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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찐리뷰] 박정희가 지시한 극비 임무…한국은 핵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꼬꼬무 찐리뷰] 박정희가 지시한 극비 임무…한국은 핵무기를 만들 수 있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속 '그날'의 이야기를, '장트리오' 장현성-장성규-장도연이 들려주는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 본방송을 놓친 분들을 위해, 혹은 방송을 봤지만 다시 그 내용을 곱씹고 싶은 분들을 위해 SBS연예뉴스가 한 방에 정리해 드립니다.

이번에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그날'의 이야기는, 지난 20일 방송된 '극비임무-대한민국 핵무기를 개발하라' 편입니다. 이야기 친구로는 배우 한채아, 최다니엘, 모델 겸 방송인 정혁이 출연했습니다.(리뷰는 '꼬꼬무'의 특성에 맞게, 반말 모드로 진행됩니다.)

▲ 엄친아의 엄친아

때는 1948년. 이 시대의 엄청난 '엄친아'가 있었어. 일단 이 엄친아의 아버지부터가 또, 엄친아야.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딴 건물도 있어. 그분의 이름은 '한영교'. 연세대학교에 '한영교 기념 도서관'이 있어. 이분이 연세대학교 초대 신학대학원장이시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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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맏아들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그 엄친아야. 서울대 공대생인 그의 이름은 '한창석'이야. 한창석은 대학에 입학한 뒤,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맏딸 피아니스트를 만나 결혼을 하고, 귀여운 아들도 낳았어. 친가, 외가 모두 매우 유복한 집안의 맏손주가 태어난 거야. 이런 집안, 걱정이 없겠지? 그런데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던 아버지 한영교 씨가 아들에게 갑자기 이런 권유를 해.

"미국에 가서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 공부를 하고 와라."

어떤 공부를 하고 오라는 걸까? 바로 핵물리학이야.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핵물리학이란 학문이 엄청 주목받던 시기야. 6년간 지속된 2차 세계대전이 일본에 떨어진 원자폭탄 두 방으로 끝났잖아. 히로시마에 '리틀보이', 나가사키에 '팻맨'이란 원폭이 투하됐지. 그렇게 종전은 됐지만, 이때부터 전 세계적으로 핵무기 경쟁이 시작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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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자극받은 나라는, 미국의 라이벌 소련이었어. 미국은 소련이 핵무기를 만든다 해도 최소 20년 이상 걸릴 거라고 예측했어. 근데 소련은 불과 4년 만에 핵무기를 만들었어. 예상보다 훨씬 빠른 1949년, 소련은 미국보다 적은 비용으로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어.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 내부에, 소련에 정보를 전한 스파이가 있었다고 해. '미국의 핵무기 설계도가 스탈린 책상에 있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야. 그 후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은 점점 격해져. 그렇게 인류는 점점 더 강력한 핵폭탄을 만들어가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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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력을 비교해 볼게.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보이'로 8만 명이 즉사했어. 그때 생긴 버섯구름 높이가 에베레스트 산보다 높아.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인 소련의 수소폭탄, 차르봄바의 총 에너지를 지진 규모로 환산하면, 규모 8.3 정도가 된대. 리틀보이보다 3,800배 정도 강력했어. 100km 밖에서 지켜보던 연구원들도 화상을 입었고, 1,000km 떨어진 핀란드에서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대.

근데, 이런 의문이 들지 않아? 1949년, 소련이 처음 핵실험에 성공하고 다음 해인 1950년, 한반도에 6.25 전쟁이 일어났어. 그렇다면 6.25 전쟁 당시, 핵무기 사용이 검토되지 않았을까?

당시 맥아더 장군은 핵 사용을 제안했다고 해. 그때 이미 미국은 약 300개, 소련은 20개 정도의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었거든. 이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한반도 핵공격 디데이까지 잡아놨었대. 디데이는 바로 1954년 5월, 대상지는 개성이 유력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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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다행히도 디데이 10개월 전에 정전협정이 체결된 거야. 만일 그때 한반도에서 핵을 사용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당시 정세가 이러니, 한창석 씨 아버지는 똑똑한 아들을 미국에 보내 핵기술을 배워오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을 하신 거야. 하지만, 이땐 한창석 씨의 아들이 태어난 지 100일이 갓 넘었을 때야. 한창석 씨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그는 100일 된 아들과 어린 아내를 한국에 남겨 두고, 혼자 미국 동부의 명문대인 코넬대로 떠났어.

이 시기 코넬대는 핵폭탄에서 한발 더 나아간 수소폭탄을 연구하고 있었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6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이제 한국에 돌아올 때가 되어 가는데, 엄청난 일이 발생해. 거짓말처럼, 한창석 씨가 실종된 거야. 한창석 씨의 행방을 어디서도 알 수가 없어.

