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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살았던 왕, 단종 최후의 기록은 [사실은]

남자와 살았던 왕, 단종 최후의 기록은 [사실은]
조선의 여섯 번째 왕, 단종의 비극적인 최후를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여운을 이어가기 위해 배경이 된 강원도 영월을 방문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침체에 빠진 한국 영화에 숨통을 틔울 거란 기대도 나왔습니다.

단종은 세종의 적장자인 문종의 적장자였습니다. 적장자의 적장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차차기 국왕으로 예정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승계자였습니다. 조선 27대 왕들 가운데 왕의 적장손인 원손과 세손, 그리고 왕세자의 지위를 모두 경험한 왕은 단종이 유일했습니다.

사실은 단종 최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단종 표준영정. 2021년 권오창 제작, 단종역사박물관 자료.

하지만 이런 전무후무한 정통성은 삼촌의 욕망 앞에서 별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단종은 삼촌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난 뒤 유배지 영월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의 나이 불과 16세였습니다. 권력 앞에 혈육도 없다는 냉혹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 역사적 비극은, 훗날 호사가들 입에 두고두고 오르내렸고 영화와 드라마의 매력적인 소재가 됐습니다.

그런데 단종의 최후를 두고는 약간의 설왕설래가 있습니다. 자결설과 타살설이 뒤섞였습니다. 물론, 보통의 영화와 드라마는 단종이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걸로 묘사합니다.

실제 역사적 기록은 어떨까요. 정사(正史)를 중심으로 그 기록을 추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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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 청령포. 국가유산진흥원 국가유산채널 자료.

우리는 역사를 기록의 망원경을 통해 봅니다. 아무래도 사건이 벌어진 당대, 공식적으로 기록된 정사가 가장 정확하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단종 사망 시기와 가장 가까운 정사,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의 역사를 가장 먼저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공식 기록은 '자결'이었습니다.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가 단종 복위 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처형이 결정되자, 단종이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겁니다. 세조가 단종을 처형한 건 아니었다는 의미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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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대에도 이에 대한 반박이 나왔습니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6명의 신하, 즉, 생육신 가운데 한 명인 조려는 <어계집>에서 단종 사망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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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계집>은 조려의 손자가 흩어져 있던 시문을 모아, 단종 사망 59년 뒤 간행됐습니다. 세조가 직접 사약을 내렸다, 그런데 금부도사가 집행을 주저하자, 심부름꾼이 대신해 단종의 목에 활시위를 걸어 살해했다는 겁니다. 세조가 단종의 처형을 직접 명했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 단종 자결설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도 나왔습니다. 조선 중종 대의 문신이었던 이자는 <음애일기>에서 단종의 자결설에 대해 "여우나 쥐 같은 놈들의 간악하고 아첨하는 붓장난"이라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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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초들은 설화로 부응했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영월 지역에서는 단종이 태백산신이 됐다는 이야기가 퍼졌다고 합니다. 이른바 '단종 설화'입니다.

단종에 대한 연민이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민초들의 믿음으로, 나아가 단종을 신성한 존재, 불멸의 존재, 신성한 신으로 만드는 서사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문화적 기억으로서 단종 설화는 이야기 전승자들이 기억의 주체가 되어 단종의 죽음과 관련한 민중의 경험을 서술하는데 집중하고 있으며 이렇게 형성된 집단적 정체성은 자신들의 안녕을 위한 단종 숭배로 이어진다. 또한 이미 구성된 이야기에 대한 구연자의 메타적 발화나 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통해 공식적 기억에 대한 전복의 시도를 포착할 수 있다.
- 김신정. (2021). 문화적 기억으로서의 단종유배 관련설화 연구. 韓國古典硏究, 55, 7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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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의 단종 장릉.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자료.

당대에도 선비들은 기록으로, 민초들은 설화로 공식 기록에 대한 전복 시도를 이어간 셈입니다.

절의를 중시한 사림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적으로 봤고, 세조의 손자였던 연산군은 이를 명분으로 이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도 했습니다. 1498년을 정국을 휩쓸었던 무오사화(戊午史禍)입니다.

