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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어린 명품의 재탄생…대법 "개인 사용 목적 명품 리폼은 상표권 침해 아냐"

추억 어린 명품의 재탄생…대법 "개인 사용 목적 명품 리폼은 상표권 침해 아냐"
▲ 명품 리폼

"이 가방은 저의 어머님이 들던 생전의 것입니다. 제 나이가 75세가 넘고 보니 어머님이 뵙고 싶습니다. 낡은 가방에 마음이 슬퍼집니다. 행복하게 추억하고 제 남은 날들을 돌아가신 어머님과 함께하게 잘 고쳐주세요."

리폼업체 '가죽리본'의 정헌석 대표가 지난달 70대 여성 의뢰인으로부터 받은 간절한 손편지의 내용입니다.

의뢰인은 수백만 원으로 추정되는 가죽 가방을 리폼해 달라고 맡겼습니다.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 가방을 수선해 만든 '리폼' 제품이 루이비통 상표권을 침해하는지가 논란이 되면서 명품 리폼의 세계에 관심이 쏠립니다.

명품 리폼은 단순한 수선을 넘어 가방의 원단과 부속품을 활용해 완전히 다른 형태의 가방이나 지갑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말합니다.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의 특성상 제품이 낡아도 쉽게 버릴 수 없고, 대개 수십 년간 소장해온 물건인 만큼 의뢰인의 소중한 추억과 사연이 깃든 경우가 많습니다.

리폼업체 '강남사'의 이경한 대표는 "우리에게 들어오는 제품은 새것이 아니라 AS도 안 되고 유행도 지나, 버려질 기로에 서 있는 것들"이라며 "남들이 버리려는 것을 재활용해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드리는 과정을 보며 환경 보호에 기여한다는 자부심과 함께 참 좋은 직업을 가졌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명품 리폼을 의뢰하는 이들은 대개 구입한 지 30~40년 된 제품을 들고 수선실을 찾습니다.

수선비가 제품의 잔존 가치보다 높은 '배보다 배꼽이 큰'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의뢰인들은 기꺼이 지갑을 엽니다.

오랜 세월만큼 저마다의 절절한 사연과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낡은 물건을 해체해 다시 만드는 리폼의 본질이 '오래된 가치'의 보존에 있는 까닭에 자연스럽게 리폼은 한 세대의 추억을 다음 세대로 잇는 매개체가 됩니다.

지난 5일 '가죽리본'의 정 대표는 "한 외국인은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지갑이 가죽 조각 수준으로 삭아 있었는데, '이 조각 하나라도 좋으니 붙여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라"며 "가죽을 조합해 복원해드렸더니 아이처럼 기뻐하던 모습이 선하다"고 회상했습니다.

그는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지나면 리폼 의뢰품이 많아진다고 밝혔습니다.

어른들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물려받은 핸드백을 들고 리폼을 의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난다는 설명입니다.

정 대표는 "요즘은 젊은 분들도 부모님의 손때 묻은 가방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리폼해 소중히 간직하려 한다"며 "하나하나 사연을 듣다 보면 뭉클한 이야기가 많아 일하며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루이비통이나 프라다, 구찌 같은 고가 브랜드 가방을 다루다 보니 공정이 까다로워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면서도 "하지만 의뢰인들에게 제작 기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소중한 기억을 안고 있는 가방을 다시 살리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리폼업체 '탑크린'의 주상재 대표는 "60대 정도로 보이는 항공사 승무원 출신 여성분이 첫 해외 비행 때 파리에서 사서 소중히 간직한 명품 가방을 굳이 해체해 리폼하겠다고 오셨다"며 "'시집가는 딸에게 내 젊은 날의 추억을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또 25년간 '리폼사'를 운영해 온 서인수 대표는 "과거 파리에서 살았던 시절의 추억 때문에 35년 된 명품 옷을 아까워 못 버리고 리폼해달라고 가져온 부부가 기억에 남는다"며 "리폼은 단순히 비싼 옷을 수선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켜켜이 쌓인 추억을 고치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내 손을 거쳐 옷이 새롭게 생명을 얻는 과정 자체가 커다란 감동"이라며 "리폼된 옷을 받아 들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고객들을 볼 때면 여전히 가슴이 벅차고 뿌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달 26일 대법원은 루이비통이 '강남사'의 이경한 대표를 상대로 낸 상표권 침해 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특허법원으로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개인적 사용 목적의 명품 수선 요청을 받아 리폼 서비스를 제공하는 행위는 상표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동시에 리폼업자의 수선 서비스가 명품 소유자 개인적 사용 목적이 아니라 실질적인 상품 제조·유통으로 볼 수 있다면 상표권 침해에 해당한다며 그 판단 기준도 제시했습니다.