▲ 핵물리학자의 실종 미스터리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한국의 가족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가장 안쓰러운 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어린 아들이지. 한창석 씨는 100일 된 아들에게 '대수'란 이름을 지어주고 떠나 왔었어. 그 아들이 바로, 가수 한대수 씨야. '행복의 나라로'를 부른 그 가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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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어요. 사라져 버렸어요. 실종, 완벽한 실종."
-한대수, 한창석의 아들

가족들은 FBI에 실종 신고를 하고, 사설탐정까지 동원해서 한창석 씨를 찾아 나섰어. 하지만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 핵물리학자 아들은 사라져 버렸어. 그렇게 속절없이 한 해, 두 해, 시간이 흘러. 어느덧 아들 한대수는 17살 고등학생이 됐어. 그런데 이때 또 엄청난 일이 일어나. FBI로부터 한대수 씨의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이 온 거야.

놀랍게도 한창석 씨는 여전히 미국에 살고 있었어. 부랴부랴 가족들은 그를 만나러 갔지. 17년 만에 그를 본 가족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어. 핵물리학자였던 아버지가 동네 인쇄소 사장이 되어 있어. 백인 여자와 결혼도 했어. 무엇보다 한국에서 온 가족들도 못 알아보고, 한국말을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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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보니까 완전히 사람이 미국화 됐더라고요. 말하는 것이 스무 살에 미국으로 간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영어를 할 수 있는가 상상이 안 돼. 'I don't know. What's up?' 이렇게 표정 하는데 완전히 미국 사람이야. 발음도 완벽하게 하고 악센트가 없어. 그래서, 이 사람은 한국 사람 아니구나…"
-한대수, 한창석의 아들

한대수 씨는 언어와 기억을 잊었다는 점 때문에 아버지가 '브레인워시', 즉 세뇌를 당한 게 아닌가 의심했어. 핵기밀을 빼내갈까 봐 미국 모종의 세력이 아버지의 귀국을 막고 세뇌시킨 게 아니냐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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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영화 같은 얘기지? 그런데, 정말로 미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 이름하여, 'MK 울트라 프로젝트'. 마약, 전기 충격 등을 이용해서 사람을 세뇌하고 조정하려 했던 비밀 심리실험이야. 실험을 당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기억이 사라지거나 말하는 법을 잊어. 미국 중앙정보국, CIA가 극비로 주도한 공식 프로젝트야.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1950년대 행정부를 대신해 공식 사과까지 했던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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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지원의 수많은 실험이 미국의 병원, 대학, 군대 시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우리 국민에게, 그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1995년 10월 3일, 빌 클린턴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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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박사는 제 머리를 포함한 전신에 전기 충격을 가했습니다. 그는 프로젝터를 사용해 빨간불이 제 이마를 비추는 동안 제 뇌 속에 다른 이미지가 생긴다고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 크리스틴 드니콜라, MK 울트라 프로젝트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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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엘리트들도 프로젝트의 실험 대상이 되었어. 이로 인해 미 육군 소속 프랭크 올슨은 MK 울트라 프로젝트의 부작용으로 사망했고, 천재교수 시어도어 카진스키는 후유증 때문에 연쇄 폭탄 테러범이 됐어.

MK 울트라 프로젝트가 진행된 시기는 1953년부터 1960년대까지. 한창석 씨가 미국에서 공부한 시기와 절묘하게 겹치지. 한창석 씨가 MK울트라 프로젝트의 피해자가 됐을 가능성, 있을까? 근데 CIA가 자료 대부분을 폐기 처분해서 피해자 정보를 찾아낼 수는 없어. 한창석 씨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한 번은 한대수 씨가 아버지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다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저는 아들로서 알 권리가 있어요"라고 물었어. 그러자 아버지는 "늦었다. 이제 집에 가자"라고만 대답했어. 한대수 씨의 할머니도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에게 간절히 애원했어. "마지막 소원이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발 말해달라"고. 돌아온 대답은 뭐였을까?

"Passed is the past.(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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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석 씨는 살아생전에 "그렇게 된 이유는 말할 수 없는 아주 개인적인 문제 때문이다"라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 이런 말을 한 걸 보면, 기억을 하고 있기는 하다는 거 같은데. 왜 말하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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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꿈이 너무 컸지. 낚시도 가고, 야구장도 가고, 같이 소풍도 가고. 난 그런 생각하고 있었는데… 분명히 뭔가 비밀스러운 것을 안 했으면, 정상적인 사람이 공부를 하고 돌아왔어야 하는데. 사라진 이후 모든 것이 너무 수수께끼라서…"
-한대수, 한창석의 아들

끝내 비밀을 말하지 않고 한창석 씨는 2009년 세상을 떠났어. 그의 갑작스러운 실종과 기억상실은, 그가 핵물리학자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까? 진실은 알 수 없어.

