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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마지막이 될 검찰의 '거대 자본' 수사 [취재파일]

'족쇄 찬 리바이어던'과 '부재하는 리바이어던', 그리고 자유를 향한 길

어쩌면 마지막이 될 검찰의 '거대 자본' 수사 [취재파일]
독재국가가 불러오는 공포와 억압 그리고 국가의 부재로 나타나는 폭력과 무법 상태 사이에 자유로 가는 좁은 회랑 (narrow corridor to liberty) 이 끼어 있다.

-<좁은 회랑>, 대런 애쓰모글루ㆍ제임스 A. 로빈슨

남한과 북한, 코스타리카와 과테말라는 모두 비슷한 위치와 비슷한 문화, 비슷한 구성원들을 공유하는 상황에서 세워진 나라다. 그러나 이들은 정반대의 발전 경로를 걷게 되었다. 한반도의 한 국가는 번영하는 세계의 어엿한 한 축이 되었지만, 다른 한 국가는 최악의 독재와 최악의 경제로 신음하는 '불량국가'가 되었다. 카리브해 연안의 한 국가는 민주주의를 이룩한 중진국으로 거듭났지만, 다른 한 국가는 마약 카르텔로 신음하는 만년 후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무엇이 이들 국가들의 진로를 이토록 극명하게 갈라놓았을까?

세계적 석학이자 MIT 경제학과 교수인 대런 애쓰모글루는 세계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국가들의 발전 경로를 분석해, '국가'와 '사회'라는 두 거대 세력의 균형 달성 여부가 핵심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 '족쇄 찬 리바이어던'으로 표상되는 '통제받는 국가'와, 국가 권력에 적절히 규율되는 시민ㆍ자본 세력이 힘의 균형을 이룰 때, 자유와 번영으로 가는 '좁은 회랑'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애쓰모글루의 '좁은 회랑' 분석틀로 번영의 한국 경제사를 비춰보면, 적어도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검찰 권력과 재벌 대기업의 지난한 투쟁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중수부' 내지는 '특수부'로 대표되는 검찰 권력은 권력 교체기나 권력 누수기를 노려 삼성ㆍ현대ㆍSK와 같은, 지금은 세계에 내로라하는 대기업 총수들을 '손 보곤' 했다. 검찰의 과잉 수사가 무고한 기업인들을 핍박하고 기업 활동을 위축시켰단 비판이 늘 뒤따랐지만, 이러한 국가권력과 대기업 자본의 길고 긴 투쟁 과정은 역설적으로 기업 지배구조와 거버넌스의 개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지금은 글로벌 대기업이 된 A사 비자금 사건을 수사했던 전직 검찰 간부는 기자에게 "회장실 옆 방에 현금을 쌓아놓는 창고가 있었던 것이 불과 20년 전임을 생각해보면, 지금 A사의 내부 통제 구조 변화는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검찰 권력에 늘 비판적이었던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검찰 특수부가 대기업 집단 수사를 할 때는 지지와 응원의 목소리를 내곤 했다.

세월은 흘러 이제 한국에서 예전과 같은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수많은 업보들과 함께, 경제 권력 견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대한민국 검찰은 곧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예정이다. 올해 안에 중대범죄수사청이 출범할 예정이긴 하지만, 거대 자본과 겨뤄 부패 수사를 제대로 벌일 능력을 배양하는 데엔 한참의 시간이 걸릴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검찰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거대 자본과의 일전을 벌이고 있다.
 

'공룡 MBK' 겨누는 검찰의 마지막 '거대 자본 수사'

검찰의 마지막 상대는 족벌 대기업이 아닌 거대 '사모펀드'다. 운용자산만 48조원으로, 이제는 아시아 최대 사모펀드로 거듭난 MBK파트너스는 지난해 불거진 홈플러스 사태로 서울중앙지검 (지검장 박철우) 반부패3부 (부장검사 직무대리 김봉진)의 수사를 받아왔다. MBK는 홈플러스뿐 아니라 롯데카드, BHC, 고려아연 등의 지분 상당수를 확보해 대한민국 산업군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실상부한 '공룡 자본'이다. 그런 MBK가 지난해 기습적인 홈플러스 회생 신청을 결정하면서 사태가 불거졌다. 무리한 차입으로 대한민국 소비자 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는 홈플러스를 인수해놓고, 부실한 경영으로 기업 가치를 하락시킨 뒤 무책임한 '탈출'을 모색했다는 비판이 터져 나온 것이다.

홈플러스, MBK

홈플러스의 위기는 단순히 채권 투자자나 시장 관계자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경제 문제로 그치지 않았다. 마트 계산원, 운송ㆍ배달 노동자 등 홈플러스에 생계가 얽힌 상당수 서민들의 '밥줄'이 위태로워지며 사태는 '사회 문제'로 비화됐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사회적 분노와 문제의 '뒤처리'를 위해 검찰이 투입됐다. 하지만 수사 과정은 녹록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느 선진국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집단은 그에 상응하는 '대관력'과 '법률 대응력'을 갖추게 됐다. 사회적 분노가 폭발하며 국회 청문회와 국정감사 등이 이어졌지만, 홈플러스 사태 수사는 해를 넘기게 되었다. 세간에선 한국뿐 아니라 미국 정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MBK가 예전 같지 않은 검찰의 칼날을 적당히 피해갈 수도 있을 거란 추측이 나왔다.
 