이 대표는 2017∼2021년 고객으로부터 건네받은 루이비통 가방을 해체한 뒤 원단, 금속 부품 등 원자재를 이용해 크기·형태·용도가 다른 가방, 지갑을 제작했습니다.

리폼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받은 제작비는 개당 10만∼70만 원이었습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루이비통과의 4년 법정 다툼에서 비로소 한숨 돌리게 된 이 대표는 사실 패소까지 각오했었습니다.

이 대표는 9일 "1심과 2심에서 연달아 졌기 때문에 판결이 뒤집힐 확률은 10% 미만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이런 전례가 거의 없다고 했다"며 "기적처럼 승소한 덕분에 소송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합의서에 사인했던 동료들도 이제는 마음 편히 본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다행"이라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기술자의 자부심과 고객의 사연으로 고된 소송을 버텨낼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가끔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분들이 계신다"며 "어머니가 선물해주셨는데 먼저 가셨다고, 가방 수선비가 가방값보다 더 나오는데도 고쳐 달라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찡해진다"고 말했스빈다.

대법원 판결 이후 리폼 의뢰는 증가세라고 합니다.

그간 명품 리폼이 불법인지를 두고 고민하던 고객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고 리폼업체들은 밝혔습니다.

이 대표는 "보통 하루에 10~20건 사이였던 의뢰가 최근 몇 배로 늘었다"며 "근무 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지만,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려 새벽같이 나와 밤늦게 들어가는 생활을 반복 중이다. 지금 제품을 맡겨도 6~7개월은 기다려야 할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리폼사' 서 대표도 "보통 일주일 정도면 작업이 완료되는데, 대기 중인 주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며 "이미 리폼을 마쳐 배송을 기다리는 택배 상자만 한 트럭이 나갔을 정도"라고 밝혔습니다.

우리나라 리폼 시장이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기술력과 속도감을 갖추게 된 배경에는 1970~80년대 한국 봉제 산업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장인들이 있습니다.

'강남사' 이 대표는 "지금 연세가 65세 정도 되는 장인들의 경력이 50년이 넘는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갈 수 있지만, 우리 세대는 초등학교 졸업 후 곧장 현장에 뛰어들어 기술을 익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분들이 과거 가방을 대량 생산해 수출하던 시절 쌓았던 탄탄한 봉제 기술이 최근 세계적인 업사이클링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한국만의 독특한 리폼 문화로 확 타오른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명품 가격의 가파른 상승도 리폼의 인기를 높입니다.

이 대표는 "고객들이 샤넬 같은 가방을 맡기며 옛날엔 200만~300만 원대에 샀는데 지금은 2천만 원이라고 말씀하시곤 한다"며 "물가 상승률보다 몇 배나 비싸진 명품 가격 탓에 새로 사기엔 부담이 너무 크고, 그렇다고 고가의 물건을 버릴 수도 없는 상황에서 리폼이 가장 합리적인 차선의 선택이 된 것"이라고 봤습니다.

리폼 비용은 업체와 제품에 따라 30만~80만 원대, 제작 기간은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 길게는 보름 이상 소요됩니다.

직장인 김 모(34) 씨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루이비통 가방을 지난달 크로스백 형태로 리폼했습니다.

해당 가방의 가격은 구매 당시 약 200만 원이었습니다.

김 씨는 14일 "리폼 비용이 70만 원으로 적지 않지만 어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가방이라 새 가방을 사는 것보다 의미가 더 크다"고 말했습니다.

명품 가방 리폼 과정을 담은 영상 콘텐츠는 온라인에서도 인기입니다.

기존 제품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바꾸는 방식이 MZ세대 사이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제품'을 갖는 소비 방식으로 주목받습니다.

지난해 8월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프라다 가방과 생로랑 클러치를 리폼한 후기 영상은 각각 59만 회, 37만 회 조회됐습니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명품 가방은 오래돼 낡더라도 브랜드 고유의 문양과 이미지가 남아 있기 때문에 리폼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다시 사용할 수 있다"며 "비용이 들더라도 리폼을 선호하는 것은 단순한 가격보다 감정과 가치를 중시하는 '가치 지향적 소비'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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