그렇게 핵물리학자의 실종과 기억상실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았어. 그럼, 우리나라의 핵무기 개발의 비밀은 어떨까? 전 세계로 퍼진 핵무기 개발 경쟁 구도 속에서, 우리나라도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한 적이 있어. '대한민국의 핵무기를 개발하라'는 극비 임무.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파헤쳐 볼게.

▲ 천재 과학자들을 모아라

때는 한창석 씨를 찾았을 즈음인, 1965년이야. 25명의 젊은이들이 미국으로 가는 커다란 배에 탑승했어. 이들은 장학생으로 선발된 유학생들이야. 그중에 김철이란 젊은이도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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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생이었어. 장학금을 많이 준다는 미국의 한 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은 거야. 바로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학교. 당시 이 학교엔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과학자 한 명이 교수로 있었어. 바로, 이휘소 박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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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휘소란 이름 들어본 적 있어? 그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 알아? 1993년 출간된 소설인데 무려 600만 부가 팔린 초대박 베스트셀러야. 우리나라 핵물리학자의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는 내용으로, 실존했던 이휘소 박사를 모티브로 한 소설이야. 물론 소설은 실제 사실과 많이 달라. 이휘소 박사는 안타깝게도 42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노벨상 수상이 유력했을 거라고 거론되는 입자물리학자야.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오펜하이머도 이휘소 박사의 천재성을 극찬했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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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휘소 박사는 한인 유학생들에게는 영웅 같은 존재였어. 이 이휘소 박사가 한국에서 온 똑똑한 젊은이 김철을 매우 아꼈다고 해. 김철은 공부도 잘해서 같은 박사과정 학생들을 가르쳤을 정도였대. 그 후 김철 박사는 미국 군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들어갔어. 그렇게 미국에서 안정된 직장도 잡고, 원하는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연구소로 한국인 남성이 김철 박사를 찾아왔어. 남자의 정체는 주재양 박사. 한국 원자력연구소 제1부소장직을 맡고 있대. 원자력연구소, 원자력 기술을 연구 개발하기 위해 1959년에 설립된 기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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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찾아온 주재양 박사가 꺼낸 용건은 뜻밖이었어. 국가를 위한 아주 중요한 일에 김철 박사가 필요하니, 한국으로 같이 가자는 거야. 그 중요한 일이 뭔지는 자세히 밝힐 수 없대. 사실, 당시 김철 박사는 미국의 석유회사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참이었어. 아주 연봉이 센 회사야. 또 호주의 대학교수 자리를 놓고도 고민 중이었어. 이런 상황에서 당장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얼마 후, 김철 박사의 손엔 이게 들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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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바이티드 게스트 싸이언티스트(Invited Guest Scientist)'. '해외 유치 과학자'란 티켓을 들고 한국행 비행기를 탄 거야. 고국행을 택한 건 김철 박사만이 아니었어. 당시 12명의 과학자들이 입국했어. 그 후에도 주재양 박사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 출신 과학자들을 찾아가 고국으로 돌아와 달라 부탁했어. 그렇게 2차로 40여 명의 박사들이 요청에 응답했고, 총 250여 명의 과학자들이 귀국해 프로젝트에 합류했어.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연봉을 얼마인지, 프로젝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각 부서에 배치되기 시작했어. 하지만 아무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얼마 후 과학자들은 깨달았지. 자신이 '핵무기 개발 비밀 프로젝트'의 일원이 됐다는 사실을 말이야. 가족들에게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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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이 그때 비밀로 가족들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그냥 비밀로 갖고 계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도 (이후에) 신문 보고 아셨다고 해요."
- 김윤, 故 김철 박사의 아들

심지어 연봉은 해외에서 받던 것에서 4분의 1 수준이었다고 해. 하지만 과학자들은 밤을 새도 힘든 줄 모르고, 모두 열정이 넘쳐 일했어. 중도에 일을 그만두거나 이직한 사람도 없었어.

"당시 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지금이랑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애국심이라는 걸 탑재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한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 어떤 중요한 프로젝트를 한다' 하시니까 그쪽으로 결심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 김윤, 故 김철 박사의 아들

그곳에서 김철 박사의 직책은 원자력연구소 제2소장. 핵연료 개발을 담당했어. 그렇게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여 대한민국 핵개발을 시작했어. 세계의 눈을 피해 은밀히 진행해야 하는 비밀의 프로젝트야. 과학자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면, 정말 깜짝 놀랄 거야. 일단 프로젝트가 시작된 최초의 시점으로 돌아가 볼게.

