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빙 피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계량 경제학의 아버지이자 근대 경제이론의 개척자입니다. 그런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흑역사가 있습니다. 역대 최악의 대공황을 불러온 1929년 뉴욕 증시 대폭락 직전 피셔는 선언했습니다. "이제 주가는 영구적으로 높은 고원에 도달한 것 같다."
우리는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압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에 뉴욕 증시는 대폭락을 시작했습니다. 이날 하루에만 투자자들은 1천290만 주를 투매했습니다. 종전 하루 매도량 최고 기록인 400만 주를 3배 넘게 경신했습니다. 다음 주 '검은 화요일' 폭락장이 이어졌고 이후 전 세계가 대공황의 늪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을 부른 주요 원인이 됐습니다. 미국 증시가 대공황 이전 수준의 지수를 회복하는 데에는 그후 20년 넘게 걸렸습니다. 당대 최고의 경제 전문가였던 그는 왜 이런 치명적 오판을 했을까요? 후대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① 기술 혁신에 대한 과도한 낙관: 1920년대 자동차와 라디오, 전기 등 혁신적 기술이 속속 보급됐습니다. 신기술은 생산과 소비, 경제의 양대 축에서 눈부신 성장을 유도했습니다. 특히 피셔는 기술적 진보가 기업의 생산성을 영구적으로 높여 주가가 계속 오를 수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② 통화 정책에 대한 맹신: 피셔는 당시 연방준비제도(Fed)가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과거와 같은 급격한 경기 순환은 사라졌다고 판단한 이유입니다. 더욱 정교해진 재정과 통화 정책으로 경기 사이클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③ 부채의 위험성 간과: 대공황 직전 미국 주가 지수 급등은 레버리지(빚)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주가 급등으로 근로가 아닌 자산으로도 큰 소득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된 시민들은 너도 나도 주식 시장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당장 모아둔 돈이 없었던 그들은 레버리지를 이용했습니다. 주가가 뛸 때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빌렸던 돈을 빠른 시간 안에 갚고 더 큰 자금을 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가가 꺾일 경우 반대매매로 주가 폭락에 가속도가 붙는 효과는 간과했습니다.
④ 확증 편향: 피셔는 스스로 주식에 막대한 자산을 투자한 상태였습니다. 자신의 자산 가치가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객관적 해석을 방해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피셔의 실패 원인을 열거하고 보니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전례 없이 치솟는 우리 주식 시장과 겹쳐 보이는 구석이 많습니다. 현재 주가를 밀어 올리는 동력은 AI 기술의 발전과 이에 대한 기대입니다. AI가 새로운 산업과 소비를 창출할 거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AI의 도입으로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AI가 장미빛 미래만 그리는 것은 아닙니다. 최근 시트리니 리서치에서 낸 보고서가 미국 증시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AI로 인해 항상 희귀 자원이던 지능이 거의 무료 공급되면서 경제적 가치를 잃습니다. 기업들은 AI로 고급 지능 인력을 대체합니다. 그 탓에 생산성 증대로 기업의 이익은 늘었는데 경제 주체들의 실질 수익은 감소합니다. 결과적으로 소비가 줄고 특히 주택 모기지 등 대출 상환 불능 사례가 급증하면서 경제는 2008년 금융위기 사태 이후 최악의 공황에 빠져듭니다. 또, AI가 최적의 결제 경로를 찾아주면서 카드사 등은 매출이 급감하고 줄도산에 빠집니다. AI가 가져올 '파괴적 혁신'이 예상보다 크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게 해당 보고서 내용입니다. 물론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위험 가능성을 제시한 시나리오입니다. 다만 AI의 발전이 상당한 불확실성을 내포한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오판 요인들도 시사점이 있습니다. 지금의 국내 주식시장 활황도 정부의 정책적 지원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유발하는 여러 요소들을 걷어냈습니다. 하지만 정책으로 주가를 계속 밀어 올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위적인 시장 개입이 더 큰 추락을 부르기도 합니다. 물론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후 각국 정부는 경기 변동에 대응하는 많은 방책을 개발했고 써왔습니다. 그럼에도 경기 변동은 여전히 존재하고 자산시장의 부침은 상존합니다.
주식시장의 레버리지(빚) 증가 가속화도 비슷합니다. 최근 한국거래소는 주식 신용거래융자 잔고가 31조 6천384억 원으로 사상 최고치를 넘어섰다고 밝혔습니다. 연초의 27조 4천207억 원보다 4조 2천177억 원, 약 15.4% 급증한 수치입니다. 빚까지 내서 쏟아붓는 자금 수급이 지수를 떠받치는 형국입니다. 여기에 거의 전 국민이 주식시장에 뛰어든 상태에서 주가의 하락 위험성을 거론하기도 조심스럽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욕을 먹어 수명을 얼마나 연장시킬까 걱정하는 판국이니까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라고. 나 빼고 모두가 주가 급등에 환호하는데 애써 외면하라고? 이런 불장에서 있던 주식 빼고 나가라고? 오해를 피하기 위해 미리 밝힙니다. 저도 우리 주식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액수는 얼마 안 되지만 제가 움직일 수 있는 자산의 상당 비율입니다. 따라서 저 역시 우리 주식시장의 호황이 계속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잔치는 없습니다. 그러니 다음 몇 가지만은 꼭 염두에 뒀으면 합니다.
① "이번에는 다르다"는 문구를 경계하라: 20세기 최고의 주식 투자자로 꼽히는 존 템플턴 경의 경구입니다. "투자에서 가장 위험한 네 단어는 '이번엔 다르다(This time is different)'이다." 피셔 역시 1929년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믿었지만, 경제의 기초 체력을 넘어선 거품은 반드시 터지기 마련입니다. 상식을 넘어서는 상승장은 끝나면 더 가혹한 요금을 청구합니다. '영구적인 고원'은 없습니다. '내리막길'에 대한 대비책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합니다.
② "달걀은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를 지켜라: 변동성이 커진 장세에서는 더더욱 분산 투자의 기본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 가치에 무게를 둔 이른바 '미래주'는 비중을 축소하고 실적을 기반으로 높은 배당을 하는 '배당주'를 늘리는 것이 유리합니다. 아울러 깊고 긴 계곡을 지나가더라도 버틸 수 있도록 레버리지를 최대한 털어내고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것도 긴요합니다. 불확실성이 클 때 섣부른 투자 대신 투자금을 지키는 것 역시 좋은 투자입니다.
③ 전문가의 권위에만 의존하지 말아라: 피셔는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지만 시장의 광기를 읽지 못했습니다. 특정 전문가나 매체의 낙관론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마십시오. 그들이 손해를 대신 물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거시 경제 지표(금리, 환율, 가계 부채 등)를 점검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적어도 여러 전문가의 다양한 관점과 분석을 듣고 냉정하게 판단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경구는 결국 '과욕을 버려라'입니다. 뻔한 공자님 말씀입니다. 하지만 모든 불행의 근원은 욕심이니까요. 더 쉽고 빠르게 큰 재산을 마련하겠다는 욕심, 남들이 버는 만큼 나도 벌어야겠다는 욕심을 내려놓으면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식시장의 지금까지 주가 등락을 보면 결국 우상향해 왔습니다. 물론 그 사이 여러 굴곡과 등락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 말은 조금 참고 지켜보면 투자 기회는 또 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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