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 장재열 (상담가 겸 작가, 월간 마음건강 편집장)
인터뷰이 : 차우진 (음악평론가, 뉴스레터 발행인)
인터뷰이 : 차우진 (음악평론가, 뉴스레터 발행인)
"직장 말고, 내가 스스로 한 달에 100만 원만 벌 수 있다면." 잡지 시장이 무너지던 2010년대 중반, 평생 글을 쓰며 살아오던 40대 중반의 남자는 이렇게 생존을 위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20대, 시인이 되려다 계속해서 떨어졌고, 30대, 세상은 그에게 음악평론가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내가 음악을 평가해도 되나' 하는 자기 의심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커리어의 위기와 일상의 위기가 한꺼번에 밀려온 40대, 그는 뉴스레터를 시작합니다. 남들이 보기엔 '잘나가는 평론가'였을지 몰라도, 늘 어느 집단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했던 그의 내면에는 "Who am I?"라는 물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5년, 그의 뉴스레터는 대중음악계의 소식을 전하는 정보지를 넘어 한 인간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두려움을 버티고, 이제는 경계인이 아니라 자신만의 경계를 만들어가는 기록이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일로 나를 먹여살리고,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기까지. 그 인고의 시간을 관통하는 그의 질문.
"우리는 어떻게 좌절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마음에 남는 분이라면, 오늘의 인터뷰를 끝까지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장재열(이하 장) :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차우진(이하 차) : 안녕하세요, 차우진입니다. 오랫동안 '음악평론가'나 '문화평론가'라는 타이틀로 일해왔지만 2020년부터는 [차우진의 엔터문화연구소]라는 뉴스레터를 발행하고 있으니 지금은 '뉴스레터 발행인'입니다. (웃음) 음악이 엔터테인먼트의 기반이고 인디펜던트가 산업의 핵심이라는 생각으로 업계 전반 얘기를 다룹니다. 최근에는 뉴스레터 발행 5주년을 정리하면서 [관점을 파는 일]이란 책을 썼어요.
장 : 우진 님을 10년 가까이 봐왔지만, 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에너지가 있어요. 동안, 노안의 문제가 아니라 뭔가 '늙지 않는다'라는 느낌이랄까요. 늘 '달라진' 느낌은 있는데 '나이 든' 느낌은 없어요. 늘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기 때문일까요?
차 : 늘 시도했다기보다 저는 태생적으로 어디 하나에 완전히 속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집안 사정이나 여러 이유로 이사를 정말 많이 다녔어요. 초등학교, 그때는 국민학교였죠. 국민학교를 무려 다섯 군데나 다녔으니까요. 거의 1년에 한 번꼴로 전학을 다닌 셈인데, 그러다 보니 친구들 무리에 깊이 섞일 수가 없었어요.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로, 다시 인천으로 옮겨 다녔어요. 어린 시절에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고학년이 되어 보니 알겠더라고요. 다른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친구들이고, 저는 그냥 굴러들어 온 돌이라는 걸요.
장 : 커뮤니티의 '게스트'였던 거네요.
차 : 그렇죠.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나는 이들과 섞일 수 없는 존재라는 감각, 소속감보다는 이질감을 먼저 배우게 된 거요.
장: 섞이지 못한다는 느낌은 유년기보다 청소년기에 특히 크게 작용하잖아요. 어떠셨나요?
차 : 맞아요. 제가 다닌 인천의 고등학교는 정말 소위 '마초'적인 문화가 강했어요. 입학하고 일주일 만에 성적순으로 반을 다시 배정할 정도로 입시 위주였지만, 일주일에 한 번 경찰이 찾아올 정도로 살벌한 곳이었죠. 선생님들은 인서울 할 애들만 챙기고 나머지는 방치했어요. 저는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했죠.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예쁘고 아기자기한 걸 좋아했어요. 순정만화에 나오는 호리호리하고 플랫 한 몸을 동경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어릴 때 꽤 뚱뚱했어요. (웃음) 아버지는 저를 새벽 6시부터 헬스장에 데려가서 억지로 운동을 시키기도 했는데, 거울 속에 비친 제 근육과 살집이 너무 싫어서 밤마다 맥주병으로 종아리를 문지르기도 했어요. 남자애들 틈에서도, 그렇다고 여자애들 틈에서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경계'에 늘 서 있었던 것 같아요.
장 : 대학 시절에도 그런 '경계인'으로서의 감각은 계속되었나요?
차 : 네. 저는 안산에 있는 한양대학교를 다녔어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캠퍼스라, 수능 전 시절, 그러니까 '학력고사' 시절에 서울대, 연고대를 떨어진 강남 8학군 아이들이 몰려왔거든요. 그러다 보니 캠퍼스에는 늘 약간의 패배감과 박탈감이 혼재되어 있었어요. 그런 장소적인 배경도 있었고, 저는 그 안에서도 '여성주의(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남학생'이었거든요. 제대 후에는 총여학생회 멤버로도 일했고요.