▲ 핵개발 극비 작전

1972년 9월, 청와대. 국가안보회의가 열리고 있어. 참석자는 대통령, 국방장관, 합참의장, 그리고 중앙정보부장.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 부장의 보고가 시작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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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김일성이 핵개발을 시작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북한이 핵개발에 뛰어들었다니, 큰일이야. 안 그래도 북한은 60년대 후반부터 빈번하게 무력 도발을 일으키고 있었어.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터졌고, 같은 해 울진·삼척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했어. 이런 상황에서 1970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아시아 각국의 방어는 당사국의 책임하에 있다고 선언한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북한이 침범해 오면 한국 방어는 한국 스스로 책임지라는 얘기야. 이때 북한은 탱크까지 자체 생산이 가능했는데, 우리나라는 소총 한 자루도 못 만드는 나라였거든.

게다가 북한뿐 아니라, 중동의 이스라엘과 이집트, 리비아도 핵개발에 착수했고, 인도, 파키스탄, 남아공, 브라질, 칠레, 일본까지 핵폭탄을 만든다는 정보가 입수돼.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청와대 제2경제수석을 호출했어. 당시 오 수석과 청와대에서 같이 일했던 비서관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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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석 말씀에 의하면, 혼자 앉아있는데 따르릉 울려서 가보니까. 난데없이 '핵개발을 해볼 것' 이거예요. 핵개발이라는 건, 핵폭탄입니다."
-김광모,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

핵개발을 검토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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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김광모 비서관이 최초 기안하고, 오원철 수석이 대통령에게 보고한 극비 보고서야. 이게 작성 30년 만인 지난 2003년에 처음으로 공개됐어. '원자 핵연료 개발계획' 보고서. 총 9장 분량의 보고서야. 이 보고서의 '결론'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 재정 능력으로 보아 플루토늄 탄을 개발한다."
"1974년부터 건설계획을 추진하여 1980년대 초에 고순도 플루토늄을 개발한다."
"해외 한국인 원자력 기술자를 채용하여 인원을 보강한다."

한마디로, '플루토늄 핵폭탄을 개발한다'는 거야. 그렇다면, 이 비밀 프로젝트의 최종 책임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박정희 대통령. 대통령이 직접 나서고, 실무는 오원철 수석이 총괄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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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 등 7개 연구기관에 각각의 연구과제를 지시했어. 자기가 담당한 일밖에 모르는 점조직 방식이고, 컨트롤 타워는 오직 청와대뿐이야. 게다가 핵개발과 관련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문서로 지시하지 않았다고 해. 증거가 남으면 안 되니까.

이렇게 착착 계획을 다 세웠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핵무기야. 당시 우리나라가 핵무기를 개발할 역량이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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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핵을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1970년대 경제 위상이 1인당 GNP가 318불, 수출이 17.8억 불. 그런 나라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3만 5천불 아닙니까? 그런 나라가 핵 개발한다? 이게 가능하지 않죠. 박정희 대통령이 시키셨으니까 하는 수 없죠. 그래서 '극비로 하라' 이렇게 된 거죠."
-김광모, 청와대 전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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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무기 개발 수준은) 전무였습니다. 우리가 일본 치하에 있을 때 남쪽은 농업에 치중을 했고 북쪽은 산업, 공업에 치중을 했어요. 병기 개발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북쪽이 훨씬 더 먼저 시작을 했고. 남쪽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맨땅에 헤딩과도 같은 핵무기 개발 비밀작전, 과연 어떻게 진행했고,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앞서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의 계획은 '플루토늄 탄을 개발한다'는 거야. 핵폭탄을 만드는 원료로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이 있어. 우라늄은 석탄이나 석유처럼 자연에서 채굴하는 천연자원이야. 반면 플루토늄은 우라늄을 원자로에서 중성자와 충돌시켜서 만들어내는 인공 물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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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플루토늄 핵폭탄의 제조 과정이야.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선 원자로, 그리고 생성된 플루토늄을 분리하는 재처리 공장이 필요해. 원자로와 재처리, 두 가지 기술이 핵심인 거지.

쉽게 설명하면, 원자로는 연탄을 때는 아궁이야. 원자로에서 핵연료를 넣고 때면 일종의 연탄재가 발생하겠지. 이걸 '사용 후 핵연료'라고 해. 그리고 '사용 후 핵연료'를 특수처리해서 '플루토늄'을 만드는 과정을 재처리 기술이라고 하는 거야. 이것저것 섞여 있는 재에서 플루토늄만 추출해 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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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로는 경수로 방식과 중수로 방식이 있어. 경수로는 핵연료를 많이 태워서, 플루토늄의 순도가 낮아. 반면 중수로 방식은, 핵연료를 조금 태우기 때문에 플루토늄의 순도가 높아. 발전용인 중수로, 경수로 외에도, '연구용 원자로'라는 게 있어. 말 그대로 각종 연구와 기술 개발을 목적으로 한 원자로인데, 핵연료를 태우는 속도를 조절할 수 있어. 그러니까 연구용 원자로로도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얻는 게 가능해.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아무런 기술도 없었어. 겨우 미국산 경수로를 들여와서,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원전을 막 건설 중이었을 때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나라에서 시설을 도입해, 자체 개발하기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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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당시 핵보유국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5개국이야. 캐나다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건 아니고 원자력 발전용 제조 기술이 있어. 이 중에서 우리나라에 기술을 제공해 줄 만한 나라는 어딜까?

