, 그가 자신을 희생해 남을 돌보는 삶으로 내던져진 인간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그의 작품세계가 삶에 응석을 부리는 자기연민으로부터 대척점에 서 있다는 사실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3년 전 [완전한 행복]을 읽으면서 함께 썼던 소갯글을 제가 이렇게 끝맺었더라고요. ‘숨쉴 틈 없이 읽히는 강력한 문장들로 가장 연약한 사람들의 가려진 상처들을 섬세하게 대변하는 이 어른스러운 주제의식이야말로 지금 정유정 작가가 한국의 대표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나눠주고 있는 독보적인 소설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3년이 지나 새로운 맺음말을 쓰려고 해봤습니다. 작가 정유정의 작품세계는 여전하면서도 한층 새로워졌으나, 정유정 작가에게 바치고 싶은 헌사는 여전히 이것, 이라 다시 한 번 끄집어 내어 적어봅니다.

도처가 스포일러인 작품에서 발췌낭독할 부분을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미 [영원한 천국]을 읽은 분들이 많지만요. 그래도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을 위해, 서두 부분 중에서도, 이 책의 끝 장까지 이르렀을 때 정말 많은 복선들이 함축돼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대목을 골라 낭독했습니다. [영원한 천국]에는 ‘나’ 1인칭 화자가 두 명 나옵니다. 이 글의 도입부에 인용한 대목은 그 중 하나인 전직 동물학자 ‘이해상’의 독백입니다. 그리고 본격 낭독한 대목의 ‘나’는 전직 물리치료사인 청년 ‘임경주’입니다. 경주는 자신이 아버지 대신 돌봐왔던 동생의 석연찮은 사망 뒤에 바닷가에 고립된 노숙자 쉼터 ‘삼애원’에 보안요원으로 취직합니다. 낭독한 대목은 임경주가 그 삼애원에 들어간 직후의 상황입니다. ‘제이’는 임경주의 동료 보안요원입니다.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 늘 깊이 감사드립니다. 1년에 며칠 채 되지 않는 이 찰나 같은 가을에도 [북적북적]과 함께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 [북적북적]은 제때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은행나무 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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