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2011 사라진 도시 -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부제로 동일본 대지진을 조명했다.
2011년 3월 9일, 일본 미야기현에는 어김없이 지진이 일어났다. 10년간 4.0 이상의 지진이 3,008건 일어나 연평균 300건의 지진이 있는 이곳은 거의 매일 흔들림을 느끼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야기현 앞바다에서 7.3도의 지진이 일어났지만 미야기현 사람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끔찍한 대재앙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2011년 3월 11일, 9.0도의 지진이 일어났다. 이는 엄청난 희생자를 만들어냈던 한신 아와지 지진의 천 배 이상 강력한 지진이었다.
일본인 아내 마유코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던 김일광 씨의 마을에는 이날 쓰나미 경보가 울렸다. 이에 일광 씨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아내를 찾아 어린이집에 있는 아이들을 데리러 갔다. 그런데 이때 섬뜩한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난생처음 듣는 기이한 소리는 순식간에 이들을 덮쳤고 일광 씨는 아내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한국인 경임 씨의 일본인 남편 유우키 씨는 마을 의용 소방 대원. 그는 수문을 잠그고 마을 사람들 피난시키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후 쓰나미로 물은 경임 씨 집의 2층 계단까지 차올랐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일광 씨. 눈을 뜨자 주변은 온통 폐허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곁에 있던 아내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어린이집에 갔던 삼 남매는 무사히 대피를 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 바다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바다에서 거대한 불이 나기 시작한 것.
지진과 쓰나미, 화재가 3시간 안에 연달아 터지며 미야기현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선박과 유류 저장 시설이 밀집해 있던 미야기현의 화재는 물로는 진화할 수 없는 화재라 마을 사람들은 이를 그저 지켜보며 구조만 기다릴 뿐이었다.
다음 날 3월 12일, 동일본 대지진의 현장에 구조를 위해 나선 한국인 구조대원들. 이들은 다른 재난 현장과는 너무나 달랐던 동일본 대지진의 현장에 경악했다. 그럼에도 한 명이라도 구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현장을 수습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들이 발견한 희생자는 바로 일광 씨의 아내 마유코였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을 여전히 품고 사는 일광 씨. 그는 아이들을 위해 현신적이었던 엄마이자 사랑스러운 아내였던 그를 그렇게 떠나보내야 했다.
다음 날 바다에 불길이 잦아들고 구조 헬기가 등장했다. 그런데 구조 헬기에서 내린 구조대원은 나오코 씨를 찾았다.
사실 이들은 나오코 씨의 아들이 SNS에 올린 구조 요청의 글을 보고 찾아왔던 것이었다. 장애 아동 시설의 원장이었던 나오코 씨는 대피소에서도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를 받은 아들이 구조 요청 글을 작성하며 대피소에 고립되어 있던 수백 명의 시민들이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던 것.
무사히 대피를 한 경임 씨는 아이들과 함께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의 대피를 돕기 위해 나갔던 남편 유우키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경임 씨는 가지 말라고 잡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남편을 그리워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희생된 희생자 1만 6천여 명. 침수 면적만 서울의 약 93%에 당시 쓰나미의 최대 높이는 약 40미터로 아파트 15층 높이에 달했다. 그렇게 거대 쓰나미가 도시를 집어삼킨 일본 최악의 날은 지구 최악의 날이 되었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에 폭발이 일어났고 이에 방사성 물질이 대기와 바다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것. 원전 폭발로 인한 최악의 참사가 만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쓰나미 등 자연재해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자연재해로 시작된 원전 폭발, 하지만 그 결과는 명백히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었다.
이에 도쿄 전력의 경영진 3명은 업무상 과실 치사상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열린 최종 선고 공판에서 전원 무죄가 확정되었다. 원전 설계 당시 기준에 충족하였고 천재지변 예측 및 대비가 불가능해 개인의 책임은 아니라는 판단이 있었던 것.
그런데 이들과 너무나 달랐던 이와테현 해안의 후다이 마을. 이 마을의 고토쿠 촌장은 약 120억 원을 들여 수문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센 주민들의 항의에도 그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1984년 거대 수문을 완성시켰다.
앞서 지진과 쓰나미로 큰 희생을 겪었던 마을. 그리고 1933년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고토쿠 촌장은 수문을 만들어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동일본 대지진의 그날 후다이 마을은 어선을 살피러 방파제에 갔던 주민 한 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안전했다. 바로 그 수문 덕분이었다.
수문의 쓰임새를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고토쿠 촌장, 대지진 후 촌장의 뜻을 알아차린 주민들은 마을 입구에 비석을 세워 그를 기렸다.
동일본 대지진 한 달 후 경임 씨는 무사히 출산했다. 하지만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나 컸던 경임 씨는 외로움에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해 크리스마스 무렵 집 근처 해안에서 발견된 남편의 유해. 경임 씨는 남편 유우키 씨에게 "항상 고맙고 지금도 사랑해"라며 마음을 전했다.
올해로 15주기를 맞은 동일본 대지진. 여전히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점점 잊어가고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은 것이 현실.
그때의 기억만 떠올려도 괴로운 생존자들은 누군가의 쓰라린 기억이 누군가를 구할 내일의 답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당시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그것이 자신들이 살아남은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
순간의 안녕이 무너진 그날 이후 2만여 명의 사람들은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고 2천여 명의 사람들은 여전히 가족 곁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우리 모두 일상의 소중함을 잊지 말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살아야 할 것이다.
(SBS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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