일단, 소련과 중국은 우리와 노선이 다르지. 생각해 볼 것도 없어. 미국은 기존 핵보유국으로서 전 세계에 핵무기가 확산되는 걸 매우 우려하고 있었어. 세계 평화와 안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보는 거지. 그래서 NPT, 핵확산금지조약을 1970년에 발효시키기도 했어. 그럼 미국도 안 되겠지. 영국? 영국은 미국의 우방국이라 정책 노선을 같이 해. 그럼 영국도 아니야.

남은 건, 프랑스와 캐나다. 두 나라의 입장은 미국과 같을까? 캐나다는 연구용 원자로인 NRX 원자로를 인도에 판 적이 있어. 그때 마침, 캐나다의 원자력 공사 사장이 방한해서 솔깃한 제안을 해와. 우리나라는 추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추진 중이었는데, 만일 캐나다형 중수로를 구입할 경우, NRX 원자로를 제공하겠다는 거야. 완전 땡큐지. 이렇게 원자로 도입 문제는 해결됐어.

이제 남은 건, 재처리 기술이야. 프랑스는 파키스탄에 재처리 기술을 수출한 적 있어. 그래서 김철 박사팀은 재처리 기술을 보유한 프랑스의 생고방사라는 회사에 접촉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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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더니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환영의 답신을 보내와. 김철 박사팀은 당장 파리로 날아가서 협상을 시작했어. 그런데 프랑스와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뭘까? 핵심은, '위장'이야. 우리나라가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는 걸 미국이 알아채면, 못하도록 막을 거야. 그래서 미국에 들키면 안 되는 거야.

김철 박사팀은 프랑스 출장을 다니며, 일반 관광객처럼 자연스럽게 다녔어. 그러다 중요한 자료를 국내로 보내야 할 땐, 반드시 대사관의 외교 행낭을 이용했어. 외교 행낭은, 외교관들이 문서나 공공 물품을 수송하는 가방인데, 세관 검사를 거치지 않거든. 그 누구도 내용물을 들여다볼 수 없어. 또, 너무 자주 프랑스만 들락거리면 의심을 살 수 있잖아. 일부러 인근 국가로 입국해서 프랑스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기도 해. 과학자인데 무슨 요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 김철 박사는 뒤늦게 프랑스어까지 배운다고 밤잠도 자지 않고 공부하셨대. 이런 노력 덕분인지 다행히 프랑스와의 협상은 술술 잘 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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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머니께 듣기로는, 아버지가 한국에 계신 거는 그냥 한 달 두 달이었고 주로 외국에 많이 나가셨다고 해요. 프랑스를 중심으로 벨기에 독일 이런 데 많이 갔다 오셨다고 그래요. 기억나는 거 한 가지는, 어느 날 프랑스 길거리 음식 크레페. 이거 보고 '프랑스에서 길거리에서 노인네들이 이런 거 사 먹더라' 뭐 이런 얘기하셨던 게 기억이 납니다."
- 김윤, 故 김철 박사의 아들

연구용 원자로는 캐나다에서, 재처리 시설은 프랑스에서 받기로 했어. 이제 어느 정도 기본 틀이 잡혔지. 플루토늄을 얻고 핵폭탄을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야.

"계획한 핵폭탄의 파괴력은 서울 광화문 네거리 상공 580m 위치에서 터뜨릴 경우, 파주 교문리 일대까지 잿더미로 만들고, 최소한 200만 명의 인명을 살상하는 정도의 규모였다. 75년 초, 이미 핵폭탄 설계는 거의 끝마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핵폭탄 설계 연구 책임자 A씨의 증언 中

이대로 일사천리 진행만 잘 되면 돼. 그런데, 핵 개발팀 주변에서 조금씩 묘한 일이 발생하기 시작해.

74년 11월 9일, 한국의 핵 과학자 3명이 극비리에 프랑스 파리 공항에 도착했어. 생고방사와 재처리 기술 도입에 대한 가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비밀출장이야.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숙소로 향하는데, 택시 기사가 깜짝 놀랄 말을 건네.

"한국에서 온 핵과학자들이신가요?"

깜짝 놀랐지. 다음날 한국의 과학자들은 생고방 회사로 향했어. 그런데 직원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생고방사의 기술 외에 또 다른 핵원료 기술이 필요해서 계약을 논의 중인 서커사란 회사가 있었는데, 간밤에 그 회사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는 거야.