장 : 총여학생회요? 여성분들만 가입이 되는 건 줄 알았는데요. 따로 이유가 있었나요?
차 : 대학 시절에 운동권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었어요. 사실 총여학생회의 경우에는 군 전역 후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사무국장을 맡은 건데요. 그 안에서도 저는 어디에도 완벽히 속하지 못했어요. 낮에는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지만 밤에는 홍대 인디씬이나 예술 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거든요. 낮의 세계와 밤의 세계가 완전히 달랐던 거죠. 회사를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에서 과연 내 세계는 어디인가, 그런 고민이 많았어요.
장 : 정말로 10대, 20대 내내 어떤 '전형적'인 모습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이건 욕구였을까요? 기질이었을까요? 이런 우진 님이 꿈꾸던 원래의 꿈은 뭐였을지 궁금해요.
차 : 원래는 서른 살 전까지 등단을 하고 싶었어요. 시인이 되고 싶었죠. 정말 치열하게 글을 썼지만 결국 등단을 못 했어요. 계속 최종심에서 떨어졌죠. 지금 생각해 보면 더 열심히 하지 않았거나 재능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였지만, 그때는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았어요. (웃음)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회사를 다녔어요. IT 회사도 있었고 비영리단체도 있었고 잡지사도 있었죠. 중구난방 커리어예요. (웃음) 그렇게 여러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누군가는 절 부러워하고 누군가는 절 걱정하고, 대부분은 제가 뭘 하는지 몰랐지만, 그 시간 동안 '진짜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려면 뭐가 필요할까?'라는 고민을 꾸준히 한 것 같아요. 그런데 늘 돈은 없었죠. 그래서 30대 초반에 직장을 그만두고 어쩌다가 프리랜서가 되었을 땐 닥치는 대로 글을 썼어요. 글 쓰는 프리랜서로 어디까지 해 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고, 청탁을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으니까요. 그때 저는 글 자판기였어요. 펑크 난 원고도 때우고, 하루에 마감을 세 개씩 치면서요.

장 : 하루에 기사나 칼럼을 세 편씩 썼다고요?
차 : 네. 좀 어이없지만, 할 줄 아는 게 글 쓰는 일이니 이걸로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도 했어요. 최소한으로 필요한 생계비가 150만 원이었는데, 200만 원 만 넘기자고 생각했죠. 그렇게 살다 보니 조금씩은 먹고살아지기 시작했어요. 물론 그 이후로도 여전히 어떤 때는 100만 원밖에 못 벌기도 했지만, 또 어떤 때는 800만 원도 벌게 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그 편차를 경험했던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장 : 그러다가 음악평론가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 걸까요?
차 : 사실 저는 그 호칭이 늘 달갑지만은 않았어요. 오히려 벗어나고 싶었죠. 저는 음악을 만들 줄 몰라요. 악기를 다루지도 못하고. 그래서 늘 이런 자기 의문이 있었어요. '내가 음악을 평론해도 되나?' 하는. 그렇다고 또 완전히 글을 쓰는 사람의 세상에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장 : 그러다 2010년대 중반 무렵, 인생에서 가장 큰 파도가 닥쳤다고 들었어요. 그때가 우진 님의 인생에서 어떤 변곡점이었나요?
차 : 말 그대로 바닥이었어요. 정확히는 2012년쯤 잡지 시장은 붕괴되기 시작하고, 일거리는 줄어들고 있었고요. 당시에 스타트업에 들어가 일하면서 버티고 있었는데, 2015년에 이혼도 했죠. 경제적인 위기도 함께 찾아오고요. 그때 이런 말을 들었어요. "너는 네가 손에 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고요. 저는 늘 어딘가 다른 곳, 갖지 못한 것을 욕망하며 살았지, 제 손에 잡힌 일이나 관계나 일상에 집중하지 않았더라고요. 늘 저 바깥의 무언가를 찾아 헤맸던 거죠. 이 말이 사무쳤어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지금 여기에 집중하자.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자. 내 욕망을 똑바로 보고 찌질함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자.
장 : 그때의 절박함이 뉴스레터를 시작한 계기가 된 건가요? 어떤 비전 같은 게 있었던 건지…
차 : 비전이요? 전혀요. 생존의 문제였어요. 당시에 제가 40대 중반이었는데 당장 5년 뒤, 50살이 되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가 컸어요. 모아둔 돈은 없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았어요. 스마트 스토어로 중국에서 물건 떼다 팔까, 유머 게시판 만들어서 배너 광고 수익이라도 얻을까, 진짜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
장 : 그래도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름은 한 번쯤 다 들어본 '그 차우진'이요?