5개 혐의 구속영장…김병주까지 정조준

그러나 검찰이 지난주 홈플러스 경영진뿐만 아니라 MBK 대주주인 김병주 회장에게까지 구속영장을 청구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검찰은 MBK와 홈플러스가 공모해, 회사가 망할 것을 알면서도 채권을 팔았다는 사기 혐의와 함께 다양한 자본시장 질서 위반 혐의들을 적용했다.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

검찰은 우선 홈플러스가 투자를 받으며 발행한 잔액 1.1조원 규모 전환상환우선주 (RCPS)를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계상하면서 부당하게 재무 건전성을 부풀렸다고 판단했다. MBK와 홈플러스는 함께 투자한 자본 세력들을 설득해 RCPS 상환권을 홈플러스에만 남겨두는 방식으로 '부채'를 '자본'으로 둔갑시켰지만, RCPS 전환권의 리픽싱 조항 등 세부 사항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기업 회생을 신청했다고 검찰은 보고 있다. 회계기준 상 '자본' 요건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한 채 RCPS를 '부채'가 아닌 '자본'으로 계상한 건 명백한 회계기준 위반이라는 것이다.

검찰은 또 홈플러스 측이 보유 토지 등 자산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시세보대 2배 가까이 높게 '부풀리기'를 했다고도 보고 있다. 이러한 포괄적 분식회계를 근거로 법원에 기업회생을 신청한 것은 '사기 회생'이라는 혐의도 추가됐다. 검찰은 홈플러스의 이 같은 회계 처리가 신용평가사들의 등급 산정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업무방해 혐의까지 구속영장에 추가한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홈플러스 경영진이 최소 2024년 초부터 장기간에 걸쳐 이러한 분식 회계를 조직적으로 진행했다고 보고 있다. MBK는 총 7조원에 달하는 홈플러스 인수금액 중 5조원 가량을 차입을 통해 조달했다. 그런데 내수 경기 악화와 온라인 유통 시장 확대 등으로 홈플러스가 위기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자, '조직적 엑시트 계획'을 실행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와 같은 계획이 김광일 홈플러스 부회장 '윗선'인 김병주 MBK 회장에게도 보고됐다고 판단하고 있다. 김광일 부회장은 홈플러스 경영뿐 아니라, 고려아연 경영권 인수 등 MBK 내에서 다양한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인데, 검찰은 김 부회장이 홈플러스 경영 판단 주요 사항을 단독으로 결정하지 않고, 김병주 회장에게 보고했다는 정황들을 오늘 구속영장 심사 과정에서 제시할 전망이다. 검찰은 특히 MBK와 홈플러스 구성원들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에 주목하고 있다. 검찰은 김 부회장이 김병주 대표의 지시로 홈플러스를 정리하기 위한 '논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취지의 대화들을 압수수색 과정에서 다량 확보한 걸로 전해진다.
 

자유로 가는 '좁은 회랑'

MBK 파트너스 측은 검찰의 전격 구속영장 청구 직후 장문의 입장문을 내며 반발했다. "검찰의 영장 청구는 회생절차를 통해 경영상 어려움에 직면한 홈플러스를 살리려 했던 대주주의 의도와 행위를 완전히 오해한 것"이란 게 MBK 입장이다. MBK 측은 또 "이번 영장 청구에 담긴 모든 혐의를 부인한다"며 "김병주 회장은 홈플러스를 비롯한 투자사들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았다"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검찰은 MBK가 진정 '엑시트'가 아닌 홈플러스를 제대로 되살릴 의지가 있었다면, 자본 과대 계상이나 지급 보증 미공시 등 미봉책이 아닌, 투명한 경영 정상화 계획을 추진했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경영 판단 행위가 부정했다는 '고의'를 입증해야 하는 만큼, 이번 수사의 난이도는 매우 높을 거라는 게 법조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검찰 해체의 소용돌이 속에서, 검찰이 최종적으로 MBK와 홈플러스 경영진에게 유죄를 받아낼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검찰 수사가 정확하고 적절하게 이뤄졌는지는 앞으로 있을 법적 다툼 과정 속에서 냉정하게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 사모펀드를 상대로 한 검찰의 사실상 마지막 수사는 의미 있게 평가 받을 필요가 있다. 재계에서도, 정치권에서도, 검찰은 예전과 달리 '녹슨 칼' 취급을 받은 지 오래다. 하지만 거대 자본의 영향력이 경제 영역은 물론 사회ㆍ정치 영역까지 잠식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국가 권력의 견제력은 그것이 비록 '녹슨 칼'이라 할지라도, 최소한도에서나마 존재해야만 한다. 애쓰모글루가 평생의 연구를 통해 밝혀냈듯, 자유와 번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국가 권력은 '통제 받지 않는 리바이어던'으로 존재해서도 안 되겠지만, '부재하는 리바이어던'으로 자취를 감춰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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