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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후이(安徽)성 동남쪽 끝자락에 후이저우(徽州)가 있다. 후이저우는 중국 10대 상방 중 최고로 손꼽히는 후이상(徽商)의 고향이다.
후이상은 흥미롭게 '유학자 상인(儒商)'이라고도 불린다. 예부터 후이저우 주민이 주희를 실생활에서 최고의 사표(師表)로 삼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집안마다 《주자가훈》을 두고 인생의 교과서로 읽었다.
후이저우는 주희와 인연도 깊다. 주희는 푸젠(福建)성 요시(尤溪)에서 태어났지만, 선조는 대대로 후이저우의 호족이었다. 아버지가 관직에서 물러나 요시에 은거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주희는 평생 스스로를 '후이저우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여러 차례 후이저우를 방문했다. 후이저우 주민도 주희를 고향 사람으로 여겨 그의 말과 글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살았다.
본래 안후이성 주민은 중국 각지로 나가 상업에 종사했다. 명대 말기부터 양쯔강(長江)과 그 지류에 접한 대부분 도시의 상권을 안후이 상인이 장악할 정도였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와 전장(鎭江)이었다. 이 중 양저우는 대운하를 기반으로 당대부터 중국의 남북을 이어주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그러나 송·원대에는 항저우(杭州)와 쑤저우(蘇州)에 상업 지위를 내주며 침체에 빠졌다. 이를 명대 후이저우의 염상(鹽商)이 들어가서 중국 최대의 소금 집산지 및 교역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원래 후이저우 상인이 다루었던 품목은 고향의 특산품인 문방사우와 목재, 차 등이었다. 후이저우에는 벼루와 먹으로 쓸 수 있는 좋은 돌이 많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황산(黃山)에 질 좋은 나무가 많았기에 붓과 종이, 가구를 만들기 쉬웠다.
후이상은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특산품을 가지고 팔다가 점차 종류를 늘렸다.

명대에는 후이상이 양쯔강 연안의 전당포, 목재소, 차가게, 정미소 등을 모두 손아귀에 넣었다. 특히 해안가의 대형 염전을 독차지했다. 후이상이 양쯔강 일대를 집중 공략했던 것은 수로가 발달해서 물자를 운반하기 편리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집안이나 고향 출신을 불러들이기 쉬웠다.
객지에 나가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후이상은 부족한 자본과 인맥을 동족이나 동향으로 메워나갔다. 이렇게 세력을 키워 "후이상이 없으면 도시가 완성되지 않는다(無徽不成鎭)"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입지를 굳혔다.

이런 성장 배경 때문인지 후이상은 족보 편찬에 열성적이었다. 족보에 성공한 조상의 이야기를 담아 정체성과 자긍심을 키웠고, 동족 간의 상호 신뢰를 견고히 했다.
또한 다른 지역의 상인과 달리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성공하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한 우물만 파서 해당 업종의 최고가 되려 했지, 투자를 늘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 않았다. 심지어 다른 업종에 눈을 돌리는 일은 상도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후이상 대부분이 타지에서 성공한 사업 기반을 정리해 귀향했고, 극소수만 객지에 눌러앉았다.

후이상은 장사할 때는 악착같이 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았지만, 고향에 돌아가서는 경쟁적으로 으리으리한 저택을 지었다. 그것이 잘 보존된 곳이 서셴(歙縣)고성이다.
서센고성은 황산시의 동북부, 신안강(新安江) 상류에 있는 도시다. 진대에 처음 현이 설치됐고, 당대까지는 섭주(歙州)라고 불렸다. 후이저우부가 들어서면서 주변 여섯 개 현을 다스리는 후이저우문화권의 중심지가 됐다.
강을 끼고 있으나 깊이는 얕았다. 후이저우인은 수운을 활성화하기 위해 수심을 높여 위량바(漁梁壩)라는 수리시설을 건설했다.

당대 처음 만들어졌는데, 명대 초기에 높이 4m, 길이 138m로 중건했다. 따라서 위량바는 후이상이 양쯔강 연안 도시로 나가 장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서셴고성 안으로 들어서면 멋들어진 석패방이 줄지어 서 있다. 물론 후이저우 곳곳에 다양한 석패방이 세워졌지만, 서센고성의 허국(許國) 석방이 으뜸이다. 허국은 16세기 예부상서와 대학사까지 오른 관료였다. 말년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석패방을 세웠는데, 중국에서 유일하게 사방으로 오갈 수 있다.
서센고성의 또 다른 정수는 좁은 골목길에 있다.

더우산(頭山)거리에는 외지에 나갔다가 되돌아온 후이상이 세운 저택이 몰려있다. 집집마다 개성 있고 멋들어진 건축 양식을 갖고 있어 '강남 제일의 건축박물관'이라고 불린다. 후이상은 좋은 집을 지어 자녀가 학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관계에 몸을 담아야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자녀 교육에 열성을 다했다.
후이상은 기존 상권을 장악했던 상방에 도전하는 후발 주자이었기에 든든한 보호막이 필요했다. 이를 관료와의 관시(關係)로 해결했다. 관료와 친분을 쌓아 시장 정보를 얻고 자금 지원을 받았다.

누구보다 빨리 정보를 빼내어 특정 상품을 대량으로 사두었다가 막대한 시세 차익을 거둬 팔아넘겼다. 이런 매점매석은 관의 도움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게다가 산은 많고 경작할 땅이 적은 자연환경으로 인해 장사했지만, 후이저우인의 마음속에는 상인을 천시하는 선비 의식이 있었다. 벼슬에 올라 입신양명하는 일이 후이저우인의 로망이었다.
그 때문에 후이상은 20~30대에 사업에 성공하고, 불혹에 과거를 보는 이가 적지 않았다. 자신은 급제하지 못해도 자녀는 관료가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래서 후이저우 출신 향시 급제자와 진사는 명대 1천100명과 444명, 청대 1천536명과 517명이었다. 이는 안후이 전체의 81%에 달한다.
이렇듯 후이저우에서는 유학자와 상인이 만수산 드렁칡 같았기에, 후이상을 유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주자학의 맹신은 여러 문제점을 낳았다. 예법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극단적인 일탈행위가 횡행했다. 후이저우아문에서 공연하는 연극 '삼계비(三戒碑)'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명대 말기 한 마을에서 어느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부정을 저질렀다는 유언비어를 듣게 된다.

이에 며느리를 관아에 고발해 고문받게 하고 자살을 강요한다. 며느리는 자결하지만, 얼마 뒤 며느리를 사모한 이웃 남자가 벌인 음모였음이 밝혀진다. 후이저우에서는 과부가 되면 자살하는 일이 여성의 본분이었다. 관청에서는 이들 가문에게 열녀문을 내려 조장했다.
후이상은 사업의 전통과 노하우를 후대에 전수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장사는 과거 급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을 뿐, 대를 이어 장사하기를 꺼렸다. 그로 인해 20세기 이후 후이저우에서는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고 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