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제80차 유엔총회 참석을 위해 오늘 미국 뉴욕으로 출국했습니다. 지난 6월 캐나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 참석한 적은 있지만 취임 직후 국제무대 데뷔의 성격이 강했고, 치밀한 준비 하에 이뤄지는 첫 다자 외교 무대는 이번 방미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국제 질서의 거대한 지각 변동 조짐이 감지되는 시점에서 양자나 다자 외교 모두 각 나라의 생존이 걸린 전쟁터가 돼가는 분위기입니다. 다음 달에는 우리나라 경주에서 미중 정상이 동시 참석하는 메가 이벤트, APEC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습니다. 다가오는, 그리고 피할 수 없는 격랑 앞에서 이 대통령은 어떤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을까요? 마침 오늘 이 대통령의 외신 인터뷰 기사 2건이 소개됐는데 그 생각의 단초를 읽는 데 도움이 됩니다.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천500억 달러를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
- 이 대통령, 지난주 로이터 통신 인터뷰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
- 이 대통령, 지난주 로이터 통신 인터뷰
한미 양국은 지난 7월 미국이 한국산 제품에 대한 관세를 당초 발표한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490조원)를 투자하는데 잠정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공동 성명이나 서명식 같은 공식화 행사는 없었죠. 대통령실은 '합의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된 회담'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웃 나라 일본이 15% 관세에 5500억 달러(764조원) 투자를 약속하고 공식 서명까지 한 것으로 알려지자, 우리는 서명 안 해도 되느냐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우리가 얻으러 간 것이 아니라 방어를 하러 간 것"이라며 "이익이 되지 않는 (합의문에) 서명을 왜 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기자회견 다음날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의 노골적인 압박 발언이 나옵니다.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일본은 합의문에 서명했다. 한국도 선택해야 한다. 서명하거나 관세를 내라"고 말했습니다.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관세 폭탄을 때리겠다는 으름장입니다. 구두 합의 이후 구체화를 위한 실무협의가 난항을 겪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이 대통령은 외신 인터뷰에서 일본과 한국의 외환보유액 차이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외환보유액은 1조3000억 달러인데 비해 한국은 4160억 달러, 외환보유 규모에 비추어 볼 때 한국에게 투자하라는 3500억 달러는 일본의 5500억 달러보다 훨씬 가혹하고 자칫 외환 위기로까지 몰릴 수 있는 엄청난 규모라는 겁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주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선 한미 관세협상과 관련해 "미국의 요구에 동의했다면 탄핵 당했을 것"이라고도 말했습니다.

"혈맹 사이에 최소한의 합리성은 유지될 것이라고 믿는다."
"상업적 합리성을 보장하는 세부 합의를 마련하는 것이 지금의 핵심 과제이자 가장 큰 장애물"
- 이 대통령, 지난주 로이터 통신 인터뷰
"상업적 합리성을 보장하는 세부 합의를 마련하는 것이 지금의 핵심 과제이자 가장 큰 장애물"
- 이 대통령, 지난주 로이터 통신 인터뷰
미국을 향해 우리가 감당 가능한 선에서 요구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아무리 오랜 동맹관계라고 해도 상대 나라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협상은 협상이 아니라는 거죠. 이 대통령은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도 "한국의 국익에 반하는 결정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어떤 이면합의도 하지 않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외교 협상에서 국익 추구는 어느 나라에서나 기본 중의 기본 명제입니다. 다만 협상에는 상대가 있고 협상을 지배하는 힘은 나라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국익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입니다.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고 있으며, 한국은 그 경계선에 위치하고 있다."
"상황은 점점 더 어렵지만, 두 진영이 완전히 문을 닫을 수는 없으니
우리는 중간 어딘가에 자리 잡을 수 있다."
- 이 대통령, 지난주 BBC 인터뷰
"상황은 점점 더 어렵지만, 두 진영이 완전히 문을 닫을 수는 없으니
우리는 중간 어딘가에 자리 잡을 수 있다."
