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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잘생긴 얼굴'이 되레 아쉽네…AI 영화의 진화와 과제 [스프]

[취향저격] 지금 우리가 꿈꾸는 판타지, <걸리버 율도국 여행기> (글: 장은진 대중문화평론가)

걸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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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저격
 
AI 시대, 생성형 AI 시스템을 활용한 영화들이 다양한 경로로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다. 정교하고 리얼한 표현, 미학적 미장센을 극대화한 스케일로 뛰어난 몰입감을 주는 영화부터 아직은 표현 기법과 스토리텔링이 아쉽게 느껴지는 영화까지 AI를 활용한 영상 스토리텔링은 계속 진화 중이다.

AI 영화가 이렇게 주목을 받는 시대가 되다 보니 가장 재빠르게 반응하는 것은 국내외 영화제들이다. 해외에서도 영화제 경쟁 부문에 AI 섹션을 신설하거나 아예 독립적인 AI 영화제를 출범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경기도와 부산이 일찌감치 AI 영화제에 뛰어들었다. 경기콘텐츠진흥원이 AI 영화제라는 명칭을 사용하자('대한민국AI국제영화제') 부산은 동일 명칭을 사용할 수 없기에 '부산국제인공지능영화제'를 창설했다. 올해 두 번째 개최되는 두 개의 국제인공지능영화제에서는 상상 그 너머의 이야기들이 또 어떻게 후이늠(걸리버 여행기의 네 번째 여행지인 이상향의 나라)이라는 판타지를 펼쳐놓을지 상상해 본다.


12년 전 영화 <그녀>가 알려준 기계와 인간의 감정
인간과 인공지능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영화 속 소재로 등장한 계기는 컴퓨터 운영체계인 OS 시스템과 외로운 도시인이 정서적으로 교감하며 사랑을 나눈다는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그녀(Her)>가 아닐까 싶다. 흥미로운 건 <그녀>의 시간적 배경이 제작 당시의 12년 뒤였던 바로 지금, 2025년이라는 사실이다. 영화처럼 2025년을 사는 우리는 <그녀>에서 그려진 인공지능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교류하는 시대를 살고 있을까.

시스템과 사랑을 속삭이는 스토리는 이제 인공지능의 고전 텍스트가 돼버렸지만 그 후 수많은 OTT 콘텐츠 속에서 tvN <욘더>처럼 인공지능을 이용해 나의 사후세계를 설계하고 영화 <원더랜드>에서 나의 장례식장에서 웃으며 조문객을 맞을 수 있는, 사자(死者)와 감성적인 연결을 할 수 있는 세상을 그린 판타지 스토리텔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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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 ENM이 제작한 AI 영화 <M호텔>은 노인, 소년, 바이킹 근육질 전사, 미소녀 등 다양한 캐릭터의 표현과 게임을 보는 듯한 몰입감으로 한층 자연스러워진 영상미와 더불어 그동안 아쉽거나 부족하게 느껴지던 극의 스토리텔링도 비교적 만족시킨 6분 30초 길이의 영화다. 우연히 주운 호텔 열쇠로 하룻밤 투숙하는 고급 호텔 방에서 자신의 전생을 모두 만나본다는 판타지 서사는 과거 표현력에만 치우쳐 완성도 면에서 떨어졌던 AI 영화의 스토리텔링이 확실히 진일보한 느낌이다. 그중 작년에 제작되어 공개된 AI 영화 중에서 눈에 띄는 건 독특한 역사 판타지 AI 영화 <걸리버 율도국 여행기>다.


AI로 재탄생한 <걸리버 율도국 이야기> : 고전과 상상력의 결합
우리에게 익숙한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소인국, 대인국 이야기지만 그 후 3, 4부인 라퓨타와 후이늠은 그 당시 파격적으로 작가가 살던 영국의 현실 비판과 함께 걸리버가 당도한 환상적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걸리버가 만약 국내에 표류하게 되고 그곳이 홍길동이 세운 이상 국가 율도국이었다면? 이 내용은 이미 <걸리버 유람기>라는 소설을 발표한 김연수 작가에 의해 세상에 나온 바 있다.

