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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제각각인 '매운맛'…나노과학으로 측정 [스프]

[뉴스스프링] 조동찬 SBS 객원기자

매운맛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불닭'에서 세계로 번진 매운맛 열풍

한국의 매운 라면은 이제 단순한 식품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 코드'가 됐습니다. 국내 회사의 '불닭볶음면'은 2012년 출시 이후 2024년까지 누적 판매량 40억 개를 돌파, 전 세계인이 도전하는 대표적인 매운 음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SNS에는 '매운맛 챌린지' 영상이 쏟아지고 있으며, 매운맛을 강조하는 음식은 언제나 인기가 있습니다. 이에 발맞춰 주요 편의점과 제조사들은 매운 제품을 경쟁적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국내 매운맛 라면 시장은 2021년 약 1,905억 원에서 2023년 2,076억 원으로 약 7.3% 성장했고, 라면 전체 수출액도 2022년 8억 4천만 달러에서 2024년 9억 달러를 돌파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불닭', '열라면', '핫스파이시' 등 매운맛 라인업은 이제 K-푸드 수출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매운맛과 건강의 득실
매운맛은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인체 생리와 밀접한 신호이기도 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공동 연구팀이 48만 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에서 매운 음식을 거의 매일 섭취한 사람은 사망률이 약 14% 낮고, 심혈관·뇌혈관 질환 사망 위험도 유의하게 낮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후 비슷한 연구들이 잇달았고, 올해 발표된 중국 연구에서 매운 음식을 먹으면 노화를 늦출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됐습니다. 7천8백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매주 3~5일 매운 음식을 섭취한 사람은 그러지 않은 사람에 비해 생물학적 나이가 약 -0.69년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특히 대사기관 및 신장기관의 노화가 더 많이 지연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반대되는 결과도 있습니다. 아시아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매운 음식을 많이 먹으면 위암·담낭암 위험이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고, 매운 자극에 민감한 사람은 역류성 식도염, 과민성 장증후군(IBS) 등의 증상이 악화할 수 있다는 보고서도 발표됐습니다. 게다가 극단적으로 매운 음식을 섭취했다가 급성 위장 손상이나 심혈관 이상을 겪은 사례도 보도된 바 있습니다.

이렇듯 매운맛은 적당하게 먹으면 건강에 득이 될 수도 있지만, 과도할 경우 신체에 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그 매운맛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측정할 방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운맛의 생리학적 효과를 연구하거나, 질병 위험과의 연관성을 분석할 때에도 정확한 기준이 없다는 게 늘 한계로 지적됐습니다.


