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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대체입법 '왜' 안 되나…'법 없으니' 할 수 있는 일 없나 [스프]

[뉴스쉽]

박수진 뉴스쉽 썸네일
 

파편화된 뉴스는 이제 그만, 이슈의 맥락을 읽는 재미를 담았습니다.
 

# 인터뷰 약속은 오후 2시. 문자를 받은 건 1시 25분이었습니다.  "기사 제목이 '합법도 불법도 아닌 임신중지'로 나간다면 저는 인터뷰하기 곤란합니다."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제도 마련을 촉구해 온 시민단체 관계자였는데, 미리 보낸 질문지에 '합법도 불법도 아닌 임신중지 5년'이라고 적었던 기사 '가제'를 뒤늦게 확인한 듯했습니다. "제목은 정해지지 않았고, 그런 시각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까지 인터뷰에서 설명 부탁한다"라고 답을 보냈고 다행히 인터뷰는 예정대로 진행이 됐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문자를 보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해당 법은 소멸했고, 우리나라에서 낙태는 '비범죄화'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합법도 불법도 아니다'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 지난 5월 유엔 차별철폐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던 보건복지부 출산정책과장은 2019년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한국의 후속 조치를 묻는 유엔 위원 질의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헌법불합치 결정은 위헌 결정과는 구분되는 개념입니다.  형법의 낙태죄는 적합한 수단이지만 임신 유지와 종결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니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형법상 낙태죄에 대한 전면 폐지는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지난 14일 '임신중지 비범죄화 후속 보건의료 체계 구축과 권리 보장 입법 촉구' 시민사회계 간담회 

이유 1. 헌재의 판결 이후 상황을 보는 서로 다른 시각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한 여성과 이를 도운 의사를 처벌하는 근거였던 형법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20년까지 대체 법을 만들라고 했지만 만들지 못했습니다. 헌재 결정을 기준으로는 5년, 대체입법 시효를 기준으로는 4년이 지났습니다.

앞서 언급한 두 사례에서 보듯, 시민사회계와 정부가 헌재 결정 이후의 상황을 보는 시각은 전혀 다릅니다. 시민사회계가 말하는 '비범죄화'라는 말은 헌재가 대체 법을 만들라고 한 2020년 12월 31일 시효를 넘기면서 낙태죄는 완전히 사라졌고, 낙태는 더 이상 법으로 제한하거나 처벌하는 대상이 아니게 됐다는 뜻입니다. 시민사회계가 말하는 '낙태죄 대체입법'은 낙태가 비범죄화된 현재 상황을 법적으로 확정 지어라, 즉 '낙태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를 명확히 하라는 요구입니다.

하지만 정부의 시각은 다릅니다. 헌재가 정한 2020년 시효가 지나갔지만 대안 입법을 만들어야 하는 건 변함이 없고, 그 방향은 낙태를 처벌하던 기존의 형법을 일부 수정하는 것이지 아예 없애는 게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난 21대 국회에 정부가 임신 14주까지는 전면 허용, 24주까지는 제한적 허용을 골자로 법안을 발의했던 것도 이런 틀 안에서 이뤄졌습니다. 24주 이후는 (실제 현실에서 처벌이 되는 사례는 이전에도 거의 없긴 했지만) 전면 금지, 처벌의 대상으로 남겨두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시민사회계가 크게 반발했고, 국회에서 공전을 거듭하다 폐기됐습니다.

지난 7월 보건복지부가 개최한 인공임신중절 관련 법 제도 개선 방안 간담회 

이유 2. 법 '없어도' 할 수 있다 vs 법이 '없어서' 못 한다

이런 시각 차이는 법을 만드는 문제뿐만 아니라 임신중지와 관련한 현재 보건 정책 시행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시민사회계는 대체입법 여부와 상관없이 정부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많음에도 손을 놓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법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을 법이 없어서 못 한다고 핑계를 대고 있단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민사회계는 임신중지도 출산처럼 전면적으로 건강보험을 적용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현재도 친족 간 임신이나 성폭행 등에 의한 임신중지의 경우에는 건강보험 적용이 되지만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경우는 대상이 아닙니다. 시민사회계는 일부 임신중지에 대해선 이미 건강보험 적용을 하고 있으니 이 사유를 확대해 전면 적용하는 건 대체입법의 여부와 상관없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의 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보건복지부 장관이 요양급여 대상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게 주장의 근거입니다.

또 먹는 낙태약, 즉 유산유도제를 도입해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들의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도 있는데, 이 또한 대체입법과 무관하게 식약처가 절차를 거쳐 승인을 하면 바로 도입이 가능하다는 게 시민사회계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건강보험 전면 적용, 먹는 유산유도제 도입 모두 '법을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조규홍 보건복지부장관은 지난 23일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이 임신중지 관련한 정부의 상담과 지원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자 "형법상 어떤 것이 죄가 되고 어떤 것이 죄가 아닌 것이 명확해지면 모자보건법에서 상담과 지원이 더 잘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식약처도 먹는 유산유도제 도입이 지연되는 것에 대한 국회의 질의에 '위해성 관리 계획 등 허가 요건을 갖추지 위해 임신중지 허용 주수가 결정돼야 한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법이 만들어지면 해결될 것'이라는 논리는 복지부도 식약처도 같았습니다.
 