차 : 네. 정말 당시에 목표는 딱 하나, '월 100만 원만 고정적으로 벌 수 있으면 좋겠다'였어요. 매체 기고료가 편당 10~20만 원인데 100만 원, 200만 원을 벌려면 10개 이상을 써야 해요. 그건 지속 불가능하거든요. 심지어 매체도 많이 없어졌고요. 그런데 운이 좋으면 더 많이 벌 때도 있죠. 그것도 지속 가능하지 않아요. 그래서 내가 가진 것, 즉 '글 쓰는 능력'과 '음악 산업에 대한 지식'을 직접 팔아보자고 결심한 게 뉴스레터였어요. 그거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장 : 그런데 그 '몸부림'이 결국 우진 님에게 변화의 변곡점이 된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내신 책 제목이 '관점을 파는 일'이었죠? 쭉 읽어봤는데, 처음엔 관심이 안 가더라고요. 왜냐면 '뉴스레터를 만들면서 실패하고 성장한 6년간의 기록'이라는 게 저한테 크게 와닿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뉴스레터 만들고 키운 노하우가 아니라 끝없이 혼란을 겪는 40대 중반의 한 남자가 "Who am I?"를 묻는 과정이 담긴 느낌이었어요.
차 : 맞아요. 사실 그런 마음으로 썼어요. 나를 찾아가는 과정, 나에게 질문하는 여정 같은 느낌으로.
장 : 저 역시 심리상담사도 아니고 정신과 의사도 아닌데, 이 마음건강이라는 분야에서 계속 일하며 살아가고 있는 묘한 입장으로서 '경계인'이기에 느끼는 공감이 참 많았거든요. 이 치열한 자기 질문의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정의도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차 : 맞아요. 처음엔 돈을 벌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알게 됐어요. 뉴스레터는 블로그나 기사와 달리 발행인인 '나'의 관점과 아이덴티티가 너무 중요하더라고요. 독자들은 정보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정보를 해석하는 '차우진'이라는 사람의 관점을 사는 거니까요. 그러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해요. 예전에는 '나는 평론가인가, 기자인가, 작가인가'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고민했다면 지금은 그런 경계가 무의미해졌어요.
장 : 그래서인지 결국 과거에는 경계인 같은 느낌으로 살아오셨지만 더 이상은 그렇지 않게 됐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10대 때는 '어디에 소속될 것인가', 30대 이후에는 '어디에서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소속 자체를 신경 쓰지 않는 단계로 넘어가신 것 같아요. 마치 우진 님 자체가 하나의 '장르'나 '바운더리'가 된 느낌이랄까요. 그러고 보니 뉴스레터를 시작한 후 생각지 못한 변화도 있었잖아요? 음악 산업 종사자들이 모이는 거대한 커뮤니티를 만들게 되시기도 했죠?
차 : 네, 1700명 정도가 함께하고 있는 단톡방이 있어요. 처음에는 독자모임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뉴스레터와 별개로 독자적인 모임이 되는 것 같아요. 음악 산업의 특성상 종사자들의 느슨하고 자연스러운 연결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생긴 것 같아요. 특히 좋은 점은 제가 리드를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연결을 만들어간다는 점이에요.
장 : 이런 사람들의 존재가 나의 여정을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주기도 하는 걸까요? 저는 우진 님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우리는 어떻게 좌절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문장이었거든요.
차 : 아, 그 말을 많이들 좋아해 주시더라고요. 사실 2014년에 스치듯이 생각나서 이 주제로 칼럼도 쓰고 강의도 열은 적이 있었어요. 반응은 좋았는데 다들 막판에 "연애 이야기가 아니었군요?"라고 놀라던 기억이 나요. (웃음) 사실 '우리는 어떻게 좌절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는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기 위한 고민이거든요.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려면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도 계속할 수 있는 게 필요한데 그게 뭘까. 저는 사실 좌절의 전문가라고 생각해요. 여러 방면에서 실패하면서 여기까지 왔죠. 그렇지만 글 쓰는 걸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그런 가운데 연결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 링크드인에 가장 자주 쓰는 말이 "계속 연락하자!(Let's keep in touch!)"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장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결정과 판단에서 흔들리곤 하잖아요. 특히나 경계에서 살아온 사람이라고, 자기 정체성을 뚜렷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고요.
차 : 네, 그런 고민을 할 때 저는 '옳은 판단'으로 가는 것이 결국 맞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유명했던 사건인데,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신에게 성추행을 가한 가해자에게 소송을 걸면서 단돈 1달러만 청구했던 사건이 있어요. 1달러 소송으로 유명했죠. 당시 테일러는 전성기의 정점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관계자들이 말렸어요. "그냥 넘어가자, 팬들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밀어붙였어요. 그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모든 피해 여성들을 위해서 '옳은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그런 '옳은 결정'을 내가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요. 돈이 되느냐, 유명세에 도움이 되느냐가 아니라 '이게 나다운 결정인가?', '이게 내 기준에서 옳은가?'를 묻는 거죠. 이런 자문의 과정에서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길을 가기도 해요. 누군가의 성공 신화, 잭팟 소식이 들려오더라도 뉴스레터를 하면서 당장의 수익보다 신뢰를 쌓는 것, 내 색깔을 잃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는 거죠. 결국 그게 장기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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