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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을 때 옆방에 있어 줘"…삶 속의 죽음을 직면하다 [스프]

[취향저격] 죽음 같은 삶과 삶 같은 죽음의 모순을 아름답게 그린 영화 (글 : 이화정 영화심리상담사)

이화정 취향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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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거장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기대하게 된다.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항상 평범하지 않았다. 복잡하게 얽힌 사건들을 배경으로 주인공들은 미처 풀어내지 못한 분노와 슬픔을 가슴에 담고 있다. 알모도바르 감독은 억눌린 감정을 엉킨 실타래 풀 듯 조용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풀어낸다. 주인공들은 감정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대신 관객에게 넘겨준다. 특히 그의 최신작 <룸 넥스트 도어>는 2024년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탔고, 주인공을 맡은 두 여배우가 틸다 스윈튼과 줄리안 무어이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끌렸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에는 살인, 근친 강간 같은 윤리적인 문제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인 존엄사는 다른 영화들에서도 이미 많이 다루어졌고, 기대수명이 현저하게 길어진 현시대에서 윤리성보다는 현실적이고 진지한 고민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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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넥스트 도어>는 같은 주제를 담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존엄사의 의사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갈등 부분을 생략하고 오직 조용하고 이성적으로 죽음에 집중하고 있다. 죽음의 시각을 정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장치다. 정확한 시각을 예고하진 않지만, 시계가 재깍재깍 소리를 내면서 흐름을 알리듯,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영화는 감지할 수 없는 죽음의 소리를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의 표정을 통해 담아내고 있다. 마사(틸다 스윈튼)가 아침에 자신의 방문이 닫혀 있으면 밤사이에 자신이 죽음을 실행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잉그리드는 매일 깊이 잠들지 못한 채, 새벽마다 떨리는 마음으로 마사의 방문을 확인한다.

알모도바르 영화의 인장은 존엄사 서사에도 찍혀 있다. 존엄사 서사답지 않게 프레임에 담긴 소품들, 주인공들의 의상, 배경은 아름답고 화려하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의 마사는 마치 크리스마스 파티를 앞둔 사람처럼, 밝고 따듯한 느낌을 주는 원색의 니트를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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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작가인 잉그리드가 마사의 투병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가면서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예기치 않게 바뀐다. 마사는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때 옆방에 있어 달라는 생소한 부탁을 한다. 처음에는 그 부탁을 거부했지만, 잉그리드는 금방 마음을 바꾼다. 친구를 위한 최선의 호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옆방은 거꾸로 말하자면 죽음을 뜻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죽음의 그림자가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삶 속에 녹아 있는 여러 형태의 죽음을 보여준다. 전쟁에서 돌아와 트라우마로 정신이 나가버린 남자친구가 환청을 들으며 사람을 구하겠다고 불타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 성장하면서 부재한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는 환상을 붙잡고 있는 딸, 서로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는 모녀의 관계는 죽음을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한때 마사와 사귄 적이 있었던 데미안은 노골적으로 지구의 죽음과 인류의 멸망을 이야기한다.

종군기자였던 마사는 평생 죽음의 현장에 있었다. 같은 동료 역시,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잊게 하는 최고의 약이 섹스라고 말한다. 죽음 속의 삶이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만큼 그녀는 죽음과 대면에 익숙하다. 환경 파괴로 인류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데미안도 마사와의 섹스를 마치 테러리스트와 섹스하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마사를 죽음의 경계선에 놓는다.

숲에서 새소리가 들리고 겉으로는 아름다운 세상과는 달리, 다크웹이라고 표현한 보이지 않는 추악한 음지의 세계도 죽음을 닮았다. 영화는 마사가 유지하고 싶은 인간의 존엄성이 추악한 세상의 도움이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모순을 말한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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