수상한 일은 끝이 아니었어. 생고방사와 가계약을 체결한 바로 그날, 생고방사의 기술 담당이었던 직원 한 명이 차 안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거야. 또 그날 저녁, 숙소 옆 건물에서 갑자기 폭발 사고가 일어났어. 이 모든 일이 불과 이틀 동안 일어난 거야.

그리고 그들이 불안해하는 이유, 또 있었어. 그 무렵, 인도가 기습적으로 지하 핵실험을 실시했거든. 인도의 핵개발에 미국은 깜짝 놀랐어. 그때부터 미국은 정보 채널을 총동원해서 다른 나라의 핵개발 동향을 파악하기 시작했어.
꼬꼬무

"본 대사관은 현재 한국의 핵무기 개발 잠재력을 분석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스나이더 주한 미 대사가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2017년 공개)

미국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거지. 핵 개발 계획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났을 때야. 얼마 후, 미국 국무장관에게 보고된 비밀메모에는 이런 게 적혀있어.

"박 대통령은 1977년까지 한국 과학자들에게 '원자폭탄'을 개발하도록 지시했음. 한국이 프랑스 기업과 관련된 시설을 구매하는 협상을 하고 있다는 징후를 가지고 있음. 한국의 이러한 움직임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핵 주요 공급국들, 특히 프랑스와 협력해야 함."
-1974.11.20,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된 비밀 메모 中

미국의 감시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프랑스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프랑스는 미국과 입장이 달랐어. 프랑스는 핵 확산 금지보다, 재처리 기술을 판매해 얻는 경제적 이익에 관심이 더 많았던 거야.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975년 4월, 드디어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생고방사 간에 본계약을 하는 날이야. 생고방사의 사장이 한국을 방문했어. 그리고 우리나라의 원자력 연구소장과 서명식을 가질 예정이야. 책임자들이 원자력연구소장실에 모였어. 그런데, 정체불명의 불청객들이 계속 서성이는 거야. 아무래도 꺼림칙해.

"시청 옆에 원자력병원이 있어요. 그곳 회의실에서 2시간 뒤에 다시 만나지요."

서명 장소를 바꾸기로 했어. 뿔뿔이 흩어져서 각자 이동하기로 해. 미국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007작전' 을 펴는 거지. 과연, 계약서에 사인을 할 수 있었을까?
꼬꼬무

이 사진을 봐봐. 첩보전 끝에 드디어 싸인 끝!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철 박사님이야.
꼬꼬무

"군사적 목적으로 이 시설의 제품을 쓰려고 했다면, 그게 최소 핵무기 한두 개는 만들 수 있지 않느냐…"
- 故 김철 박사

설계도의 연구로 얻을 수 있는 플루토늄은 하루 0.85그램. 핵개발이 점점 더 구체화되어 가고 있어. 미국은 가만히 있었을까? 우리나라의 핵무기 개발을 막기 위한 압박은 더 직접적이고, 거세졌어.

"한국이 재처리 계획을 강행할 경우 의회가 한국에 대한 원자로 건설을 보증하는 수출입 은행 대출을 거부할 것이라고 한국에 경고할 수도 있다고 말함."
-미 국무부가 주한 미대사에 보낸 비밀문서 中

우리나라가 계속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미국이 빌려주기로 했던 돈을 안 줄 거라는 얘기야. 이 상황에서 우리의 과학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꼬꼬무

"공공연히 우리가 핵개발을 한다고 표방은 못 해요. 지금도 그 말을 하기는 좀 난처한 점이 있지만. 핵개발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는 건 틀림이 없어요. 근데 우리가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것은 '피스플 유즈 오브 뉴클리 에너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었어요."
-故김철 박사, 1998년 인터뷰 中

'우리는 전쟁이 아니라 빵을 구할 목적으로 핵을 이용한다' 한마디로 속인 거야. 미국은 우리 말을 믿지 않았어. 미국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결정적인 이유가 또 있어. 한 농장 때문이야.

▲ 농장의 비밀
꼬꼬무

"처음에는 '신성농장'이라고 그랬습니다. 충남경찰청장이 순시를 돌다가 가서, 농장이라고 간판이 붙어 있고 트럭이 왔다 갔다 하니까 그곳에 들어오라고 했어요. 경찰청장인데 못 들어가게 딱 막았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경찰청장이 화가 나서 그 지역 담당 안기부장한테 항의를 했다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그분이 '야 나도 못 들어가는데 네가 들어갈 생각 하지도 마라' 그러니까 이제 그때 이제 감을 잡은 거예요."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대전 외곽에 지역 안전의 최고 책임자도, 국가 정보기관 요원도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농장. 이 농장 정체가 뭘까? 농장의 비밀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메모에서 시작돼.

"극비. 국방과학연구소는 즉시 지대지 유도탄 개발계획을 작성해 보고할 것."

