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압송된 지 이틀 만에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미국 법원에 끌려나갔습니다. 수감돼 있던 구치소에서 법원까지 압송하는 과정에는 헬기와 장갑 차량이 동원됐습니다. 언론사 카메라에 노출된 마두로 부부의 모습은 며칠 전이라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습니다. 부인 실리아 플로레스의 이마에 다친 상처에 붙인 붕대가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마두로는 법정에 들어서면서 웃음 띤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새해 인사를 건넸지만, 양쪽 발목에는 구속 장치를 찬 모습이었습니다.
마두로 "나는 베네수엘라 대통령이고, 납치되었다."
재판은 영어로 진행됐고, 마두로는 스페인어 통역을 듣기 위해 헤드셋을 착용하고 판사를 기다렸습니다. 첫 재판은 '기소 인부(認否)' 절차로, 재판에 앞서 피고인에게 기소된 혐의를 인정하는지 묻는 절차입니다. 담당 판사는 92살의 앨빈 헬러스타인. 헬러스타인 판사는 마두로에게 적용된 공소 사실 요약본을 읽은 뒤 마두로에게 '니콜라스 마두로 씨가 맞는냐'고 신원을 물었습니다. 마두로는 "나는 베네수엘라 공화국의 대통령이며 1월 3일부터 이곳에 납치돼 있다"고 답했습니다. 납치(외신에 따라 kidnapped 혹은 captured로 통역된 것으로 기사화되었습니다)되었다고 말한 것은 미국으로 압송돼 구금돼 있는 것이 불법적이라는 주장을 이어가려던 취지로 보이는데, 판사는 "이 모든 것을 다룰 시간과 장소가 있을 것"이라며 말을 중단시켰습니다. 미국 사법체계에서 형사 재판 첫 기일은 본격적인 공판에 앞서,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는지, 무죄를 주장하는지 확인만 하는 절차이기 때문입니다.
마두로 "나는 무죄다, 나는 품위 있는 사람이다"..30대 남성과 언쟁
판사는 피고인의 권리를 알려주었고, 유죄를 인정하는지 물었습니다. 마두로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나는 결백하다. 나는 무죄다. 나는 품위 있는 사람이다. 나는 내 나라의 합법적 대통령이다." 무죄를 주장하면서 '품위 있는 사람(a decent man)'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미국 당국이 기소한 범죄를 저지를 불한당이 아니라는 말로 보입니다. 함께 기소된 부인 플로레스의 '기소 인부'는 더 짧게 끝났고, 변호인은 플로레스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이마를 다쳤다고 밝혔습니다. 30분 만에 끝난 재판을 마치고 마두로가 퇴정하는 과정에서, 한 30대 남자가 스페인어로 마두로에게 거칠게 항의했고, 마두로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맞받아쳤습니다. "나는 납치된 대통령이다. 나는 전쟁 포로다."
마두로의 변호인은 앞으로 체포 및 압송 과정의 적법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국가원수로서의 면책특권을 주장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변호인은 배리 폴락 변호사로, 미국 안보 기밀을 폭로했던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산지를 변호했던 인물입니다. 어산지를 변호하면서 유죄를 인정하는 조건의 석방 합의를 이끌어낸 적이 있어서, 마루로로서는 최적의 변호사를 선임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모양입니다. 이 역시 마두로가 이런 상황을 예비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마두로 "전쟁 포로" 주장..'면책특권' 등 미국 법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 낮아
오늘 재판에서 주목할 부분은, 마두로가 자신을 '전쟁 포로'라고 주장한 대목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 정부의 '법 집행'이 아니라, 양국 간 무력 분쟁 과정에서 발생한 군사 작전에서 포로로 잡혔다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전쟁 포로는 합법적 전투원이기 때문에, 분쟁이 종료되면 석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두로가 한 스페인어가 영어 kidnap이 아니라 capture가 맞다면, '납치됐다'보다는 '포로로 잡혔다'는 주장을 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이 미국 법원에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커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미국이 군사력을 동원해 외국 권력자를 끌고 가 법정에 세우고 처벌한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파나마의 노리에가 대통령의 경우도 불법 체포를 주장했고 국가원수로서 면책특권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미국 법원에서 징역 40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마두로는 마약 관련 테러 공모, 코카인 수입 공모, 살상무기 소지 등 4가지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됩니다. 2020년 마두로가 기소될 때 혐의 가운데는 마약 조직 '태양의 카르텔'(Cartel de los Soles)'을 이끌었다는 내용도 있었는데, 미국 법무부가 최근 공개한 공소장을 보니 그 내용이 빠졌다고 미국 뉴욕타임스가 보도했습니다. 이 신문은, 트럼프 정부가 지난해 이 카르텔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면서 마두로 축출의 주요 명분으로 삼았기 때문에 논란이 예상된다고 전했습니다. 보도 내용을 좀 더 보면, '태양의 카르텔'이 실재하는 조직이라는 대목이 삭제됐고, 그 대신 마약 자금에 의해 움직이는 후원 시스템이나 부패 문화를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미국 정부가 마두로를 권좌에서 끌어내기 위해 국제법을 어기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국제사회는 분노하거나 불안해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결국 마두로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변수는 미국 여론의 향배라는 점에서, 기소된 혐의의 실체 여부를 두고 미국에서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유엔 사무총장 "위험한 전례", '국제법 준수 안 된 점' 매우 우려
미국의 베네수엘라 침공이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판은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대변인을 통해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번 사태가 '위험한 전례가 된다'는 점을 지적했고, 국제법이 준수되지 않은 점을 매우 우려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트럼프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은 자명하고, 오히려 관심은 베네수엘라 내부 권력의 향배입니다.
로드리게스 임시대통령 남매, 베네수엘라 행정과 입법 권력 장악
대통령 권한대행인 델시 로드리게스 부통령은 친오빠인 호르헤 로드리게스 국회의장 앞에서 선서를 하고 임시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남매가 행정부와 입법부 권력의 정점에 선 셈입니다. 선서 장면은 마두로의 아들 니콜라스 마두로 게라 의원이 가운데서 지켜봤습니다. 로드리게스 임시 대통령은 미국 법정에 선 마두로를 대통령이라고 칭하면서 "영웅의 피랍에 깊은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여전히 마두로이고, 자신은 '임시'라는 점을 얘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에 협력을 요청하는 모습에서 자신이 주도해 정국을 장악하려는 의사도 보입니다. 결국 로드리게스는 마두로 아래서 권세를 누리던 군부와 경찰 등 기득권 세력의 지지를 유지해 가면서, 자신이 실권자로서 마두로를 대체하는 모습을 만들어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마두로 정권의 실정과 폭정, 민주주의 압살은 베네수엘라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지만, 이 문제를 해결해 갈 '대체 세력'의 등장은 아직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진 자료 : 연합뉴스, 디자인 : 정유민)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