사람마다 제각각인 매운맛
현재 매운맛의 기준은 '스코빌 척도(Scoville scale)'인데, 1912년 미국의 화학자 윌버 스코빌이 만든 방법입니다. 고추 추출액을 설탕물에 조금씩 섞어 희석하다가 매운맛이 안 느껴질 때의 비율을 표기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1천 배로 희석해야 매운맛이 사라지면 1천 스코빌, 1만 배로 희석해야 사라지면 1만 스코빌로 계산되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직접 맛을 보고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라서 정확성과 재현성에 한계가 있습니다. 즉, 같은 음식이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매운 정도가 달랐고, 같은 사람이라도 측정할 때마다 결과가 달랐습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성능 액체크로마토그래피(HPLC)라는 장비를 이용해 음식 속의 매운 성분(캡사이신, 디하이드로캡사이신 등)을 직접 측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이 방법으로 매운 성분의 농도가 높게 나와도 사람이 더 맵게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라면, 양념, 튀김 등의 음식에는 지방, 단백질, 당류가 복합적으로 섞여 있어서 매운 성분이 제대로 검출되지 않았고, 같은 재료라도 조리 방식에 따라서 매운맛의 차이가 컸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매운맛의 정체는 무엇이길래 사람마다 제각각이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시각각 변하며, 또 매운 성분의 농도에 따라서도 일치하지 않는 걸까? 매운맛의 인기는 세계적으로 퍼져갔지만, 매운맛의 비밀은 드러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내 연구팀, 매운맛의 객관화 성공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경과학과 디지털 의료공학으로 이뤄진 한양대 의과대학 정승준 교수 및 장용우 교수 공동연구팀은 우리 몸의 매운맛 수용체 'TRPV1'(Transient Receptor Potential Vanilloid 1)을 활용한 새로운 측정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TRPV1은 캡사이신이 결합하면 활성화돼 통증과 열감을 뇌로 전달하는 단백질로, 바로 우리가 매운맛을 느끼게 하는 핵심 수용체입니다. 연구팀은 먼저 쥐가 매운 자극을 받았을 때 보이는 행동을 관찰했습니다. 같은 캡사이신이라도 농도가 다르면 얼마나 불편해하고, 얼마나 빠르게 반응하는지가 달라지는지를 살펴본 것입니다. 또 신경세포 실험에서는, 매운맛을 느끼게 하는 단백질(TRPV1)이 자극을 받으면 세포 안으로 칼슘이 들어오면서 '빛처럼 보이는 신호'가 생기는데, 이를 현미경으로 촬영해(칼슘 이미징) 실제로 어느 정도 활성화되는지 측정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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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 실험을 함께 분석해 보니, 캡사이신 농도가 올라갈수록 TRPV1과 신경세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정확히 드러났습니다. 어떤 농도에서는 매운맛이 거의 안 느껴지다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갑자기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지고, 또 너무 높아지면 오히려 반응이 무뎌져 크게 달라지지 않는 구간도 있었습니다. 즉, 매운맛이 단순히 '양이 많으면 더 매운 선형적 패턴'이 아니라 '농도 구간에 따라 매운맛이 달라지는 비선형적 패턴'이라는 점이 새롭게 밝혀진 겁니다. 연구팀은 실제 생물 반응을 기준으로 한 새로운 매운맛 등급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매운맛을 '감지 불가능'에서 '과포화'까지 5단계로 구분해, 생물학적 반응을 기반으로 한 세계 최초의 정량화 체계를 제시했습니다.


융합연구가 성공의 비결
공동 연구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TRPV1 단백질을 포함한 나노(1나노미터는 머리카락 굵기의 10만 분의 1) 소포체를 전극에 결합한 초정밀 바이오센서를 개발했습니다. 이를 통해 캡사이신이 TRPV1에 붙을 때 생기는 미세한 이온 흐름을 전기 신호로 감지할 수 있게 된 건데, 매운맛의 강도를 분자 수준에서 정밀하게 정량화할 수 있게 한 기술입니다. 이 센서는 사람의 주관적 편차 없이 객관적이고 재현성 있는 매운맛 측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향후 소형 휴대기기와 통합되면, 식품 제조 현장이나 소비자가 실시간으로 음식의 매운맛 등급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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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제 1저자인 한양의대 본과 4학년 유승원 학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운맛은 단순한 미각이 아니라, 신경세포의 정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생리학적 현상입니다. 이번 연구는 주관적인 감각을 과학적 언어로 해석하는 첫걸음이며, 100년 넘게 사용되어 온 스코빌 척도를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논문의 교신 저자인 한양의대 생리학과 정승준 교수는 바람직한 융합의과학자의 표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번 연구는 생리적 감각을 수치화해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것인데, 앞으로 통증이나 스트레스 같은 다른 생리 반응도 이런 방식으로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연구는 의학·공학·약리학이 결합해 만든 융합연구의 대표적 성과로, 향후 통증·감각 연구에서도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 연구는 모교 출신 의사가 기부한 연구비(SGER)로,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융합의과학자 프로그램을 통해 수행됐습니다. 해당 논문은 최근 국제 유명 저널(Biosensors and Bioelectronics, 학술지 영향력 지수(IF) : 10.5)에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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