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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통일 대업 이룬 뒤 하사한 그 술…'영생' 꿈 담긴 그곳서 익혔다 [스프]

[술로 만나는 중국·중국인] 주하이에서 익히는 진시황의 어주 '시펑주' - 산시 시안 편 (글 : 모종혁 중국문화평론가·재중 중국 전문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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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1호갱의 전경. 전체 중 절반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1974년 3월 11일 산시(陝西)성 린퉁(臨潼)현 시양(西楊)촌의 농민들이 마을 남쪽에서 땅을 팠다. 오랜 가뭄으로 땅이 메말라지자, 마을 회의에서 관개용 우물을 파기로 했기 때문이다.

3m쯤 파내려 갔을 때 한 농민의 곡괭이 끝에 사람 몸통의 도용(陶俑)이 걸려 나왔다. 옛날부터 시양촌 주변에서 도용 조각이 발견됐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사람의 몸통 모습을 갖추었다. 또한 옆에서는 얼굴 모양이 발견됐다. 2200여 년 동안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지하군단 병마용(兵馬俑)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순간이다.

오른쪽 아래의 1번 자리가 병마용을 처음 발견한 곳이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기간이었다. 광란이 고조됐을 때 대륙 전역에서 막대한 역사 유적과 유물이 파괴됐다. 이에 따라 중국 당국은 병마용의 발견을 중시했다.

1년여 동안 기초 조사로 1~3호갱을 찾았고 막대한 유물이 잠든 사실을 확인했다. 1976년 1호갱 전시관을 지으면서 발굴을 시작했다. 문혁으로 대학이 문을 닫아 전문 인력이 없었다.

그래서 극소수 전문가의 지도 아래 학생 60명과 군인 100여 명을 동원했다. 1979년 건국 30주년에 박물관을 개관하는 일정에 따라 발굴과 유물 수습이 밤낮없이 진행됐다.

3차 발굴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서 조립 과정 중인 병마용
속도전식 발굴은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너무 조급하게 발굴과 수습을 하고 복원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병마용이 훼손됐다. 본래 병마용은 지하에서는 선명한 색채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발굴되어 빛과 산소에 닿자, 금방 산화되어 검게 퇴색했다. 떨어진 색깔의 복원은 지금도 해결되질 않고 있다. 게다가 땅속에 눌리고 깨진 병마용을 복원하는 작업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1개의 병마용을 제대로 복원하는 데는 적어도 일주일이 걸린다. 병마용이 머리, 몸통, 팔, 다리 등을 따로 빚은 뒤 구워서 조합했기 때문이다.

발굴되어 조립이 완료되어 도열해 있는 병마용
이런 난관에 1호갱의 전체 면적 1만 3,260㎡ 중 1/5만 발굴했다. 1호갱은 길이 216m, 넓이 62m에 달한다. 그 뒤 1호갱은 1985년에 2차 발굴을, 2009년부터 3차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2차 발굴까지 1,000여 개의 병사용, 18승의 전차용, 100필의 마용, 검과 창 등 각종 무기가 발견됐다. 필자는 1996년에 병마용을 처음 찾아갔다. 그 뒤 10여 차례 방문했는데, 1호갱 발굴 현장은 장관이었다.

3차 발굴로 6,000여 개의 병사용과 100여 승의 전차용을 새로 발굴했다. 병마용의 배치 구조는 고대 군대 편제와 같다.

병마용은 얼굴 모습이 각기 다르다. 또한 검게 퇴색된 것도 있다.
1호갱은 좌군, 2호갱은 우군, 3호갱은 지휘부에 해당한다. 2호갱은 길이 124m, 넓이 98m에 달하는 데 발굴은 아직 안 됐다. 3호갱은 규모가 작아 발굴이 끝났다.

사실 병마용은 진시황릉(秦始皇陵)의 부속시설이다. 진시황릉은 면적이 56.2㎢, 높이는 120m에 달해 세계 최대 규모의 능원이다. 무려 39년에 걸쳐 지었다. 진시황이 집권한 기원전 246년부터 죄인 70만 명을 동원해서 능원은 건설했다.

