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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이 영화를 본 날이면 고속버스터미널에 가야한다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130 "브루탈리스트"

  2주 앞으로 다가온 98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강력한 다관왕 후보작 《브루탈리스트》가 국내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는 이미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고, 최근 골든글로브에서도 주요상(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아카데미상에서는 10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있다. (13개 부문 후보에 오른 《에밀리아 페레즈》에 이어 두 번째지만 후보에 오른 부문을 내용적으로 보면 거의 같거나 오히려 《브루탈리스트》가 더 낫다) 

일찌감치 홍보를 시작한 이 영화의 포스터 등 시각 광고를 봤다면 당신은 그 선 굵은 폰트와 라인에 눈길이 갔을 것이다. 건축 사조(思潮)인 ‘브루탈리즘’을 2차원 평면 상에 펼쳐 보인다면 바로 그런 디자인이 나온다.

  최근 몇 년 사이, 당신이 ‘요즘 핫하다’는 빌딩이나 갤러리, 신상 카페에서 보고 또 봐서 질렸을 인테리어가 바로 브루탈리즘이다. 벽면에 도배를 하거나 마감재를 붙이지 않고 콘크리트를 그대로 둔 채 천장 에어컨과 전열 교환기 등의 배관을 노출한 카페나 식당은 지금도 여전히 유행이다.

1950년대 영국에서 싹튼 브루탈리즘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모더니즘 건축의 기능주의와 단순성에 대한 추구를 더 밀어붙이는 한편, 노출 콘크리트처럼 건축 재료의 물성을 강조하는 건축, 평등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기념비적인 규모의 건축으로 ‘미드센추리’를 풍미했다. 

제주도와 원주 등에 있는 인기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떠올리면 쉬운데, 더 쉽게는 육중한 사다리꼴 형태의 건물인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가보면 된다. 1981년에 준공된 서울고속버스터미널(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기념비적이고 기능적인 브루탈리즘 건축을 보여준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설계 당시 투시도 / 1980, (주)완종합건축설계사무소(이강식)
  영화 《브루탈리스트》의 주인공 라즐로는 브루탈리즘의 상징인 노출 콘크리트처럼, 겉 다르고 속 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유대계 헝가리인인 그는 나치를 피해 가까스로 미국 이민길에 오른다. 모더니즘의 산실인 바우하우스(데사우)에서 수학한 뒤 헝가리의 유명한 건축물들을 설계한 건축가인 라즐로지만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미국에서는 노숙자 보호소에서 지내며 석탄을 캐고 볼링장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한다.

그가 미국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대개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이다. 부유한 사업가 밴 뷰런(건축주)은 라즐로가 설계한 자신의 서재가 마음에 안 든다며 돈도 안주고 쫓아버리지만 (심지어 라즐로는 부다페스트 시립 도서관을 설계한 건축가인데!) 주변 사람들이 서재 인테리어가 끝내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자 라즐로를 아예 집으로 불러들여 작고한 모친을 기리는 복합문화센터 건축을 맡긴다. 그는 겉으로는 라즐로를 존경하는듯 하면서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지만, 뒤로는 건축비 감독관과 자신의 아들을 붙여서 라즐로를 옭아맨다. 

감독관과 밴 뷰런의 아들이 공사비를 깎으려고 일부 설계를 변경하자 라즐로는 자신의 급여를 쏟아 부어서라도 설계대로 공사하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고 처음에는 라즐로를 떠받들듯 하던 밴 뷰런 일가도 점차 이방인인 라즐로를 무시하고 경멸하며 ‘구별짓기’(La Distinction)에 나선다. 

  속이야 어떻더라도 겉은 번지르르 해야 하는 딜레탕트 자본가가 외려 브루탈리즘에 매력을 느꼈다. 라즐로는 나이브하게 솔직하고 밴 뷰런은 세련되게 위선적이다. 유럽 문화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갖고 있는 밴 뷰런은 미국을 은유한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차츰 드러나지만 돈과 폭력이 밴 뷰런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욕이란 끝을 모르는 것이어서 밴 뷰런은 작품뿐 아니라 작가도 글자 그대로 ‘소유’하고 싶어한다.

  3시간 34분에 이르는 긴 영화다. 형태는 기능을 따르듯이, 형식은 내용을 따르고 내용은 형식과 조응하는 영화가 좋다. 한 이민자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고 있는 《브루탈리스트》는 라즐로의 유장한 인생을 전개시키기 위해 시간을 충분히 들인다. 천천히 변해가는 라즐로 모습은 시간을 들였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묵은지는 구진해질 때까지 묵어야 묵은지 맛이 나지, 인위적으로 빨리 익힌다고 묵은지 맛이 나는 게 아니다. 결은 좀 다른 이야기지만, 다양한 종류의 ‘챗GPT들’을 밤새도록 돌려놓고 자면 그것들이 밤새도록 일을 해서 아침에 ‘짠’하고 결과물을 내놓는다며 스레드에서 ‘미쳤다’를 연발하는 이들이 있던데 도대체 그렇게 해서 그들이 이루려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라즐로가 설계한 밴 뷰랜의 서재 / UPI코리아
  중간에 15분 간의 인터미션이 있다. 3시간 26분에 이르는 《플라워 킬링 문》을 만든 마틴 스콜세지는 자신의 영화는 절대 인터미션 없이 한번에 봐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브루탈리스트》의 인터미션이 좋았다. 15분 동안 화장실도 가고 잠시 복도를 걷고 심호흡을 하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영화관에 들어오니 더 영화에 집중이 잘 됐다. 

  “브루탈리스트”는 할리우드 영화로는 무려 63년 만에 -이미 한참 전에 시장에서는 밀려난- 비스타비전 카메라로 찍었다. 35mm 필름을 90도로 돌려 이어 붙여 찍기 때문에 화질이 뛰어나다. 1954년 파라마운트사에서 TV의 위협에 맞서 내어놓은 고해상도 와이드 스크린 포맷(이 영화의 경우 1.66:1의 화면비)인 비스타비전은 거대한 건축물을 왜곡없이 촬영하기에 적합한 화각이 나온다.

DCP(디지털 시네마 패키지), 35mm, 70mm 필름 버전의 상영본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단관 시절의 대한극장 이후로는 70mm 필름 상영관이 사라졌으므로, 이 영화를 제작자의 의도에 최적화된 버전으로는 볼 수 없다. 그나마 70mm 필름 버전에 가장 비슷한 스펙으로 볼 수 있는 큰 스크린인 용산 CGV 아이맥스관에서는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를 한다. 

  겉보기엔 지루하고 딱딱해 보일 수도 있어도 브루탈리즘 건축에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공공기관 건축에 잘 어울린다. 최소한, 근래 공공기관 건축에 유행한 ‘전면 유리, 무조건적 비정형’ 건축물보다는 낫다. 준공 후 에너지 사용 효율 측면에서도 그렇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전시(展示)보다는 형태는 기능을 따르기를, 수단은 목적에 복무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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