이유 3. "어떻게 해도 욕먹을 이슈"... 뒷짐 진 국회

입법의 주체인 '국회'는 그럼 어떤 입장일까요? 올해 5월 개원한 22대 국회에는 관련 법안이 아직 한 건도 발의되지 않았습니다. 이전 21대 국회에선 6개의 형법 개정안과 7개의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발의되기도 했지만 단 한 건도 통과되지 못했고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됐습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임신중지권이 충돌한 결과라는 해석도 많고, 종교계의 반대 때문이라는 원인 분석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지난 2020년, 당시 민주당 의원이었던 권인숙 전 의원은 형법에서 낙태죄를 아예 삭제하고,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허용 한계를 정해놨던 모자보건법 14조를 없애고, 약물 임신 중단도 허용하는 내용의 개정안들을 발의한 바 있습니다. 시민사회계의 요구와 맞닿아있는 내용이었지만 이 법은 민주당 내에서도 전면적 공감을 얻진 못했습니다. 제한 없이 모든 경우의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었던 겁니다.

국회가 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합의'는 필수적입니다. 한 사안을 보는 다양한 의견을 취합하고 논의를 거쳐 합의된 안을 만들어 실제 법으로 만드는 것이 국회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낙태, 임신중지의 문제는 그 '사회적 합의' 자체가 난제인 것 같습니다.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주수를 10주는 너무 적으니 20주까지는 늘리자고 한다거나, 전면 허용은 급진적이니 허용 사유를 어느 범위까지만 넓히자는 등의 조율이 어려운 이슈여서입니다.

21대 국회에서 낙태죄 대체입법을 마련하는 과정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기자에게 이런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법을 만들려고 하면 무조건 (주수) 제한이나 규제, 또 이를 위반했을 시 처벌 등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대체입법을) 못 한다기보단 안 한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 "어떤 결정을 해도 욕먹을 수밖에 없는 이슈 아닌가."

뉴질랜드 DECIDE 홈페이지 메인 페이지 

뉴질랜드 DECIDE 홈페이지 메인 페이지

2019년 헌재 결정으로 우리나라는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 국가가 되었고, 이런 상황은 굉장히 선진적입니다. (모든 범위의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주요 국가는 캐나다, 뉴질랜드 정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낙태죄가 소멸됐을 뿐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장 체계는 마련된 것이 없습니다. 앞서 정리한 것처럼 시민사회계와 정부는 '평행선'이고, 국회는 민감한 이슈를 외면하며 '뒷짐'을 지고 있습니다. 사회적 논의의 배경과 전제가 돼야 할 의료계의 전문적인 의견 개진도 의정 갈등 상황이 더해지면서 사실상 전무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요?

'DECIDE'라는 제목의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이 사이트에 접속하면 상단에 '제공자 찾기(Find a provider)'라는 메뉴가 나옵니다. 이 메뉴로 들어가서 지역을 입력하고 마지막 생리가 시작된 첫날이 언제인지까지 입력하면 본인이 설정한 지역 내에 방문 가능한 병의원의 명단, 제공 가능한 시술 내용, 위치까지 보기 편하게 나옵니다.

'토닥톡'이라는 앱이 있습니다. 이 앱에 접속하면 병원 정보 등을 찾을 수 있는 메뉴가 나옵니다. 메뉴를 누르면 '로그인'을 요구합니다. 여성만 가입이 가능합니다. 병원 정보는 서울, 경기, 비수도권으로 나뉘어있고 지역별로 일부 병의원의 명단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이 남긴 후기를 볼 수 있고, 병원 측과 채팅 및 전화 상담이 바로 가능한 탭도 있습니다.

DECIDE(decide.org.nz)는 뉴질랜드 정부가 운영하는 임신중지 정보를 제공하는 웹사이트입니다. 임신중지를 제공하는 병의원 명단뿐만 아니라 접속자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경우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무엇이 있는지, 임신중지를 결정했다면 또는 출산을 결정했다면 어떤 방법들이 있는지, 임신중지 전과 후 상황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설명도 나옵니다. 로그인 할 필요 없고, 무료로 제공됩니다. 뉴질랜드 보건부 홈페이지에서 'abortion'을 입력해도 DECIDE 사이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토닥톡은 한국의 한 민간 업체가 운영하는 임신중지 정보 제공 앱입니다. 병의원 정보뿐만 아니라 실제 임신중지를 한 사람들이 남긴 후기를 볼 수 있고, 임신중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글도 볼 수 있습니다. 가입을 하면 이용은 무료입니다. 단, 이 앱에 노출된 병의원은 운영사 측에 광고비를 지불한 곳들입니다. 서울의 한 산부인과는 이 앱에 이름을 노출하는 비용으로 수백만 원을 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임신중지 관련 정보 앱 '토닥톡'을 사용하는 모습
'우리나라는 뉴질랜드와 같은 정부가 운영하는 임신중지 정보 사이트가 없나요?'라고 물으신다면, 네 없습니다. 기자가 만난, 국내에서 임신중지를 한 여성들이나 고민하는 여성들 대부분은 '경험자의 후기'를 가장 신뢰했습니다.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출산 여부를 고민하는 상황은 우리나라에서도, 뉴질랜드에서도 발생할 수 있지만 이후 접근할 수 있는 정보,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 등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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