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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핑크·오징어 게임 낳은 한국 부럽네"…갈 길 먼 중국의 '소프트 파워' 전략 [스프]

[종횡만리,성시인문(縱橫萬里-城市人文)] "전통문화를 스토리텔링하여 국가 소프트 파워를 제고하라" (글: 한재혁 전 주광저우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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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가라(讀萬卷書, 行萬里路)'고 하였던가? 장자(莊子)의 큰 새(鵬)는 아홉 개의 만 리(萬里)를 날아올랐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가장 많이 쓴 두 자(字) 시어(詩語)는 '만 리(萬里)'였다. 만 리 길은 무한한 상상(想像)의 영역인 동시에 현실이자 생활이었다. 20여 년간 중국 땅 위에서 일하고 살면서 시간과 공간의 들어가고 나옴 중에서 마주했던 같음과 다름을 지역과 사람, 문화로 쪼개고 다듬어 '종횡만리, 성시인문(縱橫萬里 城市人文)'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얼마 전 미국 한 정치학자의 부고가 중국 언론계와 학계에 반향을 불렀다. '소프트 파워(soft power)'라는 용어를 처음 쓴 인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조지프 나이(Joseph Samuel Nye, Jr.)가 이달 초 88세를 일기로 별세했고, <신화통신>, <환구시보>를 비롯한 중국의 주류 언론들과 학자 및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SNS 매체들은 그의 과거 인터뷰를 실어 나르며 애도와 경의를 표했다. 중국에서는 과거 마오쩌둥 시기의 에드거 스노(Edgar Snow)를 비롯해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에즈라 보겔(Ezra Vogel) 등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서양 학자들을 '오랜 친구(老朋友)'라거나 우호 인사(友好人士)로 부르며 그들의 임종 소식에 국가 지도자들까지 나서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중국본색 한재혁1 조지프 나이 관련 중국 언론(新京报) 기사 및 그의 중문판 저서

하버드 대학 케네디스쿨의 학장을 맡았고 클린턴 정부 시기 국방부 국제 안보 담당 차관보를 지냈던 조지프 나이는 냉전 종식 이후 국제환경에서 무력과 제재라는 '강제', 보상과 매수라는 '회유'의 행동 스펙트럼을 "하드 파워(hard power)"로, 제도라는 '의제 설정', 가치, 문화, 제반 정책의 '매력'의 행동 스펙트럼을 "소프트 파워(soft power)"로 정의하였다. 그가 내놓은 소프트 파워의 개념은 중세 유럽 시기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가 "사랑받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한 언급과 비교하거나,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의 창상을 겪고 난 국제 사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신선한 충격이었다.

중국 관점에서도 가치와 문화를 비롯한 스스로 능력으로 상대에게 어필한다는 소프트 파워는 전통적 유가 사상에 기반한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鄰)'이나 '문치교화(文治敎化)'의 개념과도 통하는 것이어서 친근하게 느끼게 되었다. 조지프 나이가 소프트 파워만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하드 파워에 소프트 파워를 더한 스마트 파워(smart power)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중국어로 하드 파워는 잉스리(硬實力), 소프트 파워는 롼스리(軟實力), 스마트 파워는 챠오스리(巧實力)로 표기한다.