- 이 대통령, 지난주 BBC 인터뷰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주의에 입각한 트럼프발 관세 폭탄이 동맹국과 적대국을 가리지 않고 투하되면서, 미국 중심 세계 질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습니다. 국제적 질서에는 나름의 기준과 원칙이 있고, 그 중심에 미국이 있어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거죠. 21세기 들어 이른바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을 바탕으로 국력을 키우고 한반도 평화를 모색해왔던 우리에게 전략 수정이 불가피한 환경이 도래하고 있다는 뜻으로도 들립니다. 정밀한 상황 분석력과 함께 이른바 '위치 선정' 능력이 더욱 중요해졌다는 게 이 대통령의 생각 같습니다. 중간 어딘가에서 그 누구에게도 미움 받지 않고 국익을 최대화하는 것을 우리 국민 누군들 원치 않겠습니까만, 문제는 그게 말처럼 쉬운 문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외국 군대가 없으면 자주국방이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일각의 굴종적 사고"
- 이 대통령, 9월21일 페이스북
"북핵 동결은 '임시 응급조치'로서 실행 가능하고 현실적인 대안"
- 이 대통령, 지난주 BBC 인터뷰
- 이 대통령, 9월21일 페이스북
"북핵 동결은 '임시 응급조치'로서 실행 가능하고 현실적인 대안"
- 이 대통령, 지난주 BBC 인터뷰
이 대통령은 '굴종적 사고'라는 강한 비판에 이어, "'똥별'이라는 과한 표현까지 쓰면서 국방비를 이렇게 많이 쓰는 나라에서 외국 군대가 없으면 국방을 못한다는 인식을 질타한 노무현 대통령이 떠오른다"며 돌아가신 노 대통령을 소환했습니다.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는 이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지만, 한미안보협상이 진행 중인 시점을 감안해 다소 '로키'를 유지해왔던 사안입니다. 주한미군을 '비용' 차원에서 접근하고 주한미군의 활동 범위를 인도 태평양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복안을 갖고 있는 미국과의 협상에서 국내 여론을 협상 지렛대로 활용하기 위한 이슈 제기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물론 지지층 결집을 위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소환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외신 인터뷰에서 북핵 '3단계 로드맵'을 제시했습니다. 당장 비핵화를 요구한다고 해서 그 말을 들을 북한이 아니니, ①북한 핵·미사일의 동결부터 시작해 ②축소와 ③비핵화로 이어지는 단계적 해법이 현실적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할 현실적 주체로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꼽았습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경험이 있어서 북한도 북미 대화에 대해선 어느 정도 열려 있다는 예측에 기반합니다.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어설픈 반미 선동, 반트럼프 선동 말라."
-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 오늘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
"한미동맹 대체하는 자주국방은 북중러의 축배"
-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오늘 SNS
"미국이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 인정에 기초해 평화공존 바란다면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 없어"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21일 北 최고인민회의
-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 오늘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
"한미동맹 대체하는 자주국방은 북중러의 축배"
-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 오늘 SNS
"미국이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 인정에 기초해 평화공존 바란다면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 없어"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21일 北 최고인민회의
이재명 대통령의 외교 정책에 대한 야당들의 비판은 다소 정치적인 공세와 함께 국익에 대한 시각 차이에 기반합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정부가 정말 관세협상을 타결할 의지가 있는지 되묻고 싶다"며 "계속해서 반미 감정만 부추기는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정부가 관세 문제를 모두 다 기업들에게 떠넘기고 발을 빼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미감정만 부추기는 발언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장 대표는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장 대표 말대로 정부가 관세 문제에서 발을 빼려 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미국발 관세 폭탄을 불안해하는 기업들과,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시위장에 나오는 일부 지지층을 동시에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됩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한미동맹과 상호보완적인 자주국방'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북한 하나가 아니라 북중러 기반의 안보 위협이기 때문에 자주국방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구실이 아니라, 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토대가 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북중러 기반의 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한미일 안보 협력이 자주국방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주장이 필요해 보입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어제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미국이 북한 핵을 인정한다면 북미 대화에 나서겠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한국에 대해선 "마주 앉을 일 없고 결단코 통일은 불필요하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피스 메이커'로 만들기 위한 '페이스 메이커'가 되겠다고 했는데, 김 위원장이 이 대통령의 역할은 필요 없다고 걷어찬 셈입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