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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근로자를 노동자로 부르려면

이번 정부 들어 고용노동부는 '노동'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드러내는 작업 중이다. 우선, 고용노동부의 약칭을 고용부에서 노동부로 바꿨다. 근로라는 단어도 노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근로감독관 명칭을 노동감독관으로 바꿨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1953년 이후 73년 만의 변화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 또한 노동절로 이름을 되찾았다.

1920년대부터 노동절 혹은 메이데이로 불렸던 이름을 근로자의 날로 바꾼 건 군사정권이었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은 근로자의 날이라는 명칭을 도입했다.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라는 명칭에는 근면성실하게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가치관이 투영됐다. 일제시기부터 해방공간을 거치며 명맥을 이어왔던 사회주의적 노동자상과 단절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처럼 '근로'라는 명칭을 '노동'으로 바꾸는 작업은 노동의 가치와 주체성을 되찾는 일이다. 소년공 출신의 대통령, 민주노총 출신의 노동부 장관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하지만 '근로자'라는 명칭을 '노동자'로 바꾸는 작업은 앞서 말한 사례들만큼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근로기준법이 제정된 1953년부터 법적 용어로 사용된 근로자가 내포하는 의미와 맥락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근로자라는 단어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나 노조법상 근로자 등 노동법의 보호 대상으로 인정된 이들을 뜻한다. 반면 노동자라는 단어는 노동법에서 근로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일하는 사람 일반을 포괄하거나, 오히려 근로자를 제외한 일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때문에 근로자라는 단어를 노동자로 1대1로 대체하게 되면 실무적으로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부는 최근 '노동자 추정제' 도입을 추진한다고 설명했다. 노무제공자가 민사사건에서 임금이나 퇴직금, 해고나 징계 등을 다툴 때 우선 노동자로 추정하고 노동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책임을 노무수령자가 지도록 하는 법안이다. 노동자 추정제 자체의 효과성에 대한 논의는 별론으로 하고, 노동부가 제도 설명 과정에서 '근로자 추정'이 아닌 '노동자 추정'이라고 지칭하면서 혼동을 가져왔다.

노동부가 설명하고 있는 법안(의안번호 15572, 근로기준법 일부개정법률안, 25.12.24, 김주영 의원 발의) 원문에는 '근로자 추정', '근로자성', '근로자'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부는 단어 변경에 대한 설명 없이 이를 '노동자 추정', '노동자성', '노동자'라는 단어로 바꿔놓았다. 김영훈 노동부장관이 의지를 가진 '노동 복원하기'의 일환으로 보인다.

근로자(employee)와 노동자(worker)를 법적으로 구분해서 수십 년간 사용해 온 만큼, 두 단어를 대체하려면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노동부의 노동자 추정제 설명을 살펴보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추정한다는 의미인데, 이를 노동자라고 표현하면서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노동부의 해당 설명자료 배포 이후 많은 언론이 "프리랜서, 배달기사도 노동자로 추정", "프리랜서 등 870만 명도 노동자"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노동부의 단어 선택으로 인해 '배달기사가 노동자로 추정된다'는 의미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추정된다는 것인지 불분명하게 전달됐다. 심지어 노동자 추정제와 '일하는 사람 기본법'을 함께 설명하면서 '노동자'와 '일하는 사람'이 더욱 혼동되도록 했다. 근기법상 근로자를 노동자라는 단어로 대체해버리면, 노동법의 보호 밖에 있는 일하는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불러야할까. 이런 상황에서 근로자 용어를 노동자로 단순 대체할 경우, 오히려 모든 일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인 노동자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셈이기도 하다.

배달기사

말과 글을 바꾸는 건 중요한 일이다. 다만 수십 년간 그 단어를 둘러싼 맥락과 역사, 용법이 존재하는 만큼 변화를 위해서는 체계정합성에 대한 검토와 시민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는 헌법과 근로기준법에서 '근로'라고 명시된 부분을 변경해야 하는 상당히 큰 작업이기도 하다. 모두에게 익숙한 근로라는 단어를 노동으로 한 번에 바꾼다고 해서 노동 존중 사회가 갑자기 도래하지는 않을 일이다. 변화를 가져오는 일은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하지만 서서히 뚫어내는 과정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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