미중 경쟁과 소프트 파워 이슈와 관련, 조지프 나이는 2017년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기고에서 "중국의 부상에도 미국에게는 아직 태평양으로 둘러싸인 우세한 '지리', 풍부한 '에너지' 자원, 강한 '무역'과 '달러'라는 4장의 에이스(Ace) 카드가 있다"라고 하였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첫 번째 집권기인 2019년의 기고문(Project Syndicate)에서는 "미국이 외교정책의 대상인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공공외교를 홀시하는 등 미국의 소프트 파워가 쇠락하고 있다"라고 우려했다. 금년 3월의 기고에서는 "트럼프 2기를 맞아 캐나다, 덴마크 등 우방을 압박하고, 국제개발처(USAID)나 대외 라디오(VOA)를 축소하는 등 스스로 쌓아온 소프트 파워를 훼손하고 있으며, 이렇게 파괴되는 명성은 다시 회복하기 어렵거나 회복에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상하이 푸단대 국제문제연구원 우신보(吳心伯) 원장은 그의 부고에 즈음한 중국 언론 인터뷰에서 "조지프 나이의 소프트 파워 개념이 국제 정치학계의 양대 이론인 리얼리즘과 리버럴리즘 사이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 그는 미중 관계에 있어 미국이 중국과 대립이 아닌 접촉을 해야 하고, 상호 협력과 이에 기반한 지역 및 국제 문제의 처리를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라고 분석했다. 조지프 나이가 중국에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 작년 8월 <SCMP>와의 인터뷰에서는 중국이 덩샤오핑 시기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외교정책을 폐기하고 전랑(戰狼)외교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 잘못된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중국은 국제무대에서의 위상 제고와 함께 강한 외교정책을 추진함과 동시에 공공외교와 문화홍보를 통해 자국의 긍정적 대외 이미지 제고를 위해 노력해 왔다. 재미있는 점은 조지프 나이가 주창한 소프트 파워 개념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이 '롼스리(軟實力)'라는 중국어 신조어를 사용하여 이 개념을 당 공식 보고서에 도입했다는 점이다.

10여 년 전인 2012년 제18차 중국 공산당 대회 보고서는 '사회주의 문화강국(文化强國) 건설'을 제시하고 '문화 소프트파워(文化軟實力)'의 현저한 증강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구체적 요구사항으로 문화 생산품(文化産品)을 풍부하게 하고, 문화의 공공서비스(公共文化服務) 체계를 확립하며, 문화산업을 국민경제의 지주 산업으로 육성시키고, 중화 문화의 해외 진출(走出去)을 가속화한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소프트 파워 증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공외교와 대외홍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중국 외교부 산하 기구로 '중국공공외교협회(中國公共外交協會; China Public Diplomacy Association)'를 출범시켰다. 협회는 강좌, 심포지엄, 전시회 등 각종 공공외교 활동 개최 및 언론, 교육, 민간단체의 상호 방문과 교류 활동 추진 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17년에는 당 중앙과 정부 국무원의 판공청(辦公廳)이 공동으로 '중화 우수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 공정(中華優秀傳統文化傳承發展工程) 실시 의견'을 내놓고, 고전 시, 음악 무용, 서예 회화 등과 역사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에 대한 지원을 추진했다. 또한, 고전에 기반하면서도 대중들에게 친근한 프로그램 창작, 무형문화재 발굴, 전통문화의 교육과 홍보, 풍습과 24절기(節氣)의 활용, 재외 문화원(文化中心)과 공자학원(孔子學院)을 통한 해외홍보도 주문하였다. 중국에서는 문화산업 발전이나 소프트 파워 제기 이야기만 나오면 우수 사례로 블랙핑크 등 케이팝, <오징어게임> 등 드라마, <기생충> 등 영화 외에 최근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문화예술 발전과 한류, 이를 통한 국제적 소프트 파워 제고를 부러운 눈빛으로 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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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본색 한재혁4 <장안삼만리> 포스터

중국 관점에서는 최근 십여 년 간의 국내 문화산업 실력 제고 및 대외 문화홍보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본다. 과거 핑퐁외교나 판다(panda) 외교 시기 한자 서예전이나 경극 공연과 같은 낡은 정서의 콘텐츠에서 탈피하여 전 세계 젊은 층에게 어필할 수 있는 뉴미디어와 트랜스미디어 콘텐츠로 접근하고 있다. 2023년 이백, 두보 등 당나라 시인들 간의 스토리를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든 <장안삼만리(長安三萬里)>가 중국 국내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올해 초에는 <봉신연의>의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너자(哪吒, Nezha) 2>가 개봉되어 중국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우면서 북미를 비롯한 해외에서까지 호응을 얻었다. 2024년 손오공의 스토리에 기반한 롤플레잉 게임 <검은 신화, 우콩(Black Myth, Wu Kong)>이 출시되어 공전의 히트를 하였고, 최근의 AI 딥시크(DeepSeek)의 충격에 이르기까지 정부 지원, 과학기술 및 문화산업 발전에 힘입은 결과들이 이어지고 있다.
중국본색 한재혁0 <너자2>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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