지대지의 '지'는 땅'지'자야. 그러니까 지대지 유도탄은, 지상에서 발사해 지상에 있는 목표물로 유도해서 공격하는 미사일을 말해. 그러니까 이 농장은, 미사일을 만드는 곳이었어.

그런데, 미사일과 핵개발, 어떤 관련이 있을까? 미사일을 만들어 핵탄두를 실으면, 그게 곧 핵미사일이 되는 거야. 핵폭탄을 실을 수 있는 미사일 자체 개발에 나선 거지. 먼저 우리나라가 미사일 개발이 가능할지, 국방과학연구소 과학자들은 검토를 시작했어.
꼬꼬무

"저한테 주어진 시간이 4개월이었었어요. 한강변에 아파트들 그때 짓기 시작을 했는데 그 아파트 중에 하나를 임대를 해서 거기에 들어갔죠. 처음에 소장님께서 거기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부인들을 전부 불러가지고 식사를 한번 같이 하면서 '4개월 동안은 접촉이 안 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십시오'…"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국방과학연구소 이경서 박사팀이 4개월간 연구를 해봤더니, 미사일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려면, 일단 필요한 기술들을 배워야 해. 이경서 박사는 미국의 맥도널 더글라스사란 방위산업 업체에 기술 이전을 요청했어. 맥도날 사는 일단 반겨. 냉전 시대라 무기 수요가 줄어 회사 매출도 줄어들던 시기였거든. 그런데 미사일 기술 이전은 절대 안 된대. 미국은 기술 이전 대신, 오래된 다른 미사일을 직접 지대지 유도탄으로 개조해 주겠대. 기술은 안 주고, 완성품을 사라는 거지. 가격은 무려 2,000만 달러. 너무 비싸. 당연히 거절할 거 같지?

근데 이경서 박사는 이 제안, 받아들이기로 했어. 대신 이 박사에게는 한 수가 더 있었어. 미국의 완성품을 사는 대신, 개조하는 과정에 예비설계를 같이 하자고 했어. 예비설계를 검토한 뒤, 괜찮으면 나머지 금액을 내고 미사일을 사겠다는 조건을 붙인 거지. 예비설계 단계까지 가격은 총액의 10% 수준을 제시했어. 왜 이런 제안을 했을까?
꼬꼬무

"제가 당장 아이디어 얻은 것이 '아 여기서 우리가 기술을 빼낼 수 있겠다' 예비설계를 하면서 우리 팀이 거기 가서 기술을 가져다 배우자. 저는 뭔가 하면, 그걸(예비설계) 해서 그걸(미사일) 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10%의 가격만 낸 예비설계 과정에서 기술만 빼올 생각이었던 거야. 맥도널 사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어. 원래 단계별로 나눠 계약하고, 한 단계가 끝날 때마다 계속 진행 여부를 검토하는 게, 미국의 계약 방식이기도 했거든. 그러니 거리낌 없이 오케이 한 거야. 사실, 미국 유학파였던 이경서 박사는 미국인들이 이런 식으로 계약을 한다는 걸 알고 있던 거야.

그렇게 우리나라 국방과학연구소 소속 과학자 10여 명이 미국으로 날아갔어. 그런데 미국도 호락호락하지 않지. 같이 있을 땐 흔쾌히 자료를 보여주지만, 퇴근할 때 모든 자료를 회수하고 자물쇠를 채워. 당연히 복사도 불가해. 자료를 충분히 보고 익혀야 하는데, 애가 타. 우리 과학자들은, 인간 복사기가 됐어.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눈으로 스캔해서 머리에 담았어. 그리고 숙소에 와서 열심히 옮겨 적는 거야. 근데 아무리 똑똑해도, 자료 양이 점점 많아지니 한계가 있잖아. 결국 다른 방법을 택해야 해. 어떤 방법이었을까?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들고 나오자' 였어.

"사실 참 위험한 일이었어요. 옷 속에도 숨기고 다들 재주껏 자기 필요한 것들을, 참 용감했어요."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미국 직원들 앞을 지날 때면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내일 보자"고 하고, 그리고 숙소에 가서 복사기로 밤새 복사를 했어. 그렇게 차곡차곡 자료들을 모으고 '이제 됐다' 싶었을 때, "여기까지만 합시다. 이후 계약은 없던 걸로 하죠"라며 계약을 중단했어.
꼬꼬무

"유도탄에 대해서 저희들 90% 이상은 거기서 다 배워서 나왔습니다. 연구소에 나중에 돌아와서 그것이 저희들 바이블이 됐습니다."
-이경서, 전 국방과학연구소장

▲ 극비임무의 종료, 봉투의 행방은?