아방궁을 모방해 만든 지하궁전에는 수은을 넣어 강을 만들어 바다처럼 이뤘고, 풀과 나무를 심어 산을 세웠다.

2호갱은 기초 조사만 한 채 발굴을 미루고 있다.
특히 도굴을 막기 위해서 지하궁전에 이르는 통로에는 자동 발사되는 활을 장치했다. 진시황이 타던 청동거마, 순장된 사람들의 묘군 등도 조성됐다.

병마용은 통일 사업을 완수한 진시황의 군대라고 짐작되는데 능원에서 1.5km 떨어져 있다. 진시황은 왜 병마용을 따로 건설했을까?

진시황은 기원전 259년 진 장양왕의 아들로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는 춘추전국시대 말기였다. 일곱 제후국은 전쟁과 협력을 되풀이했다. 진은 가장 호전적이고 강대했다. 강력한 법치주의와 정교한 관료제로 국력을 키워나갔다.

3호갱은 군대 지휘부로 발굴이 완료됐다.
다른 나라들은 진을 야만국이라 멸시하며 경계했다. 진시황은 강한 군대를 육성했고 노련한 외교술까지 더해서 주변국을 제압했다.

기원전 221년 제나라를 멸망시켜 춘추전국시대의 오랜 분열을 끝냈다. 진시황은 통일제국인 진이 영원하리라 믿었다. 따라서 통일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면서, 자신의 죽은 뒤에도 거느릴 군단을 만들었다.

실제 병용은 출전하는 병사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 늠름한 체격에 키는 175~195cm다. 병용의 포즈와 얼굴 표정은 각기 다르다. 군단은 선봉, 주력, 후위, 익위로 구성됐다.

진시황이 생전 타던 마차를 1/4로 축소해 제작한 청동거마
선봉에는 갑옷을 입지 않은 경보병용이, 주력은 38대의 전차와 중보병이 엇갈려 배치됐다. 중보병은 갑옷을 입고 손에 창, 칼, 활 등의 병장기를 들었다.

진시황은 영생불사하면서 지하군단으로 천하를 호령코자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진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고 각종 제도를 개혁했지만,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죽은 뒤 4년 만에 멸망했다.

무리한 토목 사업으로 국력을 낭비했고 가혹한 노역으로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첫 통일제국은 단명했지만, 병마용으로 그 찬란한 문명을 엿볼 수 있다.

시안성곽의 남문 위 성벽에서 바라본 성곽과 환성공원의 전경
1997년 린퉁은 시안(西安)에 통합됐다. 따라서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시안에 있다. 시안은 13개 왕조가 흥성했던 고도(古都)다. 역사에 걸맞게 중국에서 가장 크고 완벽하며 보존이 잘 된 성곽을 갖고 있다.

시안성곽은 높이 12m, 길이는 13km 740m로 도심을 둘러싸고 있다. 1370년 명나라의 주원장이 명을 내려 1378년에 완공했다.

하지만 원형은 당나라 때 건설됐던 황성인 장안(長安)이다. 현재 남아있는 당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대안탑(大雁塔)이다. 대안탑은 648년 당 고종이 창건한 쯔언쓰(慈恩寺)의 석탑이다.

대안탑 남쪽 광장에 있는 현장상. 쯔언쓰는 당 황실이 창건한 사찰이다.
본래 쯔언쓰는 규모가 아주 커서 절 내 승방이 1,897칸이 있었다. 하지만 당대 말기 전란으로 사찰은 불타 없어졌고 대안탑만 남았다.

대안탑은 652년 승려인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경전 번역본을 보관하기 위해서 건립했다. 탑 높이가 65m, 둘레가 25m에 달하는 7층탑이다.​

시안 남쪽에 있는 펑샹(鳳翔)현에는 진나라와 관련된 시펑주(西鳳酒)가 있다. 시펑주는 기원전 600여 년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진은 진목공이 다스렸다. 어느 날 들판에서 야인들이 진목공이 아끼던 말을 잡아먹는 사건이 일어났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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