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들 사이로 종이 상자가 놓여져 있습니다.
안에 들어있는 건 A4용지가 아니라 현금다발과 돼지 저금통이었습니다.
연말이면 주민센터에 성금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9천만 원을 기부한 겁니다.
어제 오후 3시 40분쯤 전주 노송동주민센터 이병욱 주무관은 주민센터로 걸려온 한 중년 남성의 전화를 받고 센터에서 도보로 약 3분 거리에 있는 장소에서 A4 복사용지 상자 안에 담긴 현금다발과 돼지저금통, 편지 한 통을 발견했습니다.
[이병욱/전주 노송동 주민센터 주무관 : 맨 처음에는 이제 그 나무 사이에 A4 박스가 하나 있길래 이게 맞나 싶어 가지고 이제 살짝 열어봤는데, 박스 안에 이제 돼지저금통이랑 현금 다발이랑 그리고 이제 그 A4 용지에 이제 그 멘트 써져 있는 거 딱 그게 있더라고요.]
편지에는 "2026년에는 좋은 일들만 있었으면 한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짧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 주무관은 남성이 "상자를 확인해보라"는 말만 남긴 채 바로 전화를 끊었다고 전했습니다.
[이병욱/전주 노송동 주민센터 주무관 : 평상시처럼 전화를 받았거든요. 어디에 박스를 놓아 두었으니까 그거를 찾으셔서 좋은 일에 썼으면 좋겠다라고 말씀을 하시고 바로 끊었어요.]
상자 안에 담긴 성금은 오만 원권 묶음으로 이뤄진 9천만 원을 포함해 돼지 저금통 등 모두 9004만 6000원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로써 '얼굴 없는 천사'가 지금까지 26년간 27차례에 걸쳐 전주에 기부한 성금은 모두 11억 3488만 원에 달합니다.
[이병욱/전주 노송동 주민센터 주무관 : 중년 목소리 남성은 맞는데 그게 누군지는 지금 여기서도 아무도 모르고 있어서요.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행을 하고 계시니까 저희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다른 주무관님들께도 큰 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은 지난 2000년 4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달라'는 메모와 함께 약 58만 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남긴 게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매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에 이르는 성금을 기부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이름이나 얼굴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기부금은 그동안 '얼굴 없는 천사'의 뜻에 따라 노송동 지역의 생활이 어려운 주민과 학생들에게 연탄과 쌀, 장학금 등으로 전달됐습니다.
선행이 20년 넘게 계속되면서 지난 2019년에는 얼굴없는 천사가 주민센터 인근에 놓아둔 성금 6천여만 원을 누군가 도난해 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주민센터가 되찾는 일도 있었습니다.
전주시는 천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노송동주민센터 일대 도로를 '얼굴 없는 천사 도로'로 조성하고 '얼굴 없는 천사비'를 세웠고, 주민들은 매년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정해 나눔 행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취재 : 이현영 / 영상편집 : 권나연 / 디자인 : 이정주 / 제작 : 디지털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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