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조지아주 서배너 엘라벨에 위치한 HMGMA
미국 이민 당국에 한국 노동자 300여 명이 구금된 사태의 배경과 관련해 그간 미국 조지아주의 미국인 노동자들이 현지에 투자한 한국 기업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조명받고 있습니다.
미국 노동자들은 한국 기업들이 공장을 건설하면 자기들에게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것으로 기대했지만, 막상 다수 외국인이 현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고 반감을 가졌으며 그런 감정이 이번 단속의 발단이 됐을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됩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이 지난 4일 조지아주 서배너 인근의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을 급습해 한국인 300여 명을 포함한 노동자 475명을 체포한 뒤로 이 지역 노동자들은 언론 인터뷰에서 현대차와 LG가 현지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8일(현지시간) AP통신은 조지아주 지역 노동조합들이 현대차와 하도급 업체들이 비자 면제 규정이 허용하는 범위 밖에 있는 기본적인 건설 작업에 한국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사용한다고 불평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서배너 지역 중앙노동협의회'의 크리스티 흄 회장은 협의회에 소속된 노조들은 한국 노동자들이 시멘트를 붓고, 철제를 세웠으며, 목공 작업을 하고 배관을 설치했다고 믿는다고 전하면서, "기본적으로 우리가 할 일이 불법 이민자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뉴욕타임스(NYT)도 이번 단속이 조지아주의 배터리 산업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조명하면서 일자리를 둘러싼 갈등을 언급했습니다.
NYT는 공장이 들어선 지역의 일부 미국인 노동자들은 미국 납세자들이 76억 달러나 보조하는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을 공정한 기회를 받지 못했다고 불평해왔다고 보도했습니다.
아시아의 선진 배터리 기업들은 미국에 공장을 건설할 때 통상 자국에서 엔지니어와 기술자를 데려오지만, 그런 일자리를 원하는 미국 노조들이 이런 관행에 불만이 많다는 것입니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 에너지부에서 에너지 일자리를 담당한 베토니 존스는 "전기차 배터리 기업들은 지식재산권을 엄격히 비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기들의 기계를 설치·유지할 때 자기 노동자들을 데려오고 있었다"면서 "하지만 노조들은 그 일자리를 가지려고 강하게 압박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그런 일자리를 미국 노동자에 맡기기 힘든 이유가 있습니다.
배터리 공장 건설에는 고숙련 노동자가 필요한데 배터리 산업 자체가 생소한 미국, 특히 남부 조지아주 같은 지역에서는 그런 노동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현대차와 LG 같은 대기업 입장에서는 임금이나 근로 시간 등 조건이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미국 노동자보다 말도 통하고 일을 편하게 시킬 수 있는 한국 협력사 직원을 데려오는 것을 선호하는 분위기도 있습니다.
특히 막대한 투자금이 걸린 상황에서 신속한 건설을 위해 한국에서 노동자를 다수 데려올 수밖에 없지만, H1B나 E2 같은, 취업이 가능한 비자는 발급이 어렵다 보니 B1 비자나, 무비자인 전자여행허가(ESTA)를 소지한 채로 입국해 '편법'으로 일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이번 무더기 체포로 이어졌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그러나 미국 노동자들은 한국 기업의 이런 입장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조지아주 15개 카운티의 배관공, 용접공, 냉난방공조(HVAC) 기술자 등을 대표하는 '로컬188' 노조의 배리 자이글러 사업매니저는 미국인들이 해야 했을 일을 한국인들이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특수한 작업을 하러 여기 왔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헛소리"라고 NYT에 말했습니다.
자기가 이번 단속의 제보자라고 주장한 조지아주 기반 정치인 토리 브래넘도 지난 6일 언론 전화 인터뷰에서 비슷한 감정을 드러냈습니다.
브래넘은 기자가 한국 기업들의 입장을 설명하자 "우리 서배너(현대차 공장 인근 도시)에는 매우 숙련된 건설자와 장인들이 있다"면서 반발했습니다.
그녀는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에 3천200만 달러(약 440억 원)의 세제 혜택을 줬지만, 기업들은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조지아 주민을 (현대차-LG 공장 건설 현장에서) 거의 고용하지 않았다. 공장 부지에 가는 미국인들은 거기에 있는 노동자 100명 중 미국인은 2명밖에 안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건설 현장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이고 비인도적 행위를 찍은 영상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한테 그 사실을 알려와 자기가 ICE에 신고했다고 밝혔습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미국인들이 건설 현장을 다 지켜보고 있다가 '우리를 불러 일 시킬 때가 됐는데 왜 안 부르지?' 하면서 당국에 신고한다고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LG에너지솔루션 측과 면담에서 "LG 측에서 지금 공장이 완성될 때까지는 현지 미국인 고용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 현지에서 좀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는 답을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미국 현지의 이런 기류를 고려하면 이번 사태가 한국인 석방으로 원활하게 해결되더라도 향후에도 한국 기업과 미국 노동자 간 갈등이 지속될 우려가 있습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정책을 지지하는 강성 '마가'(MAGA) 지지자들은 불법 이민뿐만 아니라 H1B 같은 합법적인 경로로 미국에서 일하는 외국인을 향해서도 '더 낮은 임금으로 일해 미국인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이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으로 대미 투자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투자가 원활하게 진행되려면 투자 지역의 미국인들이 공장 건설 단계부터 투자 혜택을 체감할 수 있도록 이들의 불만을 관리할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사진=현대차그룹 제공,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