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합의점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세상. 그런데 이러한 '대혼돈의 이슈 멀티버스'에서도 잘 보면 극우부터 극좌까지 모두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동의하고 있는 두 가지 명제가 있다.
1. 대장동 개발업자들의 비리는 나쁘고, 처벌돼야 한다.
2. 이들의 부당이익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이득의 상당액은 환수돼야 한다.
이 두 명제는 지금은 서로의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는 그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공리'다. 정성호 법무장관은 국회와 언론 앞에서 '항소 포기로 개발업자들의 이익 환수를 못한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는데, 이는 곧 대장동 업자들의 부당이익을 환수할 수 있고, 또 환수해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장동 일당의 비리를 처벌할 수 없고, 이익을 환수할 수 없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어 마침내 이 희귀한 공리가 파괴되고야 만다면? 이는 근 10여 년간 극도의 불안정성을 보이고 있는 한국 정치사에서 또 다른 갈등 폭발의 마지노선이 될 가능성이 크다.
마지노선: 대장동 개발업자 배임죄 면소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은 대장동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때부터 업자들과 명확하게 선을 그어왔다. 성남시의 대장동 개발사업은 공공개발의 성격이 짙은 사업인데 김만배를 위시한 민간업자들이 부당한 수단을 동원해 이득을 취한 것이고, 오히려 당초 민간업자들이 유리한 구조의 사업을 짜준 국민의힘 소속 자치단체장들과의 유착이 의심된다고 강조해 왔다. 부동산 투기와 부당 개발 이득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수천억 원대 개발 이익을 남긴 업자들과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건 어느 정치 세력에게도 치명타가 될 일이다.
그런데 만약 현 정부·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배임죄 폐지 방안이 세밀하게 설계되지 못해, 그 여파로 대장동 개발업자들이 결국 2심에서 배임죄에 대해 '면소' 판결을 된다면? 사정이 어떠하든, 결과론적으로 정권의 권한 행사로 인해 대장동 개발업자들이 형사적 책임의 상당 부분에 있어 면죄부를 받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이 경우 이들이 벌어간 수천억 원대의 개발 이익 환수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업자들이 형사 재판에서 배임죄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게 되면, 민사 소송에서도 이들의 이익을 환수할 길이 매우 까다로워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는 그동안 대장동 일당과의 관계에 철저히 선을 그어온 정부와 여당에도 심각한 도덕성 리스크를 초래할 것이다. 현재 정부와 여권의 여러 단위는 배임죄 폐지 상세 내용을 검토 중인데, 그 실행의 상세 양태에 따라 앞으로 치러야 할 사회적 갈등 비용의 규모가 산정될 것이다.
조용한 마지노선 붕괴의 조력자들
하지만 의외로 이 갈등의 마지노선은 꽤나 조용하고도 별일 없이 무너질 수도 있다. 견제와 감시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이들이 제 역할을 못할 때 말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란과 김건희 여사 부패 관련 이슈는 끝없이 터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여당을 감시하고 견제해야 할 야당의 대표는 당선 직후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피고인을 면회하고 "이재명 탄핵"을 외친다. 그런가 하면 야당의 중진 의원은 김기현 전 대표 부인이 김 여사에게 건넨 명품을 두고 "100만 원 짜리가 무슨 뇌물이냐"는 발언을 사석도 아닌 라디오 방송에서 내놓는다.
인간의 도덕 감정에는 한도가 있다. 부정의(不正義) 위에 또 다른 몰상식과 부정의가 끊임없이 끼얹어진다면, 시시비비를 가릴 국민들의 정신적 에너지는 마침내 고갈돼 버리고야 말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여당의 정치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세력이 지금처럼 무기력하다면, 대장동 개발업자들이 법률적 면죄부를 받고 수천억의 돈을 챙겨가는 일이 생긴다 해도, 대중들의 분노는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이내 지나가고 말 것이다.
늘상 부패의 감시자를 자처해 온 검찰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진정 정의의 길이었다면, 불이익을 감수하고 항소장을 접수한 검사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점에서, 국민들은 불의에 저항한다는 이들의 진심을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 많은 검찰 구성원들이 무능하고 부패하다고 깔보는 586 정치인들은 소싯적 전과를 각오한 투쟁을 벌였고, 세월이 지난 뒤 그 진정성 담론으로 정치를 주도하고 있다. 그 누구도 몸을 던지지 않고서, 비상계엄 발동 즉시 체포를 각오하고 국회 담을 넘기도 한 이들과 여론의 광장에서 맞서 이기겠다는 건 지나친 오만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 석방과 즉시 항고 무산 때는 잠잠했던 검찰 내부 게시판 '이프로스'가 대장동 항소 포기 때만 달아오르는 것도 민망한 일이다. 특정 사안에 대해서만 유독 강하게 분노하는 '이프로스'를 많은 국민들은 더이상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정의의 공론장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다.
공리가 무너진 세상의 미래
가장 우려되는 건 최소한의 '공리'가 무너진 뒤에도 그것을 무너뜨린 이들이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 세상이 도래하는 것이다. 권력을 운용하는 이들의 무절제가 감시자들의 한없는 무능과 맞아 떨어지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때, 최소한의 명분도 필요 없이 힘만 있으면 모든 게 허용되는 '정치 종말의 세계'는 마침내 찾아온다.
그렇다면 그 종말론적 미래에서 당장 권력을 갖고 있는 세력은 영원히 행복할까? 한때 60만 대군을 지휘하는 자리에 있다가 지금은 전직 장성과 법정에서 '소맥' 타던 상황에 대해 논쟁하고 있는 윤 전 대통령 모습은 이 질문에 대한 좋은 참고 사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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