그 소설 속 율도국에 표류한 '걸리버 여행기'를 재해석해 홍길동과 걸리버의 만남, 그들이 함께 이상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스토리텔링하고 AI 영화로 만든 건 고려대학교 박진호 연구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고려대학교 출신의 AIMZ Media의 소휘수 대표다. 그동안 AI 영화의 주된 소재가 SF, 디스토피아 미래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대부분이었지만 인문학, 응용과학 전공자들은 AI 영화의 소재와 스토리텔링을 역사 판타지로 확장해 동서양 소설 속 걸리버와 홍길동의 만남을 판타지 영화로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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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동서양이 바라보는 이상향 유토피아, '율도이즘'으로 대표되는 평화와 평등의 가치, 이 시대 진정한 지도자의 자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과 메시지도 들어있다. 역사 속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 듯 <걸리버 율도국 이야기> 전반부는 지는 석양처럼 전반적인 색감 자체가 따뜻하고 온화하다. 자신을 구해준 율도국 사람들을 위해 걸리버가 나무와 도르래를 사용해 서양에서 쓰는 승강기를 만들어 보답하는 장면은 21세기 도나 해러웨이가 주장한 심포이에시스(Sympoiesis), 공산(共産)의 개념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전반부 평화로운 여행자 걸리버와 지도자 홍길동의 만남에서는 문화재 디지털 복원가로서 활동했던 박진호 감독의 경험과 전문성으로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이 영상으로 재현됐다. 실제로 15~17세기에 중국, 인도와의 무역을 통해 막강한 부를 축적했던 태국의 아유타야를 금빛 왕국으로 묘사한 장면은 문화재 복원가의 실제 고증을 바탕으로 현실감 있는 환상성을 완성한다. 후반부에 들어서며 일본의 와타나베가 평화를 깨고 율도국을 침략하는 스펙터클 전투 씬은 역동성이 부족하고 아쉬운 장면도 눈에 띄지만, 꽤 긴 16분이란 러닝 타임이 끌고 간 서사의 완결성 대비 AI의 기술적 표현 부분의 부족함은 상쇄되는 느낌이다.

그 외에도 아쉬운 점은 보인다. AI가 생성한 동일 인물들은 배경과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어 몰입이 안 되는 몇몇 장면들도 있고 걸리버 같은 경우 조각같이 수려한 외모로 인해 조금은 인간미가 떨어지는 느낌도 든다. 전 세계 모든 잘생긴 배우의 장점만을 조합한 듯한, AI가 완성한 걸리버의 완벽한 얼굴은 일본 장수 와타나베에게도 적용된다. 개성 있는 얼굴을 창조하려면, AI에게도 선택하는 안목이 필요할지 모른다.

이런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AI 영화 <걸리버 율도국 여행기>는 후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걸리버가 돌아간 이후에, 홍길동이 지도자로서 그렇게 떠난 이후에 율도국은 어떻게 됐을까. 제대로 된 지도자와 함께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 율도국은 우리가 만날 수도, 가질 수도 없는 이상향이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장 간절하게 꿈꾸는 이상향일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AI가 만들어낸 그 찬란하고 따뜻한 공간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장 강력하게 염원하고 있는 욕망을 담은 판타지 서사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율도국 이야기>가 걸리버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것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또 홍길동의 죽음 이후에 그의 뒤를 이은 지도자가 나타났기를, <율도국 이야기> 시즌2를 기대해 본다. 판타지는 계속되어야 한다.


상상력을 이뤄주는 황금열쇠 되려면 탄탄한 스토리텔링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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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영화는 지금 시점에서 판타지, 대형 스케일의 전투, 전쟁, 천재지변 등의 장면들을 연출하는 데 비용 절감을 할 수 있는 선택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 리얼함과 정교함 사이, 인간의 온기가 들어간 연출과의 간극이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도깨비방망이가 뚝딱 만들어준 결과물이 내는 광채와 화려함에 순간 혹할 수 있지만 인간이 공들여 만든 작업물과의 괴리감과 이질감을 앞으로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지가 AI 영화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영상의 표현미는 그렇다 치고, 마지막 스토리텔링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스토리는 식상함을 넘어서, 종국에 사람들에게 감동의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의지를 선물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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