위험까지 감수한 과학자들의 애국심으로 미사일 제조방법까지 얻어냈지만, 미사일 개발하는 걸 안 미국은 캐나다와 프랑스에 직접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어. 캐나다에 원자로를 팔지 말라고 하고, 프랑스에는 계약 파기에 따르는 손해 비용까지 보상해 주겠다고 제의했어. 계속되는 미국의 압박에 결국 1976년 초, 생고방사와의 계약은 최종 파기가 됐어. 캐나다도 원자로 판매계획 철회를 통보해 왔지.

하지만 우리 과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어. '핵연료개발공단'이란 이름의 기구를 발족시키고, 자체적으로 핵연료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갔어. 초대 소장은, 주재양 박사. 김철 박사는 개발 연구부장을 맡았어. 공식적으로 '국내에 매장된 우라늄을 연료로 가공하는 방식을 연구하는 거다' 라고 했지만, 미국은 여전히 믿지 않았어. 밀착 감시를 위해 주한 미국대사관에 로버트 스텔라라는 과학무관까지 파견했어. 원자력 분야의 전문 훈련을 받고 파견된 미 CIA 요원이야. 그는 수시로 우리 연구소를 급습하듯 찾아왔다고 해.

"사전에 전화도 없이 불시에 달려오곤 했어요. 승용차에 성조기를 펄럭이며 나타날 때는 정말 위세등등 했습니다. 아무 방이나 '문 열라'고 하고 시설 측정도 제멋대로 했어요. 화가 나 '여자 화장실 문을 열어 조사하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위상인가 싶어 서글픈 생각도 들고, 자존심이 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
-故김철 박사의 증언 中

그렇게 버텨오던 핵개발 프로젝트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완전히 종료돼.

때는 1979년 10월 26일. 연구소에서 일하던 과학자들은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어.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전해졌거든.
꼬꼬무

대통령 서재 뒤편에 금고가 있었다고 해. 박 전 대통령은 그 금고에 많은 현금과 함께, 아주 중요한 이걸 보관했어.
꼬꼬무

봉투엔 핵무기 관련 보안 문서가 담겨 있었어. 오원철 수석은 박 대통령 서거 후 서재로 가서 이 금고를 열었어. 현금은 사라졌는데, 다행히 봉투는 아직 남아있어. 오 수석은 이 봉투를 봉인해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넘겼어. 이 문서들은 나중에 전두환 정권에 전달됐다고 해. 훗날, 오 수석이 핵무기 관련 문서들을 영구 비밀문서로 바꾸기 위해 국가기록원에 갔는데, 노란 봉투 속에 담겨 있던 문서들이 보이질 않았대. 오 수석은 핵 관련 문서들이 미국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어.

당시 전두환 정권은 미국으로부터 정권을 인정받기 위해, 더 이상 핵 개발을 추진하지 않았던 걸로 추정돼. 그리고 과학자들도 대거 해고됐어. 국방과학연구소에서만 1000명 중 무려 800명이 쫓겨났어. 이경서 박사도 이직을 했고, 김철 박사 역시 연구소를 떠났어. 자신이 가진 능력과 지식을, 조국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냈던 과학자들. 젊음을 바쳤던 직장을 한순간에 읽게 된 참담함. 그 마음은 어땠을까?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핵무기 개발이 완전히 중단되던 이 시점, 우리나라의 핵무기 개발 수준은 어느 정도까지 도달했었을까? 당시 미 국무부 비밀문서에 그 내용이 적혀 있어.

"현재 정보로 추정해 볼 때, 한국은 1980년경까지 핵 장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이 파악한 한국의 기술 수준은 이 정도였어. 우리나라는 어쩌면, 핵무기 개발에 정말 근접해 있었을지 모르지.

2023년 기준, 현존하는 핵탄두의 수는 12,522기라고 해. 만약에 12,522기의 핵무기가 한꺼번에 폭발한다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 만일, 세계 핵무기의 90%를 보유한 미국과 러시아가 전면전을 벌인다면? 핵폭발로 인한 직접 사망자가 3억 6,000만 명. 그리고 1억 5,000만 톤의 그을음과 먼지, 방사성 낙진이 대기를 뒤덮으면서 햇빛이 차단되는 핵겨울이 발생해서 지구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해. 세계 식량 생산량이 90% 줄어들고, 굶어 죽는 인구가 53억 명으로 추산된대. '인류 전멸' 수준인 거지.

그렇다면, 또 만일, 지금 존재하는 핵무기가 모두 사라진다면, 인류에게 평화가 찾아올까? 핵무기뿐 아니라, 현존하는 모든 무기를 몰수하더라도, 인간들의 싸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한, 돌멩이나 막대기를 주워서라도 서로를 죽고 죽이는 일을 계속할지 몰라. 사람들이 진정으로 평화를 추구할 때, 자연스럽게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게 되지 않을까.
꼬꼬무

'그날' 이야기를 들은 '오늘' 당신의 생각은?

강선애 기자  

(SBS연예뉴스 강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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