하지만, 연산군 이후 사림 세력의 정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합니다. 사림들 사이에서는 조선 왕조가 개국할 때 고려에 충성을 바친 정몽주와 길재, 단종을 지키려 한 사육신과 생육신 등은 절의를 구현한 상징적 존재가 됐습니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세조의 혈통을 이어 받은 후대 왕들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리스크가 있다는 점입니다. 선비들은 그 절충점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꽤나 정무적이었습니다.

단종 사후 88년, 시강관이었던 한주가 인종에게 "세조가 당대의 난신이 후세의 충신이라고 했다"면서 세조 역시 사육신을 재평가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인종은 세조의 증손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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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세조 역시 사육신을 높게 평가했다, 다만, 당시 상황상 불가피하게 처벌을 했을 뿐이라는 내용입니다. 적어도 세조실록에는, 세조가 "당대의 난신이 후세의 충신"이란 말을 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한주 역시 세조가 언제 어디서 이런 말을 했는지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육신과 단종 충신의 역사는 조선후기 지배집단인 국왕과 사대부에게 모두 용인될 수 있는 내용으로 정리되어 그들 모두의 기억으로 기념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두 지배집단 사이의 타협이 결론에 이르렀다는 뜻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라는 요구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김영두. (2010). 단종충신 追復 논의와 세조의 사육신 인식. 사학연구, 98, 1-40.

이런 흐름 속에서, 단종의 최후에 대한 진상 규명은 순조롭게 진행됐습니다. 조선 중기에 이르자, 신하들은 왕 앞에서 단종의 타살설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단종 사후 111년, 선조 때였습니다. 당시 문신인 기대승이 경연장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은 단종 최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영의정 정인지가 단종을 처치해 달라고 해서 별 수 없이 세조가 허락했다, 결국, 금부도사를 통해 사약을 내렸다며 그 증거가 현장에 있다는 내용입니다. 기대승은 단종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정인지가 상서롭기 못한 인물이라며 비판하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이후로 단종 타살설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결국, 단종 사후 242년, 당시 왕이었던 숙종의 입을 통해 세조에 의한 단종 타살설은 공식화됩니다. 조계의 <어계집> 내용 거의 그대로 입니다.

사실은 단종 최후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단종 사망에 대한 첫 공식 기록은 자결이었습니다. 세조실록은 당시의 상황을 무미건조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비들은 선비들대로, 민중들은 민중들대로 공식적인 기억을 전복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단종 사망의 직접적인 가해자가 세조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무오사화 같이 중간 중간 부침을 거치긴 했지만, 절의를 중시했던 사림 세력의 정계 진출과 맞물리며 전복 작업은 꽤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그렇게 단종 사후 88년, 단종을 지지했던 사육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공식 석상에서 시작됐습니다. 왕위 찬탈 당사자인 세조가 "당대의 난신이 후세의 충신"이라는 말을 했다는 식으로, 군신 간 절충점을 찾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단종 사후 111년, 단종이 세조에 의해 비참하게 희생됐다는 타살 서사가 왕이 참여한 정치 공간에서 거론됐고, 단종 사후 242년, 왕이 타살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기록이 나왔습니다.

단종의 최후와 관련된, 250여 년의 지난했던 역사입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속 한 장면 (사진=쇼박스 제공, 연합뉴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적 사실은 당대의 공식 기록에 수렴합니다. 이런 관점이라면 단종의 최후는 자결로 보는 게 타당할 겁니다. 하지만, 시대의 권력 재편, 나아가 시대적 연민과 맞물리며 단종의 최후는 권력에 의한 희생으로 재구성됐습니다. 기록되어진 팩트보다 시대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개입시킨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돌에 새겨진 칙령이 아닙니다. 단종의 최후가 그러했듯 시대가 덧붙여 쓰는 주석과도 같습니다. 시대의 시선 속에 보완되고 첨삭된 사실, 우리는 이를 '역사'라고 부릅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 없는 대화"라는 에드워드 카의 이 진부한 구절처럼 말입니다.

"1457년 청령포, 역사가 지우려 했던 이야기"로 씌인 <왕이 사는 남자> 시놉시스 마지막 문장. 어쩌면 "1457년 청령포, 역사가 분투해 되살린 이야기"가 더 적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료 조사 : 작가 김효